다급해진 공화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영국은 극도의 중립적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였다. 오히려 독일과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로 국민군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스페인 본토의 영국령 지브롤터 주둔 영국 해군은 이를 방관하였다. 프랑스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지원에 주저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의한 ‘불간섭 위원회’가 영국의 주도하에 설치된 이후로는 국제 협약 상의 이유로 내전 개입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불간섭 위원회의 참여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 국민군을 도와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협약 위반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련과 멕시코 만이 스페인 공화 정부의 유이한 후원자였고 특히 소련은 전투기, 폭격기, 전차, 군사 고문단, 공산당원을 비롯한 광범위한 물적, 인적 지원을 하였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국가들과 공산주의 소련이 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왜 그들은 공화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파시즘의 확대를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 정부를 지원해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스페인 내전’의 저자 앤터니 비버는 저서에서 확전에 대한 부담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를 자극하려하지 않기 위해 노골적인 유화 정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스탈린도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초반에는 공화 정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유화 정책은 파시즘 국가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음으로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이는 곧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이 파시즘 확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1917년 공산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련 볼셰비즘의 확대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유 진영 국가들이 민주 공화정을 지향했던 스페인 공화 정부를 소련과 비슷한 공산주의 계열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이 본격화되고 마드리드가 사실상 소수의 소련 고문단과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목격한 이후, 공화 정부 색깔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스페인 공화 정부가 좌파적 성격은 어느 정도 띠고 있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자유선거를 보장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보통 국가’였다.(실제로 공화정 초기에는 알칼라 사모라-카세레스 키로가의 온건보수 내각이 집권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 눈에는 공화 정부는 ‘또 다른 모스크바’와 다를 바 없었고 계급 혁명을 위해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불안정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오히려 서구 진영의 보수 정치가, 자본가 계층은 친기업적이고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건 프랑코 국민 진영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는 미국 하원에서 공화 정부에 대한 무기 수출 안이 부결되고, 서방 은행들이 점점 공화 정부에 대한 신용 대부를 거부한 반면, 프랑코 정부에 차관을 지원해주는 식의 형태로 노골적인 국민진영 지지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국경으로 유입되는 무기를 막기 위한 감시 활동을 벌였는데 대부분 소련의 무기가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거쳐 들어가는 것만 적발하였고 지중해에서 국민군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해상 지원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스페인의 공산화를 두려워 한 자유 진영 국가 엘리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불간섭 위원회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의 위험한 도발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공화 정부 패망에 일조하였다.      

국제 여단의 참전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와 이성을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참전했다.

(출처: http://www.malgusto.com/pequenas-pildoras-historicas-30marzo2015/)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 국가들이 정치적 이유로 공화 정부에 대한 정규군 파병에 미온적이던 동안, 코민테른(전 세계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의 주도로 의용군을 모집, 국제 여단이 결성되었다. 물론 인적, 물적 측면에서 소련의 개입과 지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북유럽, 중남미, 중국 등 다양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자발적으로 참전한 사례였다. 총 53개국 약 3만 5천여 명의 병력 규모였고 이들은 간단한 제식과 사격 훈련을 거친 후, 즉시 마드리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물자 지원은 넉넉하지 못했다. 무기는 낡았으며 각국에서 물자 보급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16종류의 서로 다른 구경과 탄약을 쓰는 총기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베테랑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병사들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작전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여단의 병사들은 반강제로 입대한 국민군과 달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고,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공화 정부가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성의 수호를 위해 날아온 자유세계의 사람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했지만 당시,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공화 정부를 지지하였다. 국민 진영과 그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적 성향이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이 펜을 잠시 던져놓고 자신의 서재를 뛰쳐나와 공화 정부를 지원하러 기꺼이 총을 들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어서 귀국 한 이후에는 자신이 보았던 전쟁의 참상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을 ‘카탈루냐 찬가’로 저술하였다.


“1936~1938년 바르셀로나의 시가전”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공화 정부를 위해 복무했고 국민 진영에 대한 반감 뿐 아니라, 공화 진영 내부의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출처: http://www.fornewssites.org/posts/imagenes/17325420/Fotos-antiguas-con-gran-historia.html)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말로와 생텍쥐베리 역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공화 정부를 도왔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파시즘의 만행을 알렸고 후에 내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남겼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물론 참전 후 조지 오웰처럼 공화 정부 내 좌익 정당들 간의 파벌 싸움으로 환멸을 느낀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지성을 수호하고자 한 대의명분은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공화 정부는 왜 패망하였는가?

여튼 공화 정부는 1939년 4월 1일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패전의 원인으로는 공화 정부의 내부 분열을 들 수 있다. 온건한 성향의 아사냐 대통령과 키로가 총리가 이끌었던 초기 공화 정부는 내전 발발 당시 자신들의 확실한 우군이었던 노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키로가 내각은 36년 이미 국민 진영의 반란이 가시화되고 각 지역을 방어하는 공화군과 치안 병력들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경찰들이 속출했다.) 제일 믿을 만 했던 세력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중앙 정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국민 진영 반란군은 식민지 모로코, 카나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서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 북부의 부르고스 지방을 휩쓸었다. 노동자들과 민간인들을 무장시켜 반란군에 저항하는 것은 이제 해당 지방 행정 수장들의 결단에 달려있었다. 하엔 시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주지사가 반란 가담 우려가 있는 경찰 병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대신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국민군의 반란을 사전에 제압한데 반해, 오비에도 시와 같은 경우처럼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한 우유부단한 주지사 때문에 반란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어 공화 정부의 관리들과 노동자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태생적으로 민중을 신뢰하지 못했던 공화 정부 정치 엘리트들의 오판이 결국 프랑코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공화군 포로들”

국민군과 공화군 모두 포로들을 무작정 '데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1936년 11월, 시에라 데 과다라마

(출처: http://www.voxeurop.eu/en/content/article/781661-civil-war-still-open-wound)

1. 공산당의 횡포: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자는 다 프랑코의 첩자들이다!

공화 정부 집권 내각인 인민 전선은 다양한 이념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 좌파 공화주의, 중도 자유주의, 아나키즘(절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을 표방하는 연립 정당들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국민 진영이 개전 초기에 이미 프랑코를 총통(generalissimo)으로 추대하고 내부 결속을 다진데 반해, 공화 정부는 내전 기간 동안에만 네 번의 내각 교체가 단행되었다. 통일되지 않은 지도 체제는 전시 상황을 관리하는데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소련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스페인 공산당은 공화 정부 내각에서 주도권을 쥐려했고 사회주의 세력과 아나키즘 세력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이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당의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운영 방식은 절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의 거센 불만을 야기했다. 

심지어 물자 보급을 담당하던 공산당 소속 장교들은 전방에서 국민군과 싸우고 있는 몇몇 부대에 무기 지원과 의약품 보급을 거부하였는데 해당 소속 부대장이 공산당원이 아니거나 아나키스트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온건 자유주의자였던 후안 네그린이 공화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자 그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산당의 횡포를 방관했다. 공산당원이 주동이 된 군 수사국은 묻지마 식으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거나 공산주의에 비판하는 좌파 진영 인사들까지 잡아 감금, 고문, 처형하였다. 스페인 공산당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으로 일관된 숙청은 프랑코 국민 진영이 했던 짓거리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이에 대해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2. 와해되는 국제여단

인민전선 내각 안에서 불필요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동안 사상 검증에 따른 보급품 수송이 자주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전방에 배치된 공화군 병사들은 점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자유를 수호하려 이역만리 타국으로 온 국제 여단 소속 병사들은 점차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간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편지로 본국에 있는 가족, 자국 언론에 공화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선이탈, 탈영, 태업 등의 방식으로 국제 여단 병사들이 저항하자, 스페인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은 거칠게 대응했다. 편지를 검열하거나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국제 여단 병사들을 집단 수용소, 정신 병원에 감금하였고, 심지어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급기야 1937년 9월에 공화 정부가 국제 여단 병사들의 지위를 스페인 공화군 소속으로 규정짓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외국인이었던 국제 여단 병사들이 스페인 군법의 적용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들의 제대나 본국 귀환은 이제 기약이 없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자 했던 그들의 용맹함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3.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대립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보수 국민 진영과 진보 공화 정부 간의 이념 전쟁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 왕정복고(카를로스 왕당파), 보수적 공화주의(몰라 이하 여러 장군들), 급진 파시즘(팔랑헤당) 등 국민 진영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내부에도 여러 대립 구도가 존재했다. 


“필사의 탈출”, 1939년

공화 정부의 패망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자 많은 스페인인들이 목숨을 걸고 스페인-프랑스 국경을 넘어가 수준 이하의 난민 생활을 감수했다. 

(출처: http://es.fanscup.com/real-betis-balompie/forumpost/39595)

특히 공화 진영의 내부 결속을 저해했던 원인 중의 하나가 중앙-지방간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었다.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역은 전통적으로 마드리드 주도의 중앙 집권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고 이는 바스크 인들이 대다수였던 바스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 불신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인들과 바스크 인들이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를 지지한 까닭은 그나마 공화 정부가 프랑코보다 덜 중앙집권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은 프랑코라는 점 외에 여러 면에서 이질적이고 융화될 수 없었던 중앙-지방간의 느슨한 연합은 시간이 지날수록 와해되기 시작했다. 내전이 발발하자 지방 정부의 자치는 보류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선호하는 공산당이 공화 정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다른 좌파 정당을 탄압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대다수였던 카탈루냐 지역은 이에 반발, 1937년 5월, 스페인 공산당을 상대로 ‘내전 속의 내전’을 벌였다. 여기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득세하자, 공화 정부 내의 여러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제는 심화되었다. 1937년 초에 남부 도시 말라가가 결국 국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공화 정부의 총리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독립 의식을 싫어하여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단결하는 내부 통일에 집착할수록, 지방 민심을 점점 상실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화 정부 패망 임박”

1938년 5월, 국민 진영(회색)의 공세는 공화 정부(붉은색)를 두 동강 내버렸고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다. 패전이 확실시되었음에도 이듬해까지 전쟁이 계속된 이유는 공화 정부가 프랑코를 상대로 항복 협상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4. 선전 효과 집착에 따른 전술 실패

공화 정부의 관료들과 공산당원들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선전 효과에 집착했다. 1937년 초부터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독선은 더 심해졌는데 전략적으로 별 의미 없는 소도시 몇 개를 대병력을 이용해 점령한 후, 자신들의 성과를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자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제공권에서 절대 우위였던 국민군은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공화군에 뺏긴 지역을 금세 수복하곤 했다. 오히려 국민 진영의 뒤이은 반격으로 공화군은 더 큰 손실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불필요한 병력 소진은 1938년 7월 에브로 강 대공세 작전의 실패로 전체 병력 대부분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이 공군을 이용하여 아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 식의 무리한 전진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지만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마드리드의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내부에 프랑코의 첩자가 있어서 패배했다는 논리를 펴며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다음편 예고)두 개의 스페인(下): 아물지 않은 상처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을 뒤흔든 전쟁, 혁명은 절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50여년 넘게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혁명적 사건의 시발점은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내재된 원인들이 누적된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조그만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폭발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은 즉흥적이거나 우연이 아닌 이유로 발생한다.

1936년 7월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은 공화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이하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이하 몰라) 등 보수적 성향의 장군들이 팔랑헤 당(파시즘 정당, 후에 통합 팔랑헤당으로 개편, 프랑코 내각의 집권여당이 된다.), 왕당파와 함께 스페인령 모로코와 북부 스페인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보수 우익 반란군 진영인 국민 진영'과 '인민전선 내각이 이끄는 공화 정부'가 이념의 차이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약 35만 명이 사망, 50만 명의 국외 망명자가 발생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장한 공화 정부 여성 지지자들, 1936년, 마드리드.”
후방 지원과 시가지 전투 참여까지 실제로 여성들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출처: http://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war-and-conflict-spanish-civil-war-pic-23rd-july-1936-an-news-photo/80752137)

작용과 반작용: 지배 세력의 억압에 대한 민중의 대응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사상의 자유와 과학이 전 유럽을 아우르던 20세기 초반까지도 미신에 근거한 가톨릭 권위주의와 절대왕정에 푹 절여있던 스페인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 스페인에는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종교 재판소가 아직 존재하였고 학문의 자유와 교육, 문예는 가톨릭교회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세기 제국의 위용을 갖추던 모습은 쇠퇴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군인들의 총칼로 민중을 지배하였다.

