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를 둘러싼 美中의 속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 주석이 4월 6~7일 미국 플로리다 마라라고에서 첫번째 정상회담을 했다




정상회담 직후 급속히 가까워지는 美中관계…


中북핵압박공조-美사드배치유보 '빅딜' 가능성


美中은 북핵문제해결보다 국익 챙기기가 우선




4월 6일부터 7일까지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미중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악동’으로 불리는 트럼프와, 중국 최고 권력자인 시진핑의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다. 태영호 공사 탈북, 김정남 암살, 연이은 미사일 발사 등으로 악화되기만 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미중 양국이 어떤 논의를 나누고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회담에서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 당장 가시적인 성과는 없어보인다. 사실 없을 수밖에 없다. 첫 대면인 만큼, 회담은 서로의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것이다. 그런데 깜짝 쇼는 전혀 다른 곳에서 등장했다. 정상회담을 하는 도중에 미군이 시리아를 공습한 것이다.



지난 6일, 미군의 공습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 소속의 샤이라트 공군기지



트럼프는 시진핑과 함께 디저트를 먹는 순간에 시리아 정부군의 공군기지를 공격했다. 이는 시리아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피력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실은 중국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다. 그렇잖아도 북한을 사이에 두고 껄끄러운 미중 사이에, 실질적인 미사일 폭격을, 그것도 시진핑이 눈앞에 있는 그 순간에 자행한 것이다. 줄곧 “북한은 인류의 문제다”, “중국이 안 하면 우리가 하겠다”고 호언하며 ‘중국역할론’을 주장하던 트럼프에게, 당장 중국에 보낼 수 있는 메시지로서 이보다 강력한 방법은 없다.


실제로 정상회담 후 중국은 중국인의 북한여행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미국의 거센 압박에 못이겨, 마침내 대북압박에 보다 전향적으로 나설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그런데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인 12일, 시진핑과 전화통화를 한 트럼프는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낸다. “중국이 북한에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달랐다”며 중국의 입장을 옹호한 것이다. 지금껏 중국을 거세게 몰아붙이던 ‘악동’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의외였다. 중국이 ‘고작’ 북한여행을 규제했다고 해서 그 답례로 건네는 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무겁다.





이상징후는 다른 곳에서도 포착됐다. 16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함께 한국을 찾은 백악관 외교보좌관이 사드 문제에 대해 “차기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이 맞다”고 말한 것이다. 외교정세에 대해 사실상 무지했던 트럼프 정부에서 큰 손을 휘두르는 외교정책 담당자가, 사드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야권 성향의 후보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사드 철회 가능성을 시사했다. 사드 문제로 몇 년간 골머리를 썩인 우리나라는 난리가 났다.


한미 당국은 즉각 사드 배치는 기존 계획대로 진행된다며 논란을 진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중정상회담이 끝난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은 몹시 의미심장하다. 중국이 대북제재를 강화하며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고, 미국이 이에 호응해 사드 배치를 유보하거나 철회하는 ‘빅딜’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이유다.




정상회담 후 경제협력 강화하는 美中……


북핵문제, 뒷전으로 밀려날 가능성


한국, 닭 쫓는 개 신세 될 수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일관되게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빅딜’이 성사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중국이나 미국이나, 북한문제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 여력을 쏟기보다, 자국 경제에 노력을 쏟는 편이 현명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면서도 국내에서 강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자국의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일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세계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의 원활한 공조는 필수적이다. 중국 또한 2016년 이후 하락세로 접어든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대일로 정책, 서부대개발, 동북3성 개발 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의 경제 공조는 필수적이다. 이번 정상회담의 최대 의제는 미국이 제기한 미중 무역불균형 문제였다.


실질적인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정상회담 전에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북한에 대해)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며 중국을 압박하던 트럼프는, 회담이 끝나자마자 “중국과 정말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미중 간) 잠재적인 모든 어려운 문제들이 사라질 것”이라며 시진핑에 대한 친밀감을 드러냈다. 시진핑 또한 “미중이 협력해야 할 이유는 1000개”라며 화답했다. 바로 며칠 뒤 트럼프는 대선공약이었던 ‘중국 환율조작국 지정’을 철회했다. 자국의 실익이 가장 중요한 양국 정상에게, 북한문제가 이보다 중요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북핵문제는 20년 넘게 1%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경제회생과 북핵해결 중 무엇이 ‘해결 가능성 있는 시급한 문제’일까?