스페인 왕국 안의 이민족이었던 북쪽의 바스크 인들과 동남쪽의 카탈루냐 인들은 여전히 마드리드 중앙 정부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갈등은 카스티야 지방(마드리드)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내전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 왕, 군인, 교회, 자본가와 대지주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고 장군들의 빈번한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일반적인 의미의 쿠데타와는 다른 스페인, 남미에서의 군사 항명. 국왕으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는다.)는 스페인 사회를 도덕적 해이와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고 가곤 했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지배를 감내해야했던 도시 중산층, 노동자, 소작농 계급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신론,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급진적인 외래 사상에 쉽게 포섭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듯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이미 50여 년 전부터 스페인 사회는 군주제, 가톨릭, 군벌, 자본가,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다양한 계급과 이데올로기로 사분오열되었고 온건한 개혁이나 타협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대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르고스 지역에서는 사제들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중세적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대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였고, 말라가나 산세바스티안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하는 등 모순적인 공존이 가능한 곳이 바로 19세기 말 스페인이었다. 타협할 수 없었던 양대 세력의 거대한 충돌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내전의 대내적, 대외적 영향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진영이 승리하기까지 3년 동안 전선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공화군과 국민군 양쪽 모두에 의해 정치인, 민간인, 지식인,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보복 학살 및 불법 구금, 고문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광기를 피해 스페인인들은 미주, 중남미, 프랑스 등 국외로 도피하였고 이는 스페인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초래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진영의 방관 속에 공화 정부를 지원한 소련과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지한 나찌 독일, 이탈리아가 충돌하는 국제 대리전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신형 무기와 전술을 스페인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시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승리를 통해 이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내전 종식 후 5개월 뒤 벌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31년 대규모의 민중 혁명으로 국왕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직후 수립된 스페인의 ‘유일합법 공화 정부’는 서구 진영이 사태를 방관하는 사이에 결국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 반란군에게 패망하였다. 반란군 장군 중 하나였던 프랑코는 ‘지도자'(caudillo)로 등극, 1975년 죽을 때 까지 36년 간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고 77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은 민주화가 되었다.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Ι)는 자유선거 실시와 정당 활동을 합법화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는 한편, ’사면법‘을 제정, 좌익 진영의 과거 범죄와 더불어 프랑코 진영의 반란죄 및 기타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구 반란 세력을 단죄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으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스페인 내전의 특징과 민중들의 수난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남유럽 국가의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우리의 해방 정국 이후 현대 정치사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절대 왕정과 일제 통치라는 강압적 지배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중들은 점점 폭력이 수반된 극단적인 혁명을 모색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한국의 민중들은 각각 왕정 폐지, 일제 패망에 따른 절대 권력의 공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율적인 국가 경영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 의회민주주의 같은 상식적이고 온건한 입헌적 절차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백색 테러, 적색 테러 등 무고한 살인과 폭동, 사보타주 따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 했다. 집단이성의 마비에 따른 시대적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 등의 방식 외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던 결과가 내전(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이었다.

1. 내전 발발 초기

 

 

스페인 내전은 장기간 누적되어온 보수와 진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 가톨릭과 무신론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갈등을 과격한 반동적 쿠데타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 뿐 아니라, 주요 거점에 배치된 일개 하사관이나 병사들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공화 정부의 관리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분명하였다. 반란 초기에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등 분명 여러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었던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부대 지휘관의 결단이나 하급 장교 혹은 병사들의 조직적인 행동, 그리고 치안대와 돌격대 같은 준군사 조직, 각 주지사들이 어느 편에 설지에 대해 신속하게 입장 표명을 함으로써 내전 발발 한 달 만에 스페인 전역은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아직은 건재한 공화 정부”
내전 발발 한 달 후인 1936년 8월. 국민군(회색)은 고작 식민지 모로코와 지중해의 여러 제도, 그리고 북부의 부르고스, 팜플로나 지방, 서남부의 안달루시아 일부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공화 정부(붉은색)는 수도 마드리드와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북부의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시가 북쪽의 국민군 영역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제3의 도시 발렌시아와 군사 요충지 카르타헤나 항 역시 공화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2. 미디어를 통한 국제 여론 포섭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이전의 전쟁의 양상들, 즉 군대 대 군대의 싸움에 의존했던 일차원적 전장의 개념을 벗어나 라디오 방송, 신문과 같은 현대 미디어를 통해 상대 진영의 사기를 꺾으려했고 각 진영의 공보 담당 관리들은 외신들을 이용하여 각자 자기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였다.

3. 우리 안에 적이 있다!

전쟁의 양상은 전면전과 더불어 후방에서의 게릴라 전, 도시 점령 후 시가전 등 꽤나 지루하고 소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적의 첩자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경향을 가진 인사들이 각각 상대 진영 도시에 암약하여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설령 일부 도시에서는 그런 세작들의 활동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안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각 진영 내부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불신과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군 국민 진영의 장군 몰라는 방송을 통해 “마드리드에는 우리의 제5열이 침투해있다.”라는 식으로 공화 진영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였는데 결과는 예상외로 효과적이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한 축인 스페인 공산당원들은 군 수사국을 이용해 초법적 권한으로 우익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처형과 고문을 자행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려했다.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비이성적인 공포 정치는 결국 공화 정부 내각에 대한 민심 이반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회 민주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 중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내부 불신은 프랑코의 마드리드 입성과 공화 정부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인민재판: 우리 편 아니면 전부 빨갱이(혹은 반동)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결백한 민간인인지를 판단하거나, 적에게 얼마만큼 부역했는지 에 대해 혐의를 입증하려는 능력도, 의지도 사실상 양 진영 모두에게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일부 도시에서는 공화 정부 쪽 민병대에 의해 국민 진영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지주, 성직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다. 또한, 공화 정부의 치안 당국은 국민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미리 정치범 수용소의 우익 인사들을 줄줄이 총살시켰다. 그러다가 국민군이 점령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우익 인사들은 기세등등하게 좌익 인사들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밀고하는 등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무장한 사제들과 레케테(카를로스 파 민병대: 왕당 보수파), 팔랑헤당 당원들은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노동조합원, 노조 간부, 공화군, 공화 정부 관리 및 반 국민진영 혐의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어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즉결처분하였다. 물론 변호인이 동석하거나 삼심제 형식의 상식적인 재판 절차 따위는 없었다. 국민 진영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보통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국군의 보복, 밤에는 빨치산 세상을 감내해야 했던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민초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지 모로코에서 거병한 국민 진영은 현지 리프족들로 이루어진 외인부대를 반란에 끌어들였다. 본토에 상륙한 후 이들은 뛰어난 매복술과 근접전으로 국민 진영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스페인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적인 학살, 강간, 약탈을 저질렀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 점령군의 희생양이었던 그들이 스페인 장군 프랑코를 위해 총을 든 것은 참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출처: http://www.alternatehistory.com/discussion/showthread.php?t=287588)

5. 시가전에 따른 국민군의 보복

내전 기간 동안 국민군의 도시 탈취 작전에서 되풀이 된 시가전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국민 진영은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 지원으로 공화 진영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시 접수’를 위해 투입된 지상군 병력 중 상당수가 건물이나 주택에서 은폐 중인 공화군 잔당과 무장한 노동자, 민간인들의 기습 사격이나 저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건물을 하나하나씩 제압하면서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병력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독이 오를 데로 오른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아랍인으로 구성된 스페인령 모로코 외인부대)들은 민가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병원의 환자들을 집단 살해하거나, 생포한 민간인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만행으로 대응하였다.

6. 무차별 도시 폭격 작전과 민간인 살상

프랑코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원한 이탈리아와 나찌 독일은 공화 진영 도시들에 대해 현대 전쟁사에서 최초로 다수의 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대량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독일의 리히트호펜 대령이 지휘한 콘도르 군단(스페인 파병 독일 군대) 소속 하인켈, 융커 폭격기의 무자비한 폭격은 비인도적인 인명 살상을 초래했고 특히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은 적지 않은 민간인 학살(민간인 희생자 수에 대해선 국민 진영과 바스크 자치정부가 다르게 주장함)을 초래했기 때문에 나찌 독일과 국민 진영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진영과 동맹국의 폭격전략은 국민 진영이 공화 진영의 도시들을 탈취할 때 그 심리적, 전술적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은 더욱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7. 대리전쟁(독일, 이탈리아 vs 소련)

애초부터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정부는 막대한 차관과 군대, 무기 등을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스페인에 자신들과 유사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 프랑스의 후방을 위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 수송기들은 모로코 주둔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들을 지중해 건너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에 신속하게 상륙시킬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공화 정부가 국민 진영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독일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나찌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 국민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콘도르 군단’을 결성, 파병하였는데 스페인 전장을 많은 신무기와 전술을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하였다. 거의 수직으로 강하하여 목표물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하는 슈투카 폭격기도 이 중 하나였다. 폭격시에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났기 때문에 공화군과 스페인 시민들이 느꼈던 심리적 공포는 배가되었다.

(출처: http://www.thisdayinaviation.com/tag/stuka/)

(다음편 예고) 두 개의 스페인(中): 지성의 패배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가끔 글을 쓰기 정말 귀찮을 때가 있다. 성격이 게으른 편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이란 ‘정해진 마감일에 쫓겨 마지못해 기계에서 찍어내듯이 쓰는 글’이 아니다. 그냥 쓰고 싶을 때 써야 좋은 글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쓰고 싶은 주제가 마구 떠올라서 흥분되는 바람에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기에 바쁘고, 어떤 날은 정말 쓸 소재도 안 떠오른다. ‘삘’은 안 나오는 마당에 정해진 기일에 맞춰 대충 써낸 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체념감에 아예 손을 놓고(넋도 같이) 배 째라 식으로 버티는 일도 다반사이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의 성과란 그 날 개인의 생체 리듬에 맞춰 변화무쌍한 것인데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은 영 날이 아니네요.”라고 태업을 하며 여유를 부리기에는 너무나 살벌한 사회이다. 낮과 밤, 사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시간적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생체리듬 대신, 오늘날 우리는 한낱 기계에 불과한 12진법짜리 시계의 분침과 초침의 순환적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동규칙을 정한다. 심지어는 밀리 초(1/1000초), 그 찰나의 순간마저도 자본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주어진 시간을 틀에 맞추어 해야 할 과업으로 빽빽하게 배열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에 항거하거나 이에 낙오된 자를 이 사회는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인생의 낙오자’로 만들어버린다. 높은 생산성을 달성해 인간의 후생 개선을 위해 고안된 시간의 규격화는 역으로 우리를 시간의 권력에 복속시킨다.

 

“클릭 대기 중!”
1000분의 1초, 그 찰나의 시간 차이로 개강을 앞두고 우리는 희비가 엇갈리곤 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eh5b/110132019651)

시간 권력의 역사(시간과 개인, 사회)

사실 시간의 권력은 산업사회 이전 시대에도 권력층에 의해 행사되었다. 고대에는 농사의 풍작과 치수(治水)가 곧 지배층 권력의 원동력이었다. 이 시기 시간의 개념이란 1년에 걸친 농사의 풍년을 위해 해와 달, 비와 눈의 내리는 시기를 예측하고 날씨와 풍요의 신께 제사 드리는 행위의 반복을 위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중세 사회의 권력이었던 교회는 농사와 더불어 수많은 종교적 과업과 축일을 통해 민중의 1년 365일을 짜임새 있게 간섭하려했다. 교회가 가진, 시간을 측정 및 설정할 수 있는 능력과 일반 민중이 해야 할 일과를 배치하는 것은 곧 권력이었다. 시간의 권력은 권위적이었지만, 봉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산력을 보장하는 시간적 권력이면 족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권력은 여전히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교회)에 속해 있었다.

‘시간의 주권’이 인간에게 속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먼저 알아차린 이들은 상인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가 간, 도시 간 원거리 교역이 증가하자, 상인들은 유통 과정의 속도, 상품의 품질, 시장 정보력 등이 모두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 가치가 좌우됨을 깨달았다. 상대적 희소성에 따른 차익을 얻기 위해 남들보다 더 멀리 내다팔고 시장의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혹은 상품 품질의 보존을 위해, 어음과 같은 신용 화폐의 청산과 상환 기일을 지키기 위해 보다 정확하고 엄정한 시간관념이 필요했다.

이후 19세기의 산업 사회가 도래하자 시간의 권력은 더 치밀해졌다. 포드주의에 입각한 대량생산을 위해 숙련 노동자의 탁월함 대신 자본가들은 공정, 노동의 단순화와 획일화를 택하였다. 과거에는 고된 숙련 기술을 익힌 장인만이 대접을 받고 소량 생산에 따른 고부가 가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열 살짜리 어린이도 몇 분이면 익힐 간단하게 응축된 공정 기술 패러다임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자본가들의 관심은 복잡하거나 고차원적인 장인 기술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위해 단일 공정의 보다 빠른 시간 단축과 이에 반비례하여 노동자의 노동력을 한계 생산점에 다다를 때까지 효과적으로 착취하는 것에 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생산단가를 낮추어 시장 경쟁력을 갖추고 이윤을 취한다.

 

“빠르고 효율적인 식사”
노동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이윤 창출에 도움이 안 되는 ‘비효율적인 시간’으로 간주되었다. 공장 노동자들의 식사시간과 휴식시간 단축이 규정된 일과표 부여를 통해, 자본은 개인의 시간을 장악하였다.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
(출처:
http://cinemaedebate.com/2009/11/23/tempos-modernos-1936/)

생산비 절감을 위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쌍두마차’는 이때부터 불을 뿜기 시작했으며, 인체의 관절과 신체의 역학구조는 생산을 위한 공정단계 하나하나에 알맞게 분석되고 재조직되었다. 공정의 시간단축과 더불어 노동자의 하루 일과는 일괄적으로 생산 활동에만 최대한 투입되도록 짜였으며 출근시간, 식사시간, 휴식 시간의 엄수는 시간 권력의 냉엄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시간이 곧 권력이며 시간이 곧 돈인 시대가 도래했다.

시간 측정의 통일: 패권 국가로 향하는 길(시간과 국가)

예로부터 시간을 측정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존재했다. 이것이 국가적 목표가 되었을 때 만들어진 것이 ‘역법’(曆法, 달력 계산법)이다. 역법은 당시 국가나 시대에 따라 상이했다. 개별 국가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채택한 역법을 얼마나 더 넓은 세계에 ‘표준력’으로 공인받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국가 간의 권력 문제’이다. 예로부터 패권 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 중의 하나가 자신들만의 ‘역법’이었다. 시간을 관장하여 지배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곧 권력이었기에 고대부터 이집트력, 그리스력, 로마력, 율리우스력 등 패권국의 달력 계산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주변국은 패권국의 역법을 수용하였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는데 중화사대질서 하에서 중국의 역대 왕조는 천하에서 사용할 자신들 고유의 역법이 있었고 왕조나 황제가 바뀔 때마다 그 해에 고유의 칭호를 붙이는 연호(年號)를 공표했다. 이러한 중국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은 이웃나라에도  통용되었고 ‘건원’(建元)은 패권국만이 행사하는 특권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주변국에게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건원은 곧 ‘자주성의 표출’이었다. 우리나라는 일부 왕조를 제외하면 신라 말기 선명력, 고려 후기 수시력, 조선 전기 대통력, 후기에는 시헌력 등 역법에 관해서는 대부분 중국의 것을 차용하였고, 이는 곧 중화 패권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였다. 이렇듯 시간 측정법의 표준화는 ‘국가 간 수직적 권력관계의 상징’이었다. 또한, 역법의 교체는 곧 개혁의 시발점이자, 정치권력의 교체를 의미하였다.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 정부가 12진법대신, 10진법 시간관념 도입을 시도했던 것, 1895년 을미개혁 때 조선 정부와 1926년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이 기존의 전통 역법을 버리고 서양식 태양력을 채용한 것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력이 된 태양력, 즉 그레고리력의 보급과 더불어 전 세계는 지구의 자전에 따라 상이한 시차를 감안하여 표준 시간대를 채택하고 있다. 이 역시 국제정치 패권의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7세기부터 해양 패권을 독식해온 영국은 국제 무역과 효과적인 식민지 통치를 위해 서로 다른 지리적 공간에 공통적으로 적용할만한 새로운 국제 표준 시간대의 설정이 필요하였다. 이를 자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본초 자오선(Greenwich Mean Time Line, 일명 GMT, 경도 0도선)으로 삼아 국제 표준 시간대의 기준으로 19세기 후반에 국제사회로부터 공인받고 이를 토대로 각국은 영국이 만든 규칙에  따라 자국의 시간대를 수용하였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서기’(西紀)라고 불리는 그레고리력의 확산과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의 공인은 영국 중심 세계패권주의에 상응하는 하나의 특권이었으며, 이로써 전 세계를 (팍스 브리태니커에 기초한) 하나의 시장권으로 묶는 국제 자유무역체제에 편입시켰다.  

 

“두 번 잃어버린 시간대”
1908년 대한제국은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 시간대를 채택했는데, 1912년 일제 침탈로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하는 ‘도쿄시’에 편입되었다. 해방 후 1954년 이승만 정부는 일제 청산을 이유로 127.5도 표준시로 회귀하였으나 1961년 박정희 정부는 다시 도쿄시를 채택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표준시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015년 북한은 광복절을 기해 기존 경도 135도의 도쿄시와 30분의 시차가 있는 이전 대한제국의 127.5도로 회귀하고 이를 ‘평양시’로 명명하였다. 우리나라는 고유의 표준시를 두 번 잃어버린 셈이다.
(출처:
http://m.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207)

속도경쟁의 결과: 시간의 폭력성

전술했듯이 근대부터 시간의 권력은 자본과 노동의 통제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현대에 접어들어 시간은 모든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 가치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 동네 PC방을 비롯한 편의 오락 시설 등은 이용시간을 기준으로 값을 지불해야하고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기준은 ‘시급’단위로 책정되며 자동차, 고속철도 등의 교통수단은 얼마나 더 빠른가가 기술진보의 척도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도를 측정하는 단위는 km/h, 즉 한 시간 당 얼마의 거리를 가느냐이다.

더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거래 행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는 것이 하나의 공리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사회에서 속도 경쟁은 사회적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한민국만큼 배달이나 택배 서비스 문화가 일상화되어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가만히 앉아 전화 한 통이면 전국 어디든지 믿기 힘들 정도의 짧은 시간 이내에 맛있는 음식과 주문한 상품을 배달 받을 수 있는 특유의 배달, 택배 문화는 선진산업사회의 발전된 후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껏 누려온 배달, 택배 서비스 역시 시간의 권력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배달 업계에서는 배달원들에게 하루 안에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배달 업무를 배정하고 그 성과에 따라 직무평가와 보수 지급, 고용에 대한 계약 여부를 결정하였다.

 

“속도에 대한 집착이 불러온 비극”
더 빨리 소비하고 싶고, 더 빨리 팔아야만 하는 배달 문화의 이면에는 ‘시간의 폭력성’이 내재해있다.
(출처: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709590)

우리가 집에서 편하게 음식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살기 위해 살인적인 업무를 감당하여야 했다. 자연스레 이러한 '시간의 폭력성'앞에 이들은 교통법규를 지켜야 할 하등 필요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들은 도로에서 위험한 곡예 주행을 해야 했고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해가며 인도로 겁 없이 달린다. 법치질서는 무너지고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이로 인한 무고한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해왔던 배달, 택배 서비스가 역으로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물론 범법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하지만 광적인 빠름을 추구하는 시간의 폭력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는 이상, 교통위반에 대한 처벌수위만 높인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시간 압축을 향한 욕망은 파국적 결말을 맞는다. 누군가의 생계를 쥐락펴락하면서 더 빨리빨리 문화를 종용하는 ‘시간의 폭력성’은 사회 법치를 무시하는 명분이 되고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결국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한가? 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시간 이용의 차등 권력화

‘부자도 돈을 주고 시간을 살 수 없다.’, 혹은 ‘누구에게나 24시간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은 평등하다.’라는 말이 현대에 접어들어 더 무게감 있는 인생의 격언으로 통용되고 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사회적 평판이 결정된다고들 한다. 하루 24시간, 1440분, 86400초의 시간은 축적되어 서로 다른 인생의 군상들을 만들어낸다. 누군가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바꿔 말하면 시간 활용을 게을리 한 자는 하류 인생으로 떨어질 수 도 있다는 시간의 권력이 주는 하나의 공포이다.

이렇듯 시간의 이용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당연히 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자가 권력과 성공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하지만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이라 해도 경제적 조건의 제약에서 최대한 자유로운 자가 결국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에 시간을 더 여유롭게 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사회적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초 단위로 해야 할 일과가 짜여 있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특권은 더 크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과 경제적 걱정 없이 더 나은 인생을 위해 투입할 수 있는 시간적 여력이 있는 사람의 시간 활용도는 분명 다르다.

이렇듯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보다, 시간을 남들보다 얼마나 더 자유롭게 할애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과 환경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러한 제약의 차이는 계급적, 계층적 차이에 기인한다. 동일한 직장 내에서 관행적으로 허용되는 일반 사원과 부장의 출근 시간이 다르고, 업무시간동안 업무 외에 할애할 수 있는 재량권도 사회적 위치와 직급에 따라 차등 배분되는 것이 현실이다. 부자나 권력자라고 해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대신, 남들보다 ‘시간을 더 벌 수 는 있다.’ 시간이 돈, 권력이고, 권력과 돈이 곧 시간이다.

짜인 인생 시간표: 해야 할 것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

근대로 접어들어 시간은 곧 국가적 계획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대중의 사회적 리듬을 통제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권력이었기 때문에 개개인에 대한 시간의 관리와 계획은 교육적인 측면에서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하루 일과나 방학 시간표를 짜는 습관을 들여 시간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르친다. 더구나 입시에 모든 교육 과정과 유년기 시절이 묶여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 우리는 그 시기에 ‘해야 할 인생의 과업’들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시기적으로 분명하게 정해진다.

입시와 관련 없는 모든 것들은(예를 들어 연애) “대학교 들어간 다음에 얼마든지 하렴.”이라는 사회적 강요아래 자의반 타의반 보류된다. 과연 대학만 들어가면 시간의 활용이 자유로울까? 20살 때부터 취업을 위한 자기 계발에 20대 대부분의 시간이 저당 잡힌다. 취업을 해서 서른 언저리가 됐을 쯤엔 ‘결혼’에 대한 압박이 들어온다. 물론 시간 할애에 대한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선택에 기초하였지만, 결국 인간은 시간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쉬어가는 여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

결국 시간의 압박에 따른 집단적 스트레스는 우리 모두에게 피해를 준다. 보복운전이나 그에 따른 보복폭행 피의자 대부분이 평범한 직장인, 자영업자 등이 다수라는 점, 그리고 공통적으로 이들은 정해진 시간에 과도한 업무를 처리해야하는 부담을 겪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시간의 압축을 통해 누리는 서비스는 우리 모두를 편리하게 했지만, 그 이면에는 시간의 압박에 따른 분노조절 장애의 확산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시간에 충실하려는 현대인의 욕망, 버스 도착 정보 알림판"
불확실성을 없애고 분, 초 단위를 기준으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http://goyangcity.tistory.com/2561)

오늘날 우리는 시간의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분과 초의 초미세 영역까지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 다음 버스나 전철이 언제 올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대중교통 앱으로 버스, 전철이 도착하는 시간을 초 단위로 알 수 있다. 한술 더 떠 환승에 필요한 시간과 제일 빨리 환승할 수 있는 플랫폼 위치까지 알려준다. 바야흐로 현대인들은 시간을 초 단위까지 통제하여 고도의 효율성을 발휘하려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 같이 촘촘한 시간의 간격에 인간이 종속되어 감을 뜻한다.

12진법과 60진법으로 정확하게 규격화된 시간은 반복적인 규칙과 규율을 부여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인간 본유의 자연적 리듬의 존재를 간과한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반복된 행동을 하게끔 하는 시간의 권력은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획일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빽빽하게 짜인 일과표에서 개인이 발휘할만한 창의적인 발상이나 창조나 재충전을 위한 ‘뜻하지 않은 일탈’은 허용되기가 쉽지 않다. 이로써 산업적 발전과 별개로 사회를 풍성하게 만드는 지적, 문화적 수준의 고양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또한, 사회담론에 대한 철학적 사고행위에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이미 ‘사치스러운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 시간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집단적 광기를 뿜으며 대중을 어떠한 전체 목표에 동원하려 애썼고(나치즘, 마오이즘, 북한식 공산주의), 반대로 권력을 이용해 인위적인 여가 시간을 허용하여 정치적 영역에 대해 대중의 무관심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살라자르의 3F정책, 전두환 5공 정부의 3S정책)

 

북한의 집단체조(mass game): 사적인 권력유지를 위해 대중을 동원하여 개인의 일상을 통제하고 시간을 착취하는 정치적 선전 기술은 전체주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출처:
http://blog.fontanka.ru/posts/151070/)

결론: 인간, 시간의 주권자

시간의 권력은 시간의 표준화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효율적인 이용을 가능케 하는 등 인류 문명의 복리후생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시간의 주권자로서 인간이 시간을 주체적으로 이용한 역사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인간은 시간에 쫓기고 시간의 틀에 자유를 속박 당했다. 중세에는 종교와 관습이, 근대부터는 자본이 ‘시간의 고용주’였다. 시간의 규칙성이 시간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과도하게 저해한다면, 그리고 시간의 권력이 시간의 주권을 인간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본의 이윤 축적에만 봉사한다면,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ex: 평일에 하는 시민 참여 정책 공청회)을 초래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필자는 마감일의 압박에 쫓겨 쓰고 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한참 지났다. 반복적인 게재는 나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업이긴 하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쓰는 것이 내가 쓰고 싶을 때 써서 좋은 글을 창조하는 것보다 뭐가 더 나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위 글의 일부 문장과 표현은「문화정치학의 영토들」, 2007, 그린비 출판사, 이진경 편저 中 ‘근대적 시간: 시계, 화폐, 속도, 최진석’에서 부분 인용 및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 Shield of Straw, 2013년, 감독 미이케 다카시)에는 희대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기요마루가 등장한다. 힘없는 여자아이를 범행대상으로 삼아온 그는 어느 날, 일본 재계 거물인 니나가와의 손녀딸을 무참하게 죽인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니나가와는 자신이 가진 재력으로 신문사와 방송사를 움직여 기요마루를 죽이는 자에게 현상금 10억 엔을 준다는 TV방송과 신문 광고를 전면 게재한다. 큐슈의 후쿠오카에서 은둔하다가 전국적인 광고로 인해 모두의 표적이 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기요마루는 아이러니하게 경찰의 보호를 받고자 자수하게 된다.

메카리 경부보는 현상금을 노리는 시민들로부터 연쇄 살인마 기요마루를 보호하여 도쿄로 압송하라는 아이러니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출처: 영화 ‘짚의 방패’(藁の楯, Shield of Straw, 2013) 캡처.