북핵 갈등이나 사드 갈등은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 간 '대리세력경쟁'으로서의 성격이 크다



미중은 이렇게 열심히 짝짜꿍을 맞추고 있다. 이제 눈을 다시 우리에게 돌려보자.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데,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 남아있나? 미국이 사드를 배치해준다는 말 하나만 믿고, 백악관 외교보좌관의 말 한 마디에 당황하며 좌지우지되고 있다. 수도권 방어도 못하고, 장거리 미사일 이외의 수 천 발의 단·중거리 미사일은 막지도 못하고, 그마저도 어설픈 실험만 몇 차례 거친 사드의 효능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할 필요도 없다.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100초 만에 살펴보는 사드 성능 보고서")


북한의 주력미사일인 노동/무수단 등은 사드포대를 넘어 부산/제주도 등을 타격할 수 있다. ⓒ오마이뉴스



만약 미국이 미중관계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사드 배치를 유보해버린다고 해도, 한국이 미국에 대고 ‘미중관계보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은 아직 그 성능이 불확실해 미국에게 실제적인 위협은 되지 않고, 만약 미국까지 닿는다고 해도 미국에 배치된 사드로 본토 방어에는 별 무리가 없으며, 더구나 ‘아메리카 퍼스트’의 트럼프가 한국의 국익을 미국의 국익만큼 챙겨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희망적 사고다. 한국은 미국의 말에 따라 “알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제 손으로 외교적 카드를 전부 내팽개쳐버린 비참한 말로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은 민감하고 번거로운 북핵문제해결에 별 관심이 없다. 적당히 상황유지만 하면서, 당장 눈앞에 있는 국익만 챙기면 그만이다. 더 이상은 닭 쫓는 개처럼 분별없이 외교정책을 세워선 안된다. 한반도는 언제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었으며, 강대국 세력갈등의 데모버전이자 대리전쟁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느 한 편으로 기울면 필연적으로 다른 한 편이 반발해 전쟁의 폐허가 된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야 한다.



MBC 뉴스와 함께라서 모든 날이 좋았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오후 9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헐레벌떡 집으로 뛰어가곤 했다. MBC 뉴스데스크를 보기 위해서였다. 9시에 하는 뉴스를 처음부터 보고 싶은데 학교가 9시에 끝나니 매번 뉴스 시작 후 20분 정도는 보지 못했다. 그래도 나머지라도 보겠다고 집에 뛰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나 MBC 뉴스만 챙겨봤는지 기자 목소리만 듣고도 어떤 기자인지 알 정도였다. 

 

MBC뉴스의 매력은 앵커가 뉴스 마지막에 하는 클로징 멘트에 있다. 클로징 멘트가 얼마나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는지 엄기영 앵커가 말했던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멘트를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 클로징 멘트의 절정은 신경민 앵커의 촌철살인 앵커 멘트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때의 MBC는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로 시청자들의 가슴이 시원해질 뿐만 아니라 신영철 대법관 촛불 이메일 파문, 재판 개입 사건 등을 집요하게 파던 송곳 같은 뉴스였다.

 

 

 

△ 신경민 앵커는 클로징 멘트로 인해 '촌철살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클로징 멘트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본인촬영) 


 
그런 MBC 뉴스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신경민 앵커가 갑자기 뉴스데스크에서 내려간 순간부터다. 그때부터 앵커들은 클로징 멘트를 하지 않았다. 하루는 뉴스 첫 꼭지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대형 사고를 전했는데 앵커가 클로징에서 관련 코멘트는 하지 않은 채 그저 활짝 웃으며 시청해주셔서 고맙다는 말만 뱉고 뉴스를 마무리한 날이 있었다. 뉴스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고 그 후론 MBC 뉴스데스크를 잘 챙겨보지 않게 됐다.

 

MBC가 정말 끝났다고 느낀 순간은 그 후에도 자주 찾아왔지만 정말 결정적인 사건은 2012년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이었다. MBC는 선거방송에서 단연 선두주자였다. 2010년 6월 2일 MBC 지방선거 방송은 30~40대 여론 주도층이 압도적으로 시청했다는 조사가 나왔고 최첨단 그래픽 등이 재밌었다며 시청자들이 극찬했던 방송이었다.