 

일본 경시청 수뇌부는 기요마루를 기소하여 법정에 세우기 위해 최정예 경호 요원(메카리, 시라이와)을 파견하여 또 다른 두 명의 형사와 함께 기요마루를 후쿠오카에서 1200km나 떨어져 있는 도쿄로 압송해오라는 임무를 부여한다. 하지만 현상금에 눈이 먼 시민들 (심지어 경찰까지도)의 습격으로 비행기와 기차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되는 상황에서 4인의 주인공들 내부에서도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눈물겨운 직업정신을 가지고 있는 메카리와 시라이와조차도 극한의 상황에 다다르자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살인마를 보호하기 위해 내 목숨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 하나 보호하려고 주인공들이 고군분투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면서‘살인마조차도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가?’, ‘법은 정말로 비인간적인 범죄에 대해 정당한 처벌을 할 수 있는가?’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오히려 저런 범죄자는 법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극도의 고통을 주어 피해자가 당한대로 갚아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호순의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 오원춘 토막살인 사건, 조두순의 여아 성폭행 사건, 고종석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과 이에 준하는 경악스러운 범죄들에 대해 대한민국의 법은 누가 보기에도 다소 미흡한 처벌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러한 솜방망이 판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저런 살인마의 인권은 존중해서는 안 된다, 혹은 극도의 고통을 주면서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러한 과거‘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에 대한 향수는 피해자의 자력구제(복수)를 금지하고 사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벌하는 오늘날 의 법치제도에 대해 국민들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범죄행위의 대가로 소중한 생명을 뺏는 건 부당하다라든지, 과도한 처벌은 범죄감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형제 폐지조차 전 세계적 대세로 되어가는 21세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응보적 정의’를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가? 이러한 현상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영화 테이큰, 아저씨, 세븐 데이즈 등 국내외를 막론한 액션 스릴러를 보면 범죄자를 엄벌해서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경찰, 사법집단이 정의를 세우기는커녕 무능함과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법당국의 무책임에 대해 분노하고, 주인공의 사적인 복수로 인해 권선징악이라는 원초적 정의가 회복되는 순간, 시청자들은 극도의 희열감을 느낀다. 물론, 주인공은 복수를 하기 위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법구금, 불법감청, 인명살상, 공공기물파손 등 수많은 불법범죄행위를 자행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그 정도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발생한 비용으로 용인되고 주인공의 행위는 정당화된다. 적어도 원칙과 절차를 따지다가 피해자를 구할 시기를 놓치는 등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의 답답한 관료주의가 몸에 배어있는 영화 속 무능한 경찰, 사법 당국보다는 나으니까.

이와 같은“결과만 좋으면 과정이야 상관없다.”는 논리는 필자가 고3때 즐겨봤던 만화 ‘데스노트’(쓰구미 오바, 타케시 오바타 作)에도 드러난다. 정의감이 넘치는 주인공 라이토는 법의 허점을 교묘히 빠져나오거나 법으로도 교화할 수 없는 극악 범죄자들을 사신 (死神)이 준 데스노트(여기에 이름을 적힌 사람은 무조건 죽는 노트)로 처단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러한 살인행위를 정당화한다. 라이토의 행동을 막기 위해 투입된 사설탐정 L은 라이토에게 법이 정의를 확립하고 범죄를 줄이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타인의 목숨을 앗아갈 권리가 너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당시에 나는 라이토 편이었다. 어떤 처벌과 교육으로도 교화되지 않는 본성, 그 자체로서의 악을 가진 존재는 인권보장과 법적인 절차를 생략하고 거리낌 없이 사회에서 ’청소‘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데스노트’에서 주인공 라이토는 데스노트를 통해 범죄자를 직접 처단하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출처: http://www.gaiaonline.com/profiles/kawaii-anime-cosplayer/8490743/

그렇다면 현대의 양형제도는 정말 정의를 바로 세우기에 부적합한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시대를 거치면서 서구 세계는 전근대적인 처벌, 고문 제도에서 탈피하였다. 범죄에 따른 대가로서 ‘생명의 박탈’보다는 ‘신체의 구속’이라는 감금형을 선호하였고 인간을 교화의 대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세련된 양형제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죄에 따른 처벌제도가 약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피고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불공평하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직 원시적 형태의 응보적 정의에 따른 법이 존속되고 있는 중동과 인도 일부의 관습법에 대해 우리나라의 많은 국민들이 부러움을 표시한다. 범죄자를 광장에 꿇려놓고 주민들이 번갈아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는 투석 형이라던가, 살인자는 그가 살인을 저질렀던 방식 그대로 처형하고, 강간범은 거세해버리며, 팔을 부러뜨린 자는 똑같이 팔을 부러뜨리는 방식들 말이다. 어쩌면 응보적 정의에 대한 향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평등주의’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당한만큼 똑같이 갚아줘야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아직 존재하고 있는 이란의 투석 형에 대해 반대하는 퍼포먼스.

출처: 연합뉴스

하여튼, 현대의 사법제도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야만성을 억제하고, 처벌보다는 범죄의 근본적인 예방과 교화를 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왔다. 또한, 법을 집행하는 인간의 판단에 대한 한계를 체감해왔기에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하고자 번거로워 보일수도 있는 여러 견제 장치를 고안해왔다.(삼심제, 묵비권, 무죄추정의 원칙 등). 기본적인 틀은 성문법 체계이지만 판단여지에 따른 재판관 개인의 재량권도 인정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에 필요한 법적 유연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법치불신에 대한 근본적 원인은 아마‘공감의 부족’일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처벌기준이 범죄의 정도에 비해 모자라다고 분노한다. 아마도 피해자의 절박한 관점에서 사건을 처리하려는 재판부의 진정성과 공감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들의 눈에는 재판관의 선고가 마치 수학자처럼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공식을 이용하여 요소를 투입하는 지극히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구나 사법부는 삼권분립을 이루고 있는 요체 중에서 유일하게 ‘국민에 의해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러한 정당성의 태생적인 결함 때문에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한 그들의 법적 판단이 과연 다수 국민의 이성과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들은 건전한 다수 국민의 상식과 괴리되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민주적 정당성도 결여되어 있고 가끔 ‘뻘짓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의 권한을 박탈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범죄자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처벌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법이 아무리 허점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최소한 21세기 인류가 갖춰야 할 이성과 명예, 합리적인 사리판단, 냉철한 Legal mind에 입각한 정교한 법치체계,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은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과, 성선설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2014년 3월, 시리아의 무장 단체 ISIS가 통치하는 한 마을에서 절도범을 율법에 따라 손목 절단형에 처한 사건이 벌어졌다. 전근대적인‘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처벌 방식을 오늘날까지 고수했음에도 왜 저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범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까? 더 엄하고 잔인하게 처벌하지 않아서였을까?

출처: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40301601006

극악 범죄에 대해 국민의 손으로 직접 처단하는 제도가 부활한다면 경각심으로 인한 일시적인 범죄 감소 효과는 있겠지만(물론 효과가 지속적이진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하여 신체적 고통으로 되갚는 행위를 반복한다면 우리는 용서와 포용, 죄책감과 같은 인간성을 서서히 상실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본능을 추구하는 짐승의 그것으로 채워질 것이다. 양형을 엄하게 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범죄율 감소에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잔인한 형태의 인과응보 식 형벌 시대’로 회귀하자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문제이다. 또한, 법에 명시되어 있는 피고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권리는 결코 범죄자를 옹호하는 수단이 아니다. 만약에 있을 사법부의 오판을 대비하고 냉정한 이성에 입각하여 정해진 원칙과 절차에 의해 범죄자를 엄벌하는 ‘최소한의 질서’를 보호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영화 짚의 방패의 중반부쯤에 극비에 부쳐진 기요마루의 위치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시민들에게 중계되자, 동료인 칸바시 경사는 3년 전 음주운전 상습범의 뺑소니 살인으로 인해 아내를 잃은 주인공 메카리 경부보를 의심하게 된다. 메카리가 범죄에 의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같은 살인범인 기요마루를 용서하지 못하여 그의 위치 정보를 대중에게 누설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울분을 가다듬고 잠시 후 냉정을 되찾은 메카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도 물론, 그 살인범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정말 몇 번이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죽인다고해서 이미 죽은 아내가 살아서 돌아오는가?


 

 결국 서울시가 이번 달 27일부로 대중교통요금을 인상하기로 했다(버스:150~400원, 전철: 200원). 서울시와 교통시스템이 연계된 인천과 경기도도 각각 요금인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2월에 서울시가 단일인상분으로는 역대 최고치인 150원을 올린 이후(1000원→1150원) 3년만이다. 물론 박원순 시장 임기동안 대중교통요금이 올랐다고 해서 박원순 시장 개인만을 비난하는 건 분명 부당하다. 그간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사업 조합 등 각 운영 주체의 지속적 적자로 인해 요금인상이라는 고육지책이 어느 정도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심을 의식해 손도 안대고 있다가 후임자에게 폭탄을 떠넘긴 전임시장들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 임기 4년여 동안 수도권 전철 기본요금은 350원이 인상되었다.”

이번 대중교통요금 인상안은 운송원가 공개나 사전 공청회 및 시민참여 토론회 없이 최종 확정되었다. 사진 속 박원순 시장 뒤의 '시민이 시장'이라는 문구가 무색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6/10/0200000000AKR20150610174100004.HTML?input=1195m)

그렇다고 서울시의 수장인 박원순 시장에게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시민 의견이 전혀 반영이 안 되는 ‘서울시의 허울뿐인 공청회 제도’이고 두 번째는 대중교통업체의 지속적 적자에 대한 그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분석도 안하고 무조건 인상요금의 방식으로 시민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는 점이다. 구조적 원인으로는 대중교통업체의 방만한 경영과 대중교통업체 임금구조에 대한 부당한 노사 관행,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있으나 마나한 공청회

부실한 공청회 제도에 대해 살펴보자. 서울시는 올해 4월, 운영적자에 따른 대중교통의 서비스 질 향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중교통 요금 인상안 입법을 예고했다. 그리고 요금인상에 대한 시민여론을 참고하고 수렴하기 위해 이번 달 10일에 공청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하지만 예정되었던 공청회는 무산되었다. 서울시는 노동당 서울 시당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본부 노조원 등의 요금 인상안 반대 시위로 인해 무산되었다고 변명하지만, "서울시가 요금 인상안 발표시점을 이미 못 박고 진행하는 공청회는 그 자체로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노동당의 항변은 분명, 현행 서울시 공청회 제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책 설정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합의한 최종안을 발표하는 게 '올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도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가 요금인상안을 우선 철회한 뒤, 원점에서 '요금 인상의 타당성'에 대해 치열하게 시민참여토론을 할 생각이 없는 이상, 시민들과 의견을 나누겠다는 취지의 공청회는 말 그대로 ‘시민들과 의견만 나누는’ 반쪽짜리 공청회가 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시 관계자는 공청회 무산 직후 추후 공청회 일정을 다시 잡겠다고 말했지만, 인상된 요금이 적용되는 6월 27일까지 불과 2일밖에 안 남은 현 시점에서 공청회 재개 일정은 감감무소식이다.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는 말로는 참여행정을 지향한다고 외친다. 하지만 정책 설정 단계에서 시민참여를 배제한 채, 자기들끼리 방향을 이미 결정한 정책에 대해 시민의 의견을 듣겠다는 공청회는 그저 '사후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하나의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대중교통운영 적자의 책임은 과연 시민에게만 있는가?

대중교통업체 만성적자의 구조적 원인을 요금인상으로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일까? 서울시 지하철을 주관하는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 및 서울시 버스조합의 경영진은 단지 적자로 인한 회사 경영의 어려움만 강조하고 자신들의 ‘예산운용 투명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수많은 공기업이 부실한 감시를 틈타 방만한 경영으로 적자를 내고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는 마당에, 적자의 원인으로 자신들의 부실한 기업경영 문제를 꼽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염치없는 행동이다. 국회 국토교통위 소속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서울시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적자가 각각 1,723억 원, 2,658억 원에 달했다. 경영평가에서도 서울메트로의 경우 2013년 행정자치부 평가에서 ‘다’ 등급, 서울도시철도는 지난해 꼴찌 등급인 ‘라’ 등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메트로 기관장은 260%, 직원들은 140%의 성과급을 받았고, 서울도시철도는 기관장과 직원 모두 100% 이상의 성과급을 받았다. 회사 적자가 수천억 원에 이르는 와중에 자기들끼리 성과급 잔치를 벌여놓고, 시민들에게 운영적자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겠다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서울시와 그 수장 박원순 시장은 그들의 불투명한 경영에 대해 감시, 견제해야 할 의무는 제대로 이행하고 요금인상안 카드를 꺼내는 것인가?

과연 누구를 위한 요금인상인가?