 

△ 2010년 6.2 지방선거 MBC 개표방송의 모습. 후보자들의 모습과 터치스크린 등으로 많은 호평을 받았다.(MBC 개표방송 화면 캡처)

이랬던 MBC 개표방송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매우 끔찍했다. 후보들의 사진을 억지로 붙여넣은 듯한 그래픽 등으로 개표방송이 90년대로 돌아갔나 싶을 정도였다. 개표방송이 끔찍했던 이유는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해야 할 고급 인력들을 파업이 끝난 후 이른바 ‘신천교육대’ 등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뉴스를 제작해야 할 인력들을 서울 신천에 있는 MBC 아카데미에서 브런치 교육이나 받게 만들었으니 방송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뜨겁게 사랑했던 MBC 뉴스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MBC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박상권 앵커가 자진 하차한 후 보복성 인사발령이 있었다는 기사를 접하고부터다. 그 기사를 보고 생각했다. ‘앵커 할 거 다 해놓고 이제야?’, 그 기사를 보고 몇 주 뒤 이번에는 MBC 기자들의 성명서를 접하게 됐다. 그때도 나는 냉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미 망했는데?’ 

 

MBC 소식을 접하면서도 나는 MBC 뉴스를 다시 응원해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MBC 막내 기자들이 올린 반성문 영상과 그 영상을 보고 선배 기자들이 회사 측에 보내는 경위서 영상을 봤다. 고등학교 때 MBC 뉴스를 보기 위해 집에 뛰어갔을 때 뉴스로 만났던 기자들의 모습이 나왔고 ‘이제까지 뭐하셨나요? 이제라도 다시 힘내주세요.’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MBC 기자들이 조금씩 변하는 모습이 접해졌지만 안타깝게도 MBC 뉴스는 더욱더 망가지고 있는 듯하다. MBC 뉴스를 망친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는 김장겸 보도본부장은 사장이 돼서 MBC를 더 손쉽게 망가트리고 있는 모양이다.

권력을 향해 비수를 들이대고 비판해야 할 MBC는 그것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로 작심한 듯했다. 그들이 찬양했던 정권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3일 밤 방송 예정이던 ‘MBC 스페셜’ “탄핵” 편을 불방시키고 담당 PD가 방송 제작을 할 수 없는 부서로 전보됐다 소식까지 들려온다.

 

MBC 임명현 기자가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에서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MBC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냈다 한다. 2012년 파업 이후 MBC 기자들이 수치심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회사 측의 각종 폭력에 무감각해졌다는 게 논문의 내용이다. 

 

사실 MBC 기자뿐만 아니라 MBC 뉴스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MBC는 이제 안 돼, 나도 요즘 MBC 안 봐, MBC를 누가 봐? 무한도전 빼고?’라는 말이 나온 지 벌써 5년이 됐다. MBC 기자들이 회사 측의 폭력에 무감각해졌듯 MBC 뉴스가 더 심하게 망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 역시 무감각해졌다.   

 

△ 팬카페에서는  MBC 보도국에 과자를 보내거나 2012년 파업 당시엔 간식거리를 보내기도 했다.

좋은 뉴스를 만들어 달라는 MBC뉴스 팬들의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MBC 뉴스 팬카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약 10년간 MBC 기자의 팬카페를 운영하고 10년째 되는 날 그만둔 사람이다. MBC 뉴스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는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자랑이었다.

 

대학 때 쓴 리포트 제목도 모두 MBC 뉴스였다. ‘앵커와 뉴스 시청률의 상관관계 - MBC 뉴스를 중심으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한 방송뉴스의 위기 극복방안 - MBC 탐사보도부를 중심으로’, ‘국내 방송사 국제부 점검 - MBC를 중심으로’ 얼마나 MBC 뉴스를 좋아했으면 대학 때도 MBC 뉴스만 공부했는지 모르겠다.

 

MBC 기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정보 제공 및 사회 곳곳을 감시하는 기사를 생산하며 MBC 뉴스의 가치를 만들어냈다는 것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열심히 날카로운 뉴스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본 누군가는 미래를 꿈꾸었다는 것이다.

 

가끔 나의 성장과정을 다시 훑어보고 싶을 때면 팬카페에 들어가 본다.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이 남겨져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MBC 뉴스는 그냥 뉴스가 아니라 인생이자 추억이자 행복이었다. 뉴스 오프닝 음악만 들어도 두근댔었던 적이 있다.