서울시와 대중교통 운영기관 경영진은 요금 인상 필요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회사 직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임금인상을 실현하고 그로 인한 대중교통 서비스 질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울시 택시 기본요금 인상의 사례를 보건대, 요금인상을 통한 대중교통 서비스 질 개선은 물론이고, 임금인상을 통한 직원들의 처우 개선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지난 2012년 말, 택시를 대중교통에 포함시켜달라는 이른바 ‘택시법’이 국민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국회에서 무산된 후, 서울시 택시 업체의 기본요금인상 요구가 거세어졌다. 그러자 2013년 10월, 박원순 서울 시장은 "시민 서비스 개선과 운수종사자 처우개선이 동시에 이뤄지는 첫 택시요금 인상이 되길 기대한다."며 시민들의 의견 수렴 없이, 2400원이던 택시 기본요금을 3000원으로 갑자기 인상하였다. 일부 택시기사의 승차거부와 불친절한 태도 등 당시 택시업계의 실종된 직업윤리의식 회복이 순서였지만,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는 택시업계의 자정의지만을 믿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기본요금 인상 이후 2년이 지난 지금 시민들이 느끼는 택시 서비스의 질은 크게 향상하였는가? 무엇보다 ‘택시 기사들의 처우’는 개선되었는가? 일부 몰상식한 기사들의 승차거부는 여전하고, 택시 기사들이 느끼는 ‘후생의 개선’역시 미미하다. 택시회사 업주들이 기본요금 인상분만큼, 택시기사들에게 부과하는 ‘사납금’을 올리는 바람에 기사들의 실질임금 상승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본요금은 올랐지만 사납금 납부 후, 기사들이 손에 쥐는 돈은 종전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되었고, 시민들 역시 비싼 가격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회사와 운수 종사자 사이의 부당한 임금 관행 구조개선 없이 행해진 '원칙 없는 기본요금 인상'은 택시 회사 업주들의 배만 불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울시 대중교통 요금 인상 확정에도 전면파업 예고한 서울시 버스노조"

요금인상분이 기사들의 실질임금 상승으로 귀결되지 않는 소위 '배달사고' 관행을 시정하지 않는 이상, 기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요금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http://www.nocutnews.co.kr/news/4433578)

다시 서울시 대중교통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대중교통요금 인상안이 발표되었지만, 서울시 버스노조는 임금 7.29% 인상, 휴게 시간 보장, 정년 연장 등을 요구하며 이번 달 25일부터 전면파업을 예고했다. 대중교통요금 인상이 결정되었는데 왜 이들은 파업을 하기로 결정하였는가? 이는 요금 인상분이 어떻게 기사들의 실질임금 상승과 근로 복지 개선으로 전환되느냐에 대해 노, 사, 정 간 구체적 논의가 없는 이상, '대중교통 요금인상'과 '해당 운수 종사자들의 처우 개선' 간의 상관관계는 미미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또한, 임금협상을 위한 노, 사, 정 간 비효율적인 기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결국 손쉬운 '요금 인상 카드'로 마무리되어 시민들의 부담만 되풀이되는 악순환 구조를 초래한다. 대중교통 업체 일선 기사들의 처우 개선도 해결하지 못하고, 시민들의 가계 부담만 늘리는 대중교통요금 인상안. 과연 누구를 위한 요금인상일까? 그 답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박원순 시장만 모르는 것인가?

현실 직시를 통한 책임행정: 지속가능하지 않은 복지는 포퓰리즘에 불과할 뿐이다.

대중교통 요금인상이 되풀이되는 요인으로 또 무엇이 있을까? 바로 노인인구 증가로 인해 발생하는 지하철 무임승차혜택 대상 증가이다. 서울 지하철의 매년 총 적자 중 약 3000억 원의 손실은 바로 노인무임승차로 인한 것이다. 필자를 싸가지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욕한다고 해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다. 정년연장을 위해 노인 기준에 대한 나이를 상향조정해야 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는 마당에, 노인무임승차혜택을 받는 나이 기준 재조정에 대한 문제 역시 재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의 노인 인구는 지금보다 더 가파르게 늘어날 것이다. 현행 무임승차 연령을 재조정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였을 때, 베이비 붐 세대의 대부분이 65세 이상이 되는 2020년대, 지하철 이용인구의 약 40%가 무임으로 이용할 것이라는 통계도 있다.(현재 전국 7개 도시철도의 하루 무임승차 인원은 전체 수송인원의 16%, 환경일보) 상황이 이런데도 서울도시철도와 서울메트로는 노인무인승차로 인한 적자에 대해 손실보전 책임을 중앙정부에 떠넘길 뿐, 폐지나 혜택축소에 관해서는 거의 입을 닫고 있다. 박원순 시장 역시 노인 표심을 의식해 노인 무인승차로 인한 적자 문제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한 바 없는 걸로 안다. 물론 요금 인상이 적자해소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참여의 투명성 문제와 대중교통 관련 공기업의 부실경영, 요금인상이 기사들의 실질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당한 임금구조, 방만한 무임승차복지 제도에 대한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요금만 올리는 임기응변식 방법으로는 대중교통운영 적자해소의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 현재 박원순 시장과 서울시는 구조적 원인은 외면하고 그 책임을 시민들에게 떠넘기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교통 운영기관의 지속적인 적자에 대한 구조적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참여행정'의 내실화와, 원칙과 신뢰를 바탕으로 공익을 우선시하여 특정이익단체에 휘둘리지 않는 '책임행정'이 동시에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유럽에는 불과 5년여 기간 동안에 독일과 동유럽 일대에서 약 600만 명의 유대인과 집시를 집단 총살하거나 가스를 이용해 대량학살을 주도한 인물이 있었다. 또한, 그는 소련에서만 약 2000만 명이 희생된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연합국의 반격에 의해 점차 패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조국 독일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와 국민들에게 ‘전범 민족’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만을 남겨준 채 1945년 4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돌프 히틀러.’ 그는 오늘날까지 적어도 현대사에서만큼은 희대의 살인마 수준을 넘어서 ‘악의 화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앵글로-아메리칸-나치 깃발”, 영미는 과연 정의로운 선의 세력일까? 19세기의 영국 패권시대와 미국의 서부 개척사를 살펴보면 나찌 독일의 지배와 착취, 학살 등이 상당부분 영국과 미국을 ‘벤치마킹’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과연 영국과 미국이 나찌 독일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이 든다.
(
http://sttpml.org/canada/breathtaking-hubris-and-hypocrisy-the-nature-and-foundations-of-anglo-american-and-nazi-imperiums-part-i-u-s-origins-development-inspirations-and-cover-ups-of-wmds/)

반면, 이러한 악의 화신과 그의 추종 세력인 나찌 독일을 무찌른 미국, 영국을 위시한 연합국은 곧 선과 정의의 승리로 칭송되어왔다. 세계는 우생학에 기초한 인종주의, 전체주의 등 나찌 독일의 패악적 문명의 잔재를 일소하고, 영미(英美)의 언어, 철학, 문학, 미디어, 정치제도, 기술 등 앵글로 색슨 문화권의 모든 것들이 곧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정의로운 것’, ‘세련되고 문명화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종전 후 오늘날까지의 70년은 이들의 문화가 곧 지극히 상식적이다 는 ‘국제 표준’(global standard)의 지위를 차지하는 과정이었다. 국제정치경제의 측면에서도 이들 앵글로 색슨(영국, 미국)의 패권이 공인되고 이들의 주도하에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미국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체제와 IMF, 세계은행으로 대변되는 영미권 주도의 국제 금융체제 구축 역시 전후 질서에서 최후의 승자로 등극한 영국과 미국의 패권을 상징하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앵글로 색슨 문명권(영국, 미국)은 근현대사에서 나찌 독일이나 공산 소련의 위협에 맞서 항상 약자를 보호하고 전 인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희생한 정의의 세력이었는가? 애석하게도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시절부터 오늘날 미국의 패권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기록은 오히려 이들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세계 경영은 그 잔혹성과 비인간적인 측면에서 나찌 독일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도 뻔뻔하게 앵글로 색슨 문명권의 정의로움을 자화자찬하고 그것의 정당성을 전 세계에 주입하려하는 등 상당히 오만하기까지 하다. 근 200여 년간 번갈아가며 정의로운 세계경찰을 자임해온 영국과 미국의 그 위선을 이제 하나하나씩 들추어내고자 한다.

영국의 제국주의: 인도의 벵갈 대기근과 보어 전쟁

영국은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이르러서 5대양 6대주에 걸쳐 제국을 경영한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의 패권국이었다. 그 중 하나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1947년 공식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영국인들의 사상적, 기술적 진보에 필요한 식량을 제공하고, 영국 시민들의 복지비용 확보를 위한 명목으로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를 당하였다. 이미 인도는 18세기부터 영국의 곡물 수탈로 인해 주기적인 기아 상태를 경험하였고 그 때마다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수백만 명의 인도인들이 굶주림으로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비극의 절정은 1943년의 벵갈 대기근이었다. 당시 인도에 쌀을 공급하던 영국령 버마가 영국의 적국인 일본에 의해 점령되자 영국의 처칠 수상 내각은 일본의 인도 침공을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인도 벵갈 지역과 방글라데시의 곡물을 군용으로 징발하는 한편, 민간으로의 유통을 엄금하기 시작했다. 이는 벵갈 지역의 인도인들을 최악의 아사지경에 빠뜨렸다. 당시 벵갈 지방의 대도시 콜카타에서는 굶어죽어 가는 아녀자, 아이, 노인이 속출했고 길거리에는 이들의 시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마운트배튼 당시 인도 총독이 본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처칠은 “인도인들을 증오한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요구를 묵살했고 구호물자를 보내겠다던 호주와 미국의 요청도 거절하였다. 전문가들은(차이가 있지만)이 기간 동안 무려 약 300만~700만 명의 인도인이 아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직접적인 학살 외에도 19세기에만 영국의 혹정, 기근 당시 영국 식민당국의 책임 방기 등으로 인해 약 2000만 명의 인도인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American Holocaust 』, David Stannard)

 

“1943년의 인도 벵갈 대기근”, 영국의 곡물 수탈과 지원 거부로 약300만~700만 명의 인도인이 아사하였다.
(
http://www.boydom.com/2013/06/02/top-10-ways-world-war-ii-affected-india/)
(
http://news.bbcimg.co.uk/media/images/80414000/jpg/_80414821_famine.jpg)

영국의 만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1870년대에 남아프리카 보어인(17세기에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 계 백인 이주민의 후손)의 영토였던 오렌지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탐이 난 영국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1880년 1차 보어 전쟁을 일으켰다. 보어인의 치고 빠지는 식의 게릴라 전술에 패배한 영국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벌어진 2차 보어 전쟁에서는 보어인들의 장기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없게 아예 그들의 주거지를 소개해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그와 더불어 16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보어인 여자와 아이, 노인들을 집단 수용소에 감금했다.

집단 수용소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이질, 콜레라 등 각종 전염병이 돌았고 그 중 2만여 명의 보어인이 사망하였다. 보어 민간인의 집단 감금은 보어 군의 사기를 저하시켜 결과적으로 영국에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 잔인성으로 인해 영국은 엄청난 국제적 비난에 시달려야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제국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수단, 이집트, 중동,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통계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인적, 물적으로 착취했다. 나찌 독일이 단기간에 수백만 명을 학살한 것만 나쁜 짓이고 영국이 긴 시간에 걸쳐 학살뿐만 아니라 혹정과 수탈을 병행하여 간접적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 죽인 것은 과연 덜 욕먹을 일인가?

 

“보어인 집단 수용소에서의 비참한 삶”, 2차 보어 전쟁(1899~1902)에서 영국인들은 아예 보어 민간인들의 주거지와 농장을 불태우고 여성, 어린이, 노인 들을 강제 수용소에 감금하였다. 이 현대적인 형태의 보어인 집단 수용소는 나중에 히틀러의 유대인 수용소 건설에 영감을 주었다.
(
http://www.reformation.org/boer-war.html)

미국의 위선: 인디언 보호구역과 도쿄 전범 재판, 그리고 월남전

미국은 유럽 국가에 비해 해외 식민지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영국과 같은 무력위주의 제국주의적 속성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독립을 통한 구 제국주의 청산을 종용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측면에서 영국보다 한층 자유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도 마찬가지로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으니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에 자행된 인디언 대학살이다. 인디언 대학살 역시 영국이 일으킨 보어 전쟁과 마찬가지로 자원에 대한 욕심(서부의 금광)때문에 일어났는데 미국인들의 전략은 영국인들보다 더 교묘했다. 직접적인 학살 외에도 이른바 인디언들의 위생과 생활 개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디언의 거주 지역을 계획했는데 이는 사실상 ‘인디언들을 척박한 오지로 강제 추방하는 형식’이었다. 뻔뻔스럽게도 인디언 거주지역의 명칭은 ‘집단 수용소’가 아닌 '인디언 보호구역'(Reservation)이라는 위선적인 명칭을 띠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인디언 정책은 인디언에 대한 직접 학살보다는 인디언의 생존 조건을 차단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 미국인들이 인디언의 주요 식량인 아메리카 들소를 의도적으로 대량 사냥하여 거의 멸종시킨 행위는 기아를 통한 인디언 종족의 '절멸'을 그 최종 목표로 삼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 인디언 절멸 정책은 총칼보다는 자연 아사나 종족 도태 등의 방식으로 서서히 진행되어갔으며 서부 개척시대 기간 동안 무려 5000만 명에 달하는 인디언이 죽었다고 추정된다.
(『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최호근)

“일본 731 부대장 이시이 시로”, 그는 인간을 상대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체실험을 했던 전범이자, 일본 관동군 731부대의 총책임자였다. 1945년 종전 후, 그간의 실험 결과를 미국에 제공하기로 한 대가로 도쿄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
http://en.wikipedia.org/wiki/Shir%C5%8D_Ishii)

미국은 화학, 생물, 방사선 무기 등(이하 화생방) 대량살상무기의 확산방지 체제(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를 주도한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나라에 왜 ‘포트 데트릭’(Fort Detrick, 미 육군 생화학전 연구소)  같은 기관이 존재하는가? 이에 대해 미국은 적국의 화생방 공격에 대한 방어 차원에서 만든 연구기관이라고 변명하지만, 사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화생방 무기에 축적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화생방 무기를 실전에 사용한 역사가 있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미국 포트 데트릭은 어떻게 화생방 무기 제조 기술을 축적했는가? 2차 대전 종전 직후 일본의 전범을 처리하던 도쿄 전범재판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일본의 맥아더 미군정은 본국에 일본 731 세균전 부대의 연구를 보고했고 트루먼 미 정부는 비밀리에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731 세균전 부대장을 전범으로 기소하지 않는 대신 연구 결과를 넘겨받는 거래를 성사하였다.