MBC 기자들이 수치심과 무력감이 올 때마다 이런 팬들의 인생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MBC는 한때 정정당당 MBC였고 승리의 MBC 아니었는가. 그동안 MBC를 지배했던 권력이 무너졌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엠빙신으로 남을 것인가, 다시 사랑받는 마봉춘으로 돌아올 것인가. 



컨택트(Arrival, 2016)


<컨택트>의 포스터 (출처: 네이버영화)  



 

[ Contact with Arrival 도입과 접촉하다 ]

 

컨택트의 영어 제목은 "Contact"가 아니다. 바로 “Arrival”, 도착이라는 의미를 사용하고 있다. 제목을 검색해보니 잘못된 번역의 예라는 평가가 많았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화라고 알고 있었기에 외계인의 도착을 뜻한다면 맞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영화를 본 이후에는 확실히 잘못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창에 영어제목을 다시 검색해보니 몇 가지의 의미가 나왔다. 도착, 도착한 사람 그리고 도래, 도입. 정확하게는 3번째의 뜻이 이 영화와 가장 부합하는 키워드였다.


Arrival

1.도착 2. 도착한 사람 3. 도래, 도입

 

여러 의미에서 해석이 가능한 키워드가 아닐까. 우선 이런 종류의 SF에 도착한 나에게 접목시킬 수 있을 있을 것 같다. 사실 문과-인문계열로 이어진 평범한 내 인생에 SF는 참 어려운 분야가 아닐 수 없다. 특히나 에일리언과 같은 독보적인 외형을 가진 외계인에 대해서는 이질감이 참 큰 편이라 그간 큰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했던 적은 없기도 했고, 우주영화에 등장하는 수학적인 부분은 대체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오는 영화라니, 어렵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나 SF영화치고는 특이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인문학도를 위한 우주영화’, 혹은 문과판 <인터스텔라>’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궁금증이 들 수밖에 없었다. 우주와 외계인이 나오는데 인문학이 붙는다니, 쉽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니면 이 영화도 기---사랑으로 이어지는 결말인걸까.

 

영화를 보고 나니 사람들이 표현한 것이 어떤 느낌인지 대략적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컨택트>의 영어제목이 “Arrival”인 것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Arrival”은 영화 안에서 외계인들이 쓰는 언어 그 자체다.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헵타포드어'를 분석중인 '루이스'와 '이안'의 모습 (출처: 네이버영화)


 

<컨택트>의 외계인들은 오징어를 생각나게 하는 외모를 지녔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징어란 잘생긴 사람 옆에서의 그 오징어가 아니라 진짜 오징어다. 먹물을 사용해 주인공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점 또한 오징어스럽다. (영화를 본 후 오징어가 땡겼다라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먹물 언어라니, 정말이지 탁월한 선택이다. ‘헵타포드어라고 불리는 이 먹물 문자는 단순한 원형 같지만 처음과 끝이 닿지 않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어딘가에 도착한다던지, 어떤 순간이 도래한다는 영화의 제목과 일치하는 문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쩐지 삶과 죽음의 순환과도 닮아있다. 삶과 죽음 역시 끝맺음과 새로운 시작이 존재하는 순환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이 외계인은 고대 이집트의 그림 문자 같은 회화문자인 헵타포드어를 사용하는데, 이 문자는 다소 수학적이다. 모양의 각도를 분석해 언어를 해석할 수 있고, 주연 배우루이스는 이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가르친다는 다소 신선한 발상을 행동에 옮긴다.

 

의사소통의 과정은 영화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진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많은 단어를 뜻하는 행동과 시각자료가 등장한다. 인간의 언어를 배우는 외계인이라니 꽤나 재미있는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어가 모든 문명의 초석이다.”

 

천체물리학 전문가인 이안루이스와의 첫 만남에서 루이스가 쓴 책의 서문인 이 문장을 읽어주는데 이 장면이 어쩌면 전체를 아우르는 복선이었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들의 운명에 있어서도 언어는 또 다른 초석이 되었으니 꽤 그럴싸하다. 영화를 본지 시간이 좀 흐른 후 생각해보니 이 언어의 이름은 헵타포드일 수도, ‘한나일 수도 있겠다.

 


 

[ H-A-N-N-A-H 한나 ]

 

의미 없다고 생각한 먹물의 문양이 언어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왜 오묘한 기분이 들었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필자 스스로 언어란 이래야한다, 라고 생각해오던 어떠한 벽(마치 헵타포드를 만나는 공간에 놓인 그 투명한 벽과도 같다)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외계, 우주의 환경에 따라 생명체의 모습도 다를 수 있다고 일반적으로 인식 가능한 것처럼 언어도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간 간과해오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막연하게 <E.T.>의 한 장면처럼 필자는 외계인은 우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더 높은 지적 수준을 가진 생명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헵타포드는 의사소통의 과정이 필요한, 삶과 죽음을 겪는 어찌 보면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헵타포드중 한 마리가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존재하는 헵타포드는 그 순간 인간과 동등한 선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마치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인종인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여기에 하나 더, 영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또 다른 존재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스미스소니언전에 전시된 사진 '금환일식을 바라보는 구경꾼' (출처: 한국정경신문, Colleen Pinski. all right reserved.)

 

영화에서는 개기 일식의 한 장면처럼, 어떤 흔적을 남기는 찰나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 순간은 영화의 도입부로부터 시작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더욱 빈번해진다. 그 찰나에 존재하는 그녀의 이름은 한나’, ‘루이스의 딸이다.

 

일반적인 영화의 흐름을 생각해보았을 때 도입부에 등장했고, ‘루이스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그녀는 과거형 혹은 현재형일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다. 이미 한번 언급했듯이 헵타포드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순간에 한나는 더욱 빈번해진다. 어린아이에게 어떠한 글자와 의미를 가르치듯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루이스에게, ‘한나의 존재는 더욱 빈번하게 등장한다.

 

영화 안에서 한나헵타포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라고도 볼 수 있다. [루이스-한나]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인간-헵타포드]로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어를 배우는 헵타포드는 마치 아이와도 같아서 어떤 한 단어를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반복적으로,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르쳐야 한다. ‘루이스와 같이 헵타포드를 가르치는 교감형 부모가 있는 반면, ‘서툰 부모중 일부는 전쟁을 선포하며 과격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육아의 과정 중 일부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한나의 존재는 여전히 매우 모호하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이미 한나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관객에게 그녀는 이미 과거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같은 선상에서 한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루이스는 아이를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진 엄마라고 생각되며, ‘헵타포드에 대한 애정은 모성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읽히기 쉽다. 필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생각했고, 이 사실을 관객이 범하기 쉬운 오류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만큼 연출은 아주 자연스럽다.

 

언어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이 바뀌듯이 루이스헵타포드어를 이해하며 한나의 이미지와 자꾸 마주친다. ‘한나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루이스의 태도는 관객에게는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이해의 포인트는 바로 시간이다. ‘헵타포드에게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개념이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헵타포드어와 같이, 멀리서 보아야 전체적인 그림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 한나의 존재 역시 그렇다. 그녀는 과거이자 현재, 동시에 미래다. ‘한나의 영어이름은 H-A-N-N-A-H’, ‘헵타포드어와 비슷한 구조로 나열된 원형 문자임과 동시에 끝이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나의 존재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의 만남과도 같은 것이다. ‘헵타포드어로 해석이 가능한 미래의 존재.

 

언어와 시간을 끌어와서 만든 영화 <컨택트>는 이렇게 문과판 <인터스텔라>가 되었다.

 


 

[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

 

한나의 존재가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문득 궁금해진다. ‘헵타포드어는 미래를 예측하는 신비한 언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함인가?

 

이 답은 죽음을 앞둔 한나에게 루이스가 속삭이는 한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생각에 잠긴 '루이스' (출처: 네이버영화)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다소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 시작과 끝. 그러니까 영화는 루이스를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라고도 한다. ‘헵타포드어를 이해하게 된 루이스가 미래의 시간을 통해 딸의 죽음을 알면서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선택을 하는 것이 그 자유의지의 발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두고 이안루이스의 선택이 갈린 것처럼 인간은 같은 선택지를 두고도 종종 다른 선택을 하곤 한다. 어쨌든 서로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또 다른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삶은 헵타포드어처럼 어디에선가 시작되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기에 선택하지 않는 삶은 과연 행복한가? 딸의 죽음을 미리 알게 된 이안루이스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영화는 미래를 알게 된 인간의 선택과 그로 인한 나비효과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루이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는 그 사소하고 따뜻한 장면을 비출 뿐이다. ‘루이스를 미워하는 그 순간마저도 사랑하게 되는 그런 삶들을. 그리고 그런 순간을 만났음에 감사함을 느끼게끔.