“민간택배회사 페덱스로 국내에 生탄저균 반입한 주한미군”, 100kg으로 무려 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생물 무기인 ‘살아있는 상태의 탄저균’을 한국 정부와 상의 없이 몰래 들여왔다.
(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98727&plink=ORI&cooper=NAVER)

그리고 전술했듯이 미국은 화학 무기를 실제로 전쟁에 투입했는데 월남 전 당시 베트콩들이 은신한 정글을 고사시키기 위해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 고엽제의 종류) 살포가 그것이다. 이는 다이옥신이 포함된 강력한 독성 물질이었으며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하였다. 1962년부터 71년까지의 기간 동안 고엽제로 인해 베트남에서는 15만 명의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들을 포함하여, 300만 명 베트남인들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고(베트남 적십자사 발표) 결과적으로 40만 명의 베트남인들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으며, 50만 명의 어린이가 불구로 태어났다고 밝혔다.(베트남 외교부 발표) 뿐만 아니라 당시 작전을 수행 중이던 미군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맹국 참전군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각종 암과 백혈병,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다.

애석하게도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에서 쓰이게 마련이다.

영국과 미국은 200여 년 동안 나찌 독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직접 학살 외에도 불평등 무역을 통한 경제적 착취, 의도적인 병원균 살포, 거주지의 파괴와 식량 수단 제거 등 교묘한 방법으로 무고한 인명 살상을 주도하였다. 문제는 영국과 미국의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착취, 원주민 대량학살, 절멸 정책이 훗날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찌 독일의 만행에 큰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보어 전쟁 당시 영국의 보어인 수용소를 참조하여 나찌의 유대인 수용소를 구상하였다. 또한, 추방과 보호구역 감금과 같은 인위적인 환경 조작, 기아와 질병으로 절멸에 이르게 한 미국의 인디언 정책을 그의 측근들에게 자주 칭찬하곤 했다.(『Adolf Hitler』, John Toland)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편이었기에 승자의 추악한 과거는 숨겨지고 패자의 만행은 더 잔인하고 악랄하게 남겨진다. 1943년 벵갈 대기근으로 인도인 약 300만 명이 아사한 사건이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처칠 영국 내각의 의도적인 식량 봉쇄 정책으로 인한 인재(人災)였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에 밝혀졌다. (『Churchill's Secret War』, Madhusree Mukerjee, 2010) 미국의 인디언 절멸 정책 역시 단순한 학살이 아니었다. 인디언 학살을 통한 영토 확장이 신이 미국인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 일종의 ‘종교적 광기’였으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미국은 정의의 사도인척 행세하고 뒤로는 천인공노할 일본의 세균전 전범들을 연구 자료 몇 장에 면죄하였다. 현대에 들어 미국은 있지도 않은 생화학 무기를 찾는다고 이라크를 박살내는 등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에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그 자신들은 가공할만한 생화학 무기 기술을 축적하고 있다.

물론 히틀러와 나찌 독일의 전쟁 범죄를 옹호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 역시 정의롭지도 도덕적이지도 선하지도 않다. 그들의 패권체제는 어느 정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등 다소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들이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패권은 약소국에게는 착취를, 신흥국에게는 반감을 불러 또 다른 대립과 전쟁이 촉발되는 원인을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국제 사회에서 말하는 평화란 항상 힘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정의롭지도 못할 뿐 더러 언제나 불안한 상태이다.

문제는 오늘날 영미권의 패권이 국제 정치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 예술, 문화와 생활양식 등 소프트 파워 적인 측면에서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특히 미국의 영향력이 크고 영어가 신분상승의 도구가 된지 오래이며 영미 권에서 유학한 사람들이 정, 재계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의 영미 문화에 대한 지나친 편중은 결국 세계를 균형 있고 올바르게 보는 시각을 저해할 것이다. 물론 영미 선진국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부도덕한 과거사와 오늘날의 잘못된 세계경영을 옹호하고 무조건 그들이 ‘선’이라고 숭앙하는 행위는 실리적인 측면에서 영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차원과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릴까? 영미(英美)의 제국주의 정당화

자신들의 과거 잘못에 영국과 미국은 어떤 반응일까? 우선 그들은 나찌 독일이 일으킨 전쟁과 자신들의 패권 추구를 분명하게 구분하고자 한다. 자신들의 통치 기간 동안 식민지 국가에서는 전근대적 봉건 체제가 혁파되고 해당 국민들에게는 문명에 기반을 둔 계몽과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항변한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착한 제국주의’였다는 것이다. 특히 영국의 인도 식민지배논리가 그러한데 아직도 적지 않은 수의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식민 지배가 인도인들에게 철도, 전기, 의료 등 선진 문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또한, 자신들의 지배가 아니었다면 인도는 아직도 전근대적 봉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오히려 자신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역시 19세기 말에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필리핀인들의 위생 개선’이었다.

한국인이라면 어디서 많이 듣던 논리 아닌가? 그렇다. 이들의 논리는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철도도 놔주고 학교와 병원도 세워줘서 오늘날 한국이 그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외형적인 근대화가 해당 식민지인들에게 어느 정도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줬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본국인들과 평등한 교육의 기회, 참정권의 기회는 그 어떤 식민지에서도 행해지지 않았다. 단순히 식량과 의료 서비스만 제공하면서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한다면 그것은 착취를 위한 가축을 사육하는 것이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양육하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더구나 산업 인프라의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식민지 착취에 필요한 하나의 경영 도구에 불과했을 뿐, 마음에서 우러나온 시혜적 조치는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앵글로 색슨 문화권(특히 영국, 미국)의 근거 없는 도덕적 오만함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패자인 나찌 독일과 달리 그들은 반성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끼는 승자이기 때문이다.



 
 

 대립하고 있는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권력인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빈번하게 개입을 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에 대한 논의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있는 문제 중의 하나이다. 결국 ‘국민투표’같은 ‘다수의 의지’, ‘다수결 민주주의’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다수의 횡포’를 견제하고 ‘법적 절차와 제도의 틀 안에서 소수의 지성이 legal mind를 발휘하는 헌정주의에 무게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균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 재동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사진참조: 위키 백과

 작년, 헌재의 통진당 해산 결정에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나는 통진당의 일부 정치이념을 결코 찬성하지 않으며 통진당의 정당 활동이 국가안보와 민주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헌재 판결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 수긍하는 바이다. 다만, 우리가 직시해야할 문제는 통진당이 과연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위협인 반국가단체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국가 중대사를 결정해야할 때마다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9인의 재판관으로 구성된다. 9인중 1명을 헌법재판소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권한이다. 재판관 3인은 대통령이 직접 지명할 수 있고 3인은 대법원장이, 나머지 3인은 국회(여당지명2, 야당지명1)에서 지명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여당지명 2인도 보통 대통령의 정치성향과 비슷한 인사가 추천되기 때문에 사실상의 헌재소장, 헌재 재판관 선출은 집권정부의 ‘코드 인사’가 될 확률이 높다. 더구나 명시적인 최종 임명권은 9인 모두 대통령에게 그 권한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헌재가 독립된 사법기관이라 할 수 없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되지 않은 9명에 불과한 소수 권력이 사회의 가치를 정립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과연 소수의 종교지도자 집단이 헌법위에 군림하여 국정을 주무르는 “이란의 신정 체제”와 뭐가 다른지 의문이다. 물론 미국에도 우리나라의 헌재와 비슷한 상위재판기관인 ‘연방대법원’(Supreme Court)이 있고 연방대법원 재판관들도 미 대통령이 사실상 임명하지만 그들의 임기는 ‘종신직’이다. 지위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연방대법원의 재판관들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 정치 입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라 정부코드와 상반되는 판결도 내릴 수 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상황에서 국회 설득을 통한 절차적 민주주의보다는 재신임 투표, 탄핵 사태 등 불리한 상황 때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등 ‘국회’가 아닌 ‘거리’에서 정치 현안을 해결하려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서는 아예 헌법재판소에 판단을 위임해버렸다. 이는 사법독재를 심화시키고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사진참조: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qxh&articleno=1574, 연합뉴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헌재 재판관들은 연임은 가능하지만 6년의 정해진 임기가 있기 때문에 연임을 위해서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과 여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정부와 다른 진보적, 양심적 목소리를 내기가 사실상 힘들다. 따라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헌재 재판관은 정부 입맛에 따라 인사교체가 단행되기 쉽다. 그로 인해 어느 정치 성향을 가진 재판관이 얼마만큼 선임되느냐에 따라 이전의 사법 기관들이 내렸던 판결이 자주 뒤집어지는 등 사회 가치판단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한다.

 이렇듯 9인에 불과한 헌재가 어떤 판결을 내리느냐에 따라 국가 정책의 정당성과 사회가치의 향방이 결정된다. 이 때문에 민주화 이후 역대정권과 집권 여당은 대화와 타협이 결여된 독단적인 결정을 ‘헌재의 판결’이라는 거역하기 힘든 사법적 권위를 빌려 형식적인 정당성을 획득함으로써 반대 세력의 불만을 손쉽게 제어하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헌재에 부여된 막강한 권한과 사회적 파급 효과는 헌재의 판결에 사후 반대하는 행위를 정부 입장에서 대한민국 헌정을 부정하는 ‘폭도’나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기 좋은 구실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이런 사법 의존 현상을 심화시킨 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책임이 크다고 본다. 예전에 행정수도이전, 재신임 투표에 이어 탄핵 사태 등 자신과 참여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빈약한 정치적 기반을 헌법재판소의 권한에 기대어 여소야대의 열세적 상황을 정면 돌파하려는 ‘승부사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을 약화시키고 소통문화성숙의 기회를 최소화하는 등 사실상 안 좋은 선례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2008년 미국산 소 수입 반대 시위”, 의회민주주의가 대화와 타협으로 여론을 수렴하는 제 기능을 상실할 때, 민주주의는 ‘거리의 정치’로 변질되고 ‘이성과 상식’은 ‘다수의 집단논리’에 묻히게 된다. 이와 같이 판단주체의 공백 상태에서 ‘민주성이 결여된 헌법재판소’가 여론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지어버리는 거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사진참조: http://www.ddanzi.com/ddanziNews/3702466)

 그 뒤로도 우리 사회는 어떤 현안에 대해 시민과 정부, 의회가 기탄없는 토론과 포괄적인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하기보단 ‘미국산 쇠고기 파동’, ‘집시법’, ‘사형제’, ‘인터넷 실명제’, ‘남성의 병역의무’ 등 굵직한 사회문제현안 해결과 가치판단을 “9인에 불과한 권력”에 사실상 떠넘기고 말았다. 의회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여론수렴의 절차가 불투명해지고 헌법재판소가 모든 국가 중대사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세태에 대해서 예전에 강원택 교수(서울대 정치학과)는 “사법독재”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가 딱 그러하다. 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대립에 대해 소통과 타협을 선호하는 방식을 추구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소통과 대화의 과정은 험난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되어진다. 대화는 안 통한다고 단정 짓고 반대 세력을 설득시키기는 귀찮으니 그저 편하게 “어떤 지엄한 카리스마적 권위”에 현답을 구하려 애쓴다. 그래서 어느 새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해결하려 할 때, 특정 사법기관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당연시 된 게 아닌가? 집권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한 현재 사법부의 상황에서 헌재의 권력화와 그 영향력의 비대화가 동시에 진행된다면 과거 군사독재시절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대외적 전쟁과 내적 착취로 인해 발생한 종주국과 식민지의 종속적 관계, 자본가와 노동자 등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배제의 비극에 대해서 말이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한 것들로 점철된 것을 보며 인간은 선한 존재라는데 그러한 인간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왜 이기적인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집단에 속한 인간의 도덕적 차이는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일제 강점기 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헌병대에 근무하는 어떤 일본 장교는 심성도 착하고 친구들에게 더없이 믿음이 가는 벗이며 부모에게 효도도 하고 자식들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요, 아내에게는 더없이 든든한 남편이다. 하지만 그는(그가 속한 일본이라는 국가, 헌병대라는 조직의 입장에서) 조선인 불순분자 사범을 대할 때만큼은 태도가 돌변한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거리낌 없이 고문을 자행하며 그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그 일본 장교는 과연 선한가? 악한가? 다른 예를 들어보자. 1920,30년대 독일은 실업률도 높고 국민은 빈곤에 빠져 있었다. 변변한 자원도 없고 식민지도 없었던 독일인들이 ‘살기 위해’ 내린 ‘합리적인 선택’은 아이러니하게 ‘전쟁’이었다. 합리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기껏 선택한 결정이 전쟁, 즉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1899년 발발한 영국과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계 이주민인 보어인과의 전쟁 당시 영국군은 보어인들의 조직적인 게릴라전에 맞서 보어인들의 거주지를 불태우고 보어인 여성과 노약자를 강제 수용소에 가두고 가혹하게 다루었다. 무고한 보어인 부녀자를 발로 차는 걸로 묘사된 영국군의 모습과 달리, ‘집단의 범주가 아닌 개인 단위로서의 영국군’은 아마 선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출처: https://teachwar.files.wordpress.com/2013/05/boerwar_camp.jpg)

 

 

인간은 결코 완전히 이성적일 수 없다. 집단에 속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개개인은 선하고 도덕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비도덕적일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주저 없이 “그렇다.”라고 우리에게 답한다. 그리고 그 주요원인은 ‘이성의 한계’와 애국심과 같은 ‘집단의 생존 욕구’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의 한계’는 개인의 이성과 양심을 현실적으로 압도하는 ‘사회조직의 가치와 집단 이기주의’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사회조직이 국가일 때 이성에 입각한 개인의 이성과 양심 표현은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현실에서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성과 양심은 생각보다 집단적 이기주의와 환상 앞에 쉽게 굴복한다. 계급투쟁과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의 희생양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브리앙(Aristid Briand, 1862~1932, 프랑스의 정치가)도 정권을 잡자 ‘사회의 생존권’을 앞세워 노동 계급의 자유를 유보하고 그들에게 충성심을 강요하였다. 애국심은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한편, 국민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이타주의적 미덕으로 포장된다. 그리고 개개인의 포장된 이타주의는 어느새 ‘국가의 생존’이라는 미명하에 국가 이기주의의 형태로 변질된다. 앞서 예시를 든 일본 장교의 경우, 타인의 신체에 대한 고문과 억압은 개인적인 행위로는 분명 비인간적이지만 국가에 충성하고 안보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조직적 정당성의 외피를 입는 순간,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본받아야 할 애국심으로 돌변한다. 이렇듯 국가이기주의는 여러 비도덕적 행위를 국가의 이름으로 면죄한다.

 

 

"레벤스라움(Lebensraum)",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생활권 확대’(Lebensraum)를 주장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히틀러와 독일인들은 전쟁을 통한 침략 행위마저 정당화했다.
(출처:http://constitutionalistnc.tripod.com/hitler-leftist/id9.html)
 
그렇다면 애국심은 왜 필연적으로 국가 이기주의로 변하는가? 첫째로 국가는 여러 개인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의무를 이행한다는 측면에서 개인보다 도덕적 의무감에서 자유롭고 두 번째는 국가 간 관계는 사실상 무정부주의적이기 때문에 국가의 폭주를 제재할 실질적 제도와 장치가 미비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집단의 생존 욕구에 기인한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존욕구가 국가적 차원으로 응집되면 그 생존 욕구는 더욱 절실해지고 이에 따라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집단에게 있어 ‘자기보존욕구’는 곧잘 이기적 충동으로 변하기 쉽다.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집단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전술했듯이 사회와 달리 국가 간 분쟁을 조정해주는 상위 기관이 부재하기 때문에 국가는 타국에 대한 침략적 행위도 생존권 확보를 명분으로 정당화한다. 아울러 양보와 소극적 태도가 상대 국가에게 곧 나약함과 군사력 부재라는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 국가 간의 생존경쟁은 치열하다. 가진 자의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시혜적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생존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이러한 생존의지(will-to-live)가 쉽게 권력의지(will-to-power)로 전환된다는데 있다. 도광양회(韜光養晦, 힘을 낮출 때 까지 몸을 낮추는 전략)와 같은 방어적 민족주의를 표방한 과거 중국의 외교정책이 오늘날 아시아에서 주변국과 영토분쟁까지 각오하며 패권을 겨루는 ‘적극적 민족주의’로 쉽게 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그들은 ‘중국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항변한다. 상대국의 존재 자체가 자국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내 것만 잘 지키면 생존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기준점은 통용되지 않는다. 될 수 있는 한 남의 것을 먼저, 그리고 최대한 뺏어야 그것이 곧 자국의 생존권을 지킨다는 자기보존 논리가 팽배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그러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힘의 대결장’이었고 내가 살기 위해 먼저 남을 침략하는 ‘예방적 성격의 전쟁’(preventive war)이 빈번하였으며 오늘날 서구 선진 산업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복지는 주변부를 착취하여 얻어낸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이기심에 ‘적정함’이란 없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필요 이상의 욕구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존과 권력의지가 교묘하게 섞인 애국심 앞에서 지성인의 이성과 양심은 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성인과 조건 없는 자애심을 강조해온 종교적 지도자들은 집단 이기주의가 국가에 만연했을 때, 오히려 체념 내지 편승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20년대 바티칸과 교황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방관하였고 1930년대 독일의 사회주의자 지식인들은 나찌의 팽창을 전혀 견제할 수 없었다. 그들도 이성에 입각한 정의로움보다는 우선 ‘국가의 생존’을 ‘사회와 개인의 보존’으로 동일시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자기보존욕구에 부분적으로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체로 애국심은 이성과 논리의 메커니즘의 통제를 쉽게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맹목적으로 추동된다. 헌신적인 충성의 맹목적인 성격이야말로 국가 권력의 기초이며 도덕적 제한을 전혀 받지 않고 무한대로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의 토대이다.

 

국제질서와 교육으로 집단이기주의를 막을 수는 없을까?

 

국가 간에 항구적인 평화 마찬가지로 불가능에 가깝다. 혹자들은 과거 베르사이유 체제나 냉전시대의 데탕트, 오늘날 각종 군축 협상과 UN과 같은 국제기구의 활성화로 국가 이기주의를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한 평화는 신사적인 압제(?)를 통해 불만이 가까스로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표현이 현실에 더 가깝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 국제 사회에도 불평등과 이에 따른 군소 국가들의 불만이 존재한다. 2차 대전 승전 5개국(미,영,프,중,러)이 상임이사국이라는 감투를 쓰고 과거의 패배자들과 신생 약소국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 그들의 불만을 은폐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평화란 어느 경우에든 힘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항상 불안정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러한 직접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있는 바로 그 힘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결국 ‘체제에 대한 반란’으로 발전할 수 있는 증오심을 유발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 사회는 영구적인 긴장 상태, 혹은 잠재적인 전쟁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으로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없다면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 보다 근본적인 정책으로 ‘교육’을 구제 수단으로 내세우는 도덕주의자들이 있다. 이러한 교육가들과 도덕주의자들은 개인에게 적절한 도덕 교육과 사회 교육을 보장하고, 적절한 이성과 지성의 개발을 통해 집단 이기주의를 막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방안이다. 물론 이러한 교육이 사회 정의와 집단 이기주의를 뛰어넘는 인간 자체로서의 선의지를 촉진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교육마저도 국가, 혹은 국가를 움직이는 특권 계층에 의해 자신들 본위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론의 배양이 곧 행동의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의 시위대와 전경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한 요구마저 타협과 조정의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결국 ‘억압에 상응하는 실력행사’도 병행하여 구사해야 쟁취할 수 있을까 말까다.
(출처: http://blog.daum.net/bando21/10934446)
 
조정을 통한 해결 방식 역시 완벽한 해결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조정이란 무엇인가? 만약 이것이 논리간의 대결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나의 것을 내어주고 남으로부터 내 것을 얻어온다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조정이 아니라 ‘정치적 흥정'(bargaining)에 가깝다. 또한 어제의 양보가 다음 날 상대방의 더 큰 요구로 귀결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결국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필연적이다. 대개 교육 혹은 조정과 대화의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이상주의에 기반을 둔 중산층 마인드의 편견에 익숙하다. 그들은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차이점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으며, 집단 이기주의와 그것을 위시한 특권 계급의 이기심에 대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대개 한 사회의 집단적 힘이 다른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고 착취할 때 그것에 대항할 현실적 세력이 형성되지 않는 한 그 억압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 여성의 참정권 획득, 민족의 독립, 민주화 운동 등 사회적으로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사건들은 이성에 입각한 대화와 토론보다는 소극적 저항, 적극적 투쟁이 적절히 혼합되어 만들어진 ’행동하는 양심의 결과물‘이었다. 특권계급과 집단적 이기주의에 ‘그들의 선의에 기댄 양보와 도덕적 강요’만으로 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피지배층이 바라는 최소한의 요구마저도 그들의 시각에서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발칙한 요구’였던 게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한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말인가? 허풍떨기를 그만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집단 이기주의의 무자비함을 설명하였고 또 그 해결책으로 집단 이성이나 종교적 자애심은 부족하다고 설명하였다. 꽤나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전망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그에 대한 니버와 필자의 답은 이렇다. “허풍떨기를 그만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집단 이기주의의 병폐를 막기에 앞서 도덕적 인간들로 이루어진 집단은 앞서 설명한 이유들로 충분히 이기주의적일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개인의 양심과 지성에 앞서 우선 자신이 속한 계급적, 계층적, 민족적 시각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인정해야한다. 그렇다고 이성과 양심을 활용하지 말자는 건 결코 아니다. 이성과 도덕적 의무감을 키워주는 교육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제국주의적인 부당한 폭력이고 어떤 것이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되는 폭력인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대화와 조정의 방식 역시 어떠한 사회적, 계급적 제약 없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대안들을 모두 펼쳐 보일 수 있는 타협의 장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다만, 왜 집단 이기주의가 현실에서 집단 이성을 마비시키고, 도덕적 죄책감 없이 너무나 쉽게 폭력의 형태로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표출되는지 설명, 해결하기에는 이성과 도덕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너무 무기력해 보인다. 이기적 충동은 개인의 차원보다 집단의 차원으로 갈수록 그 속성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다.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인정하는 한편, 집단 이기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을 만큼 제어할 수 있는 고도의 사회적 통제력이 필요하다. 결국 그러한 사회적 통제력은 민족적 애국심, 계급적 투쟁 등 종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공유를 통해 객관적 통찰력과 정당성을 확보해야하는데 아직 그러한 고차원적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를 맞아 단일민족이라 자부하던 한국에서도 외국인 유학생들과, 귀화 이주민, 한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 가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다소 폐쇄적이고 그들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던 한국 정서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분위기로 변한다는 점은 분명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원칙 없는 다문화주의로 인해,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들에게는 사회 적응 문제가 가중되고, 자국민에게는 사회불안과 상대적인 역차별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나는 세 가지의 이유를 들어 과도한 다문화주의에 대해 우려하는 바이다.

 

첫째, 현재 한국에서 문화적 상대주의를 과잉 포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나머지, 특정 문화권에서의 비인간적인 인습이 우리 사회로 그대로 퍼질 가능성이 있다. 흔히 아랍권에서 여성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강제로 행해지는 여성 할례나 명예살인, 차도르 착용의 풍습은 서구의 아랍 이주사회에서도 현지인들의 무관심 속에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아랍의 풍습을 상대주의, 다문화주의의 관점으로 이해하기에는 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 인권, 평등, 생명존중에 지극히 위배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명예살인 사건”
1989년 미국 미주리 주에 살던 팔레스타인 이민자 가정 출신 소녀 티나 이사, Tina Isa(당시 16세)는 아버지가 주선한 중매결혼을 거부하고 그의 허락 없이 비무슬림 남성과 만나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 의해 살해되었다. 그녀를 죽인 아버지 Zein Isa는 91년 12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97년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사진참조, http://www.nydailynews.com/news/justice-story/justice-story-honor-killing-article-1.1510125)

 

 

문화적 다양성은 당연히 인정해야 하지만 특정 문화가 자유, 인권, 평등의 가치에 어긋난다면 분명 이는 범인류적으로 배척해야할 인습일 뿐, 그것을 전통이라 간주할 수는 없다. 이처럼 타인이 강제로 상대방의 의사와 반대되는 신체구속과 훼손을 행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헌법 가치에도 크게 위배되는 바, 향후 원칙 없는 다문화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의 안녕과 자유를 위협하는 비인륜적 외국풍습이 난무하게 될까 심히 우려스럽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 라는 격언은 세계화 시대에 국수주의적 자국중심문화를 부추긴다는 평도 있지만, 개별 국민국가의 주권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재의 기준에서 볼 때 이는 ‘주인’으로서 최소한으로 주장할 수 있는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해당 국가의 헌법, 사회가 지향하는 범인류적 보편가치를 손님인 이방인이 존중하는 틀 안에서 자신들의 특수문화를 영위하는 이른바 ‘원칙 있는 다문화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두 번째로 외국인 범죄 예방 및 대응 시스템의 미흡으로 인한 치안 불안문제이다. 외국인 범죄율이 해마다 늘고 있지만 외국인 범죄전담에 필요한 수사 인력과 조직운영에 관한 시스템 구축은 아직 미흡하며, 외국인들에 대한 양형기준 또한 외국과의 외교관계를 과도하게 고려한 나머지 너무 약하다는 평가이다. 2006년 서래마을에서 발생한 프랑스 부부의 영아살해유기 사건과 재작년에 있었던 미국 출신 방송인 비앙카의 마약복용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만 검경 수사당국의 미적지근한 영장발부신청과 출국금지조치 처리 미숙 등으로 인해 당사자들은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고, 사법당국은 양형선고는커녕 제대로 된 수사조차 하기 힘들었다.