 

이안의 미래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왠지 루이스의 삶이 좀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삶이 죽음으로 흐르는 그녀의 시간 속에서 한나를 만난 것만큼 루이스에게 의미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결말을 보고 어쩌면 <컨택트><인터스텔라>처럼 결국은 사랑으로 끝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문과판 <인터스텔라>로 불리는 이 영화의 가치는 곳곳에 숨어든 여백에 있다.

 

왠지 모르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헵타포트어의 여백을, 영화의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여백들을, ‘루이스의 선택을, 나의 삶 어느 지점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 어딘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나의 한나는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삶이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당신은 종종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어쨌든 그 결말이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그 선택이 무엇이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나의 존재를 내가 이해한 문장으로 당신에게 여백으로 남겨둔다.

 

시작과 끝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 과정은 의미가 있다.”라고 말이다.





올해 4월,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피해사실 폭로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건의 시간대도, 가-피해자의 관계도, 발생한 공동체도 다양했지만 공통적인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가해자들의 사과 대자보의 내용이었다. 피해자들의 폭로는 수도 없이 쏟아졌지만, 가해자들의 대자보 내용은 정말 비슷비슷했다. 본인의 가해 사실을 나열하고, 사과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그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는 내용도 있었다. 감히 짐작컨대, 본인이 어떠한 맥락에서 가해를 저질렀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의제기를 받고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 사건 경위를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가해자에게 ‘본인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볼 것’ 을 권유했다. 그래서 듣게 된 사건 경위는 충격적이었다. 가해자는 본인이 왜 가해자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본인의 행위가 ‘성폭력’ 이 아니라 ‘로맨틱한 관계 사이에 흔히 발생하는 스킨쉽 사인 미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본질적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성폭력은 나쁜 것’ 이라고 교육받는다. 하지만 왜 나쁜지, 성폭력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하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에게 손가락질하도록 가르친다. 성폭력 교육을 하면서 이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 경찰청 공식 블로그에 올라온 성폭력 예방법 (폴인러브 : 16.08.22)

성폭력 예방 교육의 초점이 피해자에게 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실 성폭력 문제는 어떤 상황이든, 피해자가 어떤 상태이고 둘의 관계가 어떻고 등등과 관계없이 절대 합리화 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모든 강력 사건이 그렇듯 성폭력 역시 ‘가해자의 문제’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할까? 사실 아주 단순하다. 성폭력은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흔히들 폭력을 떠올릴 때, 현상에 집중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 손상과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하는, ‘현상’ 말이다. 하지만 모든 폭력은 강자가 약자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면서 발생한다. 폭력이 발생하는 관계성, 즉 강제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가 더 주의깊게 봐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다. 성폭력 역시 이 관계성을 정확하게 따른다. 2014년 경찰청 통계를 따르면, 성범죄(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기타 강간/강제추행 등) 전체 발생 건수 21055건 중 여성 피해자는 18974명으로, 약 90.12%이다. 가해자의 경우, 전체 검거자 19306명 중 남성 가해자가 무려 18983명으로 약 98.33%가 남성으로 집계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별권력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피해자 성비를 차치하고서라도, 성폭력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98.33%가 남성이라는 건 현 한국 사회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지표다. 바로 ‘남성’ 으로 통용되는 집단이 성폭력을 저지를 ‘권력’ 을 쥔 집단이라는 것 말이다. 권력 집단이 성교육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성교육은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9.88%를 차지하는 남성 피해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남성’ 집단이 가해자로 지목되었다. 이성애규범이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에서, 남성 가해자가 98.33%인데 남성 피해자가 9.88%라는 건 언뜻 이상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가 나타내는 것은 명확하다. 남성 집단에 속해있는 개인 역시 권력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남성 개인 역시 ‘남성 집단’ 에게 요구하는 가부장제 남성성으로 권력을 판가름하기 때문에, 이상적 남성성을 획득한 사람은 남성 집단 – 남성 중심 사회에서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러지 못한 사람일수록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고 권력과 멀어진다.

 하지만 사회에서 남성이 권력을 차지한 지 굉장히 오랜 세월이 지났다. (청동기 시대부터 남성이 사회의 중심이 되었다.) 어떠한 집단이 권력을 획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집단은 스스로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너무 오랜 세월 남성이 사회에서 권력을 쥐고 있다 보니, 남성집단은 권력층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되었다.

사회의 주류 이념이 남성에게 맞춰진 사회에서, 개인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본인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나마 자각하고 있다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다.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 을 존중하는 것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간섭/강요 없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성적 행위를 결정하고 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성적 자기결정권이다. 그 중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은 ‘동의 구하기’ 이다.

 동의를 구하는 작업에서도 우선해야 하는 조건이 있다. 첫 번째는 ‘상대와의 권력관계를 생각하는 것’ 이다. 본인과 상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는 ‘동의 표현-거절 의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환경 만들기’ 이다. 거절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는 환경은 곧 성폭력을 조장하는 문화와 연결된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의 원 의미를 크게 훼손한다.

 우리는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언제든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도록 방조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분위기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미약하지만, 수많은 개인이 모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믿는다. 당장 내가 속한 공동체부터 성폭력에 무방비한 공동체가 되지 않겠다 선언했다. 개인의 생각이 조금씩 바뀐다면, 언젠가 이 사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 아이를 잘 보라는 정책보다는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야

 

“엄마 너무 힘들어서 이제 애 못 봐주겠어. 둘째 낳으면 몸조리 한 달하고 첫째 데리고 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일 그만두고 들어앉으면 안 돼?”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첫째를 봐주겠다며 아이 낳자마자 우리 옆 동으로 이사까지 왔던 엄마가 더는 애를 못 보겠다 했다.

 

엄마가 힘들다는 것은 매 순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 년에 두 번은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여름 대비 에어컨도 설치해주고 냉장고가 고장 났다 하면 12개월 할부로 냉장고도 사드렸다. 애 볼 때 소파가 필요하다, 싱글침대가 필요하다, 이렇다저렇다 하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결제 버튼을 눌렀다. 엄마가 애 안 봐주겠다고 하면 큰일이니 눈치가 보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ISP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 출산 후 5달만에 대형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는 모습, 워킹맘으로의 삶이 시작됐다. (본인촬영)


저렇게 눈치를 본 이유는 하나였다. 밤낮없이 첫째가 엄마 집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야근이 잦았고 주말 근무가 거의 매주 있었기 때문에 첫째를 데리고 올 시간이 없었다. 첫째가 처음으로 뒤집었을 때도, 처음으로 엄마라고 말을 했을 때도, 걸음마를 막 떼던 순간에도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2015년 여름, 나는 출산한 지 32일 만에 출근했다. 사무실 업무가 폭탄으로 쌓여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도 노트북을 갖고 들어가서 일을 했다. 심지어 출산 10일째 되는 날은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고 다시 산후조리원으로 복귀했다.

 

 

“뭐 그런 회사가 있냐! 너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냐!”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아주 작은 비영리 단체였고 내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1인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 진짜로 있었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죄책감이 밀려왔고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출산휴가 및 육아휴직을 못 썼으니 주 4회만 일하고 하루는 쉬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평일 하루를 쉬면서 한 일이 아이와 함께 문화센터 가기였다. 조리원에서 만났던 엄마들과 문화센터 수업이 끝날 때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왔는데 갈 때마다 나는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 문화센터에 가서 정보를 많이 얻었으나 그 만큼 스트레스도 컸다. (본인촬영)


“얘는 이유식 얼마나 먹어요? 우리 애는 100cc를 못 먹어요.”
“이 과자 먹여봐, 애가 진짜 좋아해”

 

친정엄마가 만들어주는 이유식을 먹던 우리 첫째가 얼마나 먹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고 이유식의 양을 몇cc라고 이야기하며 봐줘야 하는 줄도 몰랐다. 아기가 과자를 먹는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순간 나는 벽이 되고 싶었고 땅 밑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떠나며 내가 나쁜 엄마라는 생각에 너무나 슬퍼하는 동시에 단축근무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업무처리를 위해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급한 업무는 눈감을 수 없어서 집에 와서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렇게 나의 단축근무는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좋은 엄마 되기를 포기한 나는 둘째를 갖게 됐다. 좋은 엄마도 못 되는 판에 남편과 이야기를 끝낸 가족계획을 계속해서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지 절대로 정부 정책이 좋아서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정부가 10년간 80조 원을 쏟