 

 

“우리는 아이를 죽인 적이 없으니, 한국으로 돌아가 수사를 받지 않겠다.”
2006년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자신이 낳은 영아 2명을 살해, 유기한 쿠르조 부부는 사건 후 출국하여 프랑스에서 한국의 경찰과 사법체계를 믿지 못하겠다는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다가 프랑스 현지 검찰에 의해 기소, 범죄가 인정되어 부인 베로니크 쿠르조씨는 징역8년을 선고받았다.
(사진참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357425)

 

“미국으로 도망가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비앙카”
2013년 대마초 복용 및 매매, 알선 혐의로 한국 검찰에 기소된 방송인 비앙카 모블리(미국)는 한국 검찰이 출국금지 기간 연장 신청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른 틈을 타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방송인인 비앙카를 신뢰, 인권보호 차원에서 출국정지 연장을 하지 않은 것"이라며 "실수라는 언론보도는 적절치 않다"고 변명했다. 뒤늦게 한국 법원은 비앙카에게 강제소환을 명령했지만 미국 시민권자인 그녀는 한국 법원의 명령을 이행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64403)

 


외에도 중국, 동남아 등지의 조직폭력배들이 한국에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경찰당국은 실태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주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그치고 있지만, 다문화주의를 앞서 경험한 선진국의 예(특히, 최근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동유럽 이민자 범죄 집단들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한 강간, 납치, 살인 등)로 살펴볼 때, 향후 이들이 한국인들로 범죄의 대상을 확대할 가능성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그야말로 내 나라, 내 조국에서 외국인 범죄조직 때문에 맘 편히 발 뻗고 살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말로 욕을 하며 돌멩이, 물병, 음식물, 보도블록 조각, 스패너까지 마구 던졌다.”
2008년 4월 송파 올림픽 공원에서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 당시, 1000여명에 달하는 한국 거주 중국 유학생 집단이 티베트 독립과 중국 인권 개선을 주장하던 시민단체와 충돌 중, 무고한 일반 시민들까지 싸잡아서 폭행하고 제지하려는 한국 경찰에게까지 폭력을 휘둘렀다. 놀랍게도 이들 중 형사처벌을 받은 유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사진참조: http://www.sfgate.com/news/article/China-continues-attacks-on-Dalai-Lama-3217752.php)

 

 

세 번째로 다문화주의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오히려 다문화주의를 위해 자국민이 감수해야 하는 역차별이 심화되고 있는 문제를 들 수 있다. 한국 특유의 배려 문화에서 비롯된 과도한 영어 사용 권장 문화로 인해 영어 교육 사각지대에 놓인 일부 자국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언론을 접하거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때 어려움을 겪곤 한다. 또한 한국인과의 결혼 이민과 귀화에 필요한 한국어 능력과 한국사 능력 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예정되어있어 이들이 향후 한국에서 거주할 때 필요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대한 능력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예상된다. 그리고 정부지원금의 혜택을 받기 위한 일부 대학들의 원칙 없는 마구잡이식 중국 유학생 모집은 자국 학생들에 대한 학내 편의제공 역차별(유학생 기숙사 우선배정, 상이한 장학금 선정기준 등등)이 심화되고, 왜 한국 대학은 중국어로 된 수업이 없느냐는 주객전도(主客顚倒) 격 중국 유학생들의 볼멘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화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지만, 역설적이게도 제 국민국가들 간의 문화전쟁은 날로 확산되고 있다. 안 그래도 자국 문화에 대한 자존감이 적은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 있는데, 체류 외국인들의 단순편의를 위해 이민, 귀화에 필요한 한국어, 한국사 요건을 완화시켜야 한다거나 우리가 자발적으로 영어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는 속편한 소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한국 사회는 앞으로 정체성 혼란과 더불어 문화적으로 외국에 의해 완전히 사장되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게 될 것이다.

 

나치 독일 시절 우생학을 토대로 한 인종차별제도의 법제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 호주처럼 이민을 가려 받고 조직적, 제도적으로 외국인들을 차별하자는 얘기 또한 아니다. 단지 눈앞에 놓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무턱대고 시행되고 있는 원칙 없고 문화철학 없는 중구난방식의 다문화정책을 염려하는 것이다. 또한 여타 선진국 다문화 사회가 앞서 겪은 사회갈등과 치안불안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자국 내 외국인 범죄와 타 문화권 간 충돌에 대한 우리만의 구체적 치안, 사법 시스템이 조속히 확립되어야 한다. 만약 이를 소홀히 한다면 상대적 상실감을 느낀 자국민들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반감은 더해지고, 엄연히 우리 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들 내지 귀화인들 역시 뿌리 깊은 차별에 대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거친 응답을 할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주민들을 장기간에 걸쳐 자국의 문화에 편입시키는 흡수주의 정책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이민, 귀화 심사 시 요구되는 한국어, 한국사 능력요건을 강화시켜 이들이 한국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게 제도적 지원을 해야 하며, 향후 이들의 한국 문화 습득에 필요한 교육 지원 정책을 주기적으로 시행해야 할 것이다. 또한 외국인 범죄를 예방하고 사회불안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재 체류 중인 외국인 범죄조직과 국제 테러조직에 대한 수사당국의 정확한 실태 파악이 요구된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심각하게 저해하거나 우려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사전입국금지, 강제추방 같은 강력한 법적 제재수단 역시 실질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자국민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내, 외국인 간에 공평한 법치적용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외국의 눈치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이고 원칙 있는 사법집행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국가적 의지와 법의 양형제도 보완이 절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기본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범인류적 가치인 자유, 인권, 평등, 생명존중에 반하는 외국 풍습에 대해서 역시 공동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단호하게 근절시켜야만 현재 일그러진 다문화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그저 세상이 이래야 한다고 혼자만의 틀에 갇혀 공상만 하다가 내가 그리는 세상을 칼럼으로서 표현할 소중한 기회를 또 얻게 되었다. 전에 활동하던 연구소에서 는 10여 편의 칼럼을 썼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가진 자들의 기득권에 자발적으로 추종하는 일부 20대의 '기득권 코스프레'를 우려하였고, 싸가지와 버르장머리를 들먹이면서 자신의 논리적 결함, 천박한 지적수준을 만회하려는 사람들이 줄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싸가지 없는 민주주의’를 주장하였다. 또한, 복지수혜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아직 농경시대에 머물고 있는 가족의 개념을 재정립할 것을 외쳤으며 취업이나 공무원 채용에서 역차별 받는 서울 젊은이들을 위해 수도권 역차별을 역설하였고, 이 시대 마지막 남은 '공정한 사다리'인 행정고시를 지키기 위해 펜을 들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비핵화를 주장한다지만 실상은 핵 헤게모니를 틀어쥐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패권체제를 유지하려는 핵 강대국들의 기만행위를 비난하기도 했다. 정치적 논리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명하에 국제 스포츠계의 부당한 권력관계와 지구촌의 인권침해와 인종차별에 침묵하는 올림픽의 위선을 꼬집었다. 이외에도 여성, 대학, 법, 언어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최대한 객관적인 프레임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다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려는가?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심각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어차피 재미있으면 장땡이니 진지빨지마라?”

 

'국제시장'이나 '엑소더스'같이 민족 간의 과거사 문제, 한 국가 안에서 세대와 이념 갈등을 촉발시킬 수 도 있는 소재가 영화에 표현되어 각 집단 간의 대립이 심화되어가는 요즘이다. 갈등과 대립에 신물이 난 누군가는 '영화는 영화로만 보자고 한다. 하지만 그 말에는 왜 사람들이 ‘한낱 영화’를 가지고 다양한 집단이 치열한 대립을 하는지, 대립의 원인을 제공한 영화 속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무관심이 깔려있다. 객관적 조망자를 빙자한 무관심, 냉소주의는 이성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좀 더 깊이 보고자하는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킨다. 만들어진 과잉합의는 더 깊은 갈등만을 예고할 뿐이다. 스포츠도 스포츠로만 즐기자는 의견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 리그 ‘EPL’(England Premier League)은 외국의 자본과 용병의 과도한 유입으로 인해 자국 유망주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또한, 지역 사회의 뿌리 깊은 연고의식과 순수한 팬心으로 유지되던 구단들은 팀의 전통과 정체성이 외국인 갑부 구단주의 입맛대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해당 지역 골수팬들은 시장논리에 어느덧 이전보다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만 고장 팀의 경기관람을 소비할 수 있다. 이렇듯 그럴싸해 보이는 외적인 성장의 이면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그 이면을 들추어 내는데는 적지 않은 비아냥거림을 감수해야한다. 스포츠를 이렇게 정치경제학적인 시각으로 분석한 기사에는 으레 “어쨌든 EPL이 제일 재미있으니 장땡이다.” 따위의 댓글이 수두룩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이면을 들추는 데는 귀찮으니 진지하게 생각하지를 않는다. 지적한 문제에 대해 갈등과 반론을 부담스러워하는 풍토속에 정상적인 비판과 대화의 순기능은 상실된다. 그 자리를 흥미로 대변되는 엔터테인먼트 적 요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하냐?”식의 문화상대주의를 빙자한 방관, “그런다고 어쩔 건데?”류의 냉소주의가 메운다. 그저 "그냥 나에게 이득이면 그만인 거고, 내가 볼 때 재미있으면 장땡"이라는 것이다. 재미와 흥미라는 쾌락적 요소에 결국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과 우리가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회문제는 등한시된다. 사실에 기반을 둔 정교한 논리와 날카로운 비판으로 옳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을 치밀하게 가려야 할 문제들이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대세 앞에 그러한 행위는 “정치적이다, 혹은 아는 체한다.”라는 욕을 먹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소위 "진지빠는 사람은 성가신 존재, 가까이하기 싫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심지어 X선비'라는 저급한 표현도 감수해야한다. 하지만 문제의 어두운 이면을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장차 우리가 당면할 잠재적 사회 문제들이 당장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이것은 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도망가거나 맞서기는커녕, 그러한 현실을 회피하고 싶어서 머리만 땅 속에 처박고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부정하려는 타조의 습성과 같다. 눈을 감고 위기를 애써 부정한다고 해서 눈앞의 사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진지빨고" 세상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지 빨길 거부하는 집단, “우리는 너무나 안녕하다.”

 

이성이 통하는 보통 시민사회에서 논리나 팩트를 충족하는 주장으로 상대방을 설득한다면 언젠가는 내 주장의 반대자들도 수긍할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성과 논리의 잣대로 누군가를 그럴듯하게 설득하기는 몹시 어렵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때문에 정부의 복지 지출이 축소되고 최저임금이 동결되거나 누군가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우리 모두가 매스 미디어의 횡포에 맞서 궐기해야한다고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기는커녕 그런 자들을 염세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자신은 지금도 인생을 충분히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칭 “너무나 안녕한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녕한 사람들’이 정말 풍족한 삶을 살고 있거나 이미 달관하여 분수에 맞게 안분지족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시대의 변화가 가져오는 위기에 둔감하거나 거시적인 담론 혹은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어떤 무한경쟁시대가 도래해도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자기는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호언장담하는 ‘지나친 자조주의자’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후자 유형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당위적 슬로건에 진저리를 친다. 작년 대학가를 중심으로 “여러분은 안녕하십니까?” 대자보 열풍에 맞서 “우리는 안녕하다.”로 응수하던 무리들이 전부 다 골수 보수주의자는 아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정교한 논리와 만만치 않은 식견으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주장을 일목요연하고 진지하게 반박한다면야 의견은 다를지언정 그 사람은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반론은커녕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왜 분출되었을까 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들이 진지빨고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그저 단순히 치기어린 한 때의 철부지 행동으로 단정지어버린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나의 이러한 주장이 누군가에게는 소위 잘난 체 하는 ‘깨시민 코스프레’를 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지한 주장에 대해 저급한 비아냥거림으로 반응하는 것은 ‘하나의 주장이 누군가의 타당성 있는 반론으로인해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되고 결국 사회는 진보하게 된다.’는 정반합 적 사회의 발전경로를 무시하는 반이성적 행위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인류 정신문명에 대한 모독이다. 물론 거만한 태도로 지나치게 아는 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 생각을 안 하고 사는 것’ 역시 그다지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진지빨며 끊임없이 따져라, 요구하라, 개겨라.”

 

스물아홉, 주변으로부터 번듯한 직장과 현실적인 인생관을 갖추길 기대하는 나이이다. 누군가는 이제 뻘소리 그만하고 철좀 들라고도 한다. 철 들라는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부당함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철 든다는 것이라면 정중히 거절하겠다) 사회의 때 묻은 관행들에 익숙해져버려서 젊었을 적 순수한 열정이 넘쳤던 자신의 과거를 잊은 채 변절해버린 일부 386 선배들처럼 나도 어쩌다 출세의 동아줄을 잡을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하여 먼 훗날 잘 나가는 어른이 되어 시대의 요구에 둔감해버린 흔하디흔한 아저씨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실이라는 명분으로 잘 포장해놓은 불의보다는 내 양심에 귀 기울이고 싶다. 현실이라는 날 선 사시미 앞에서 갓 내놓은 활어처럼 파닥파닥 거리며 보란 듯이 개기고 싶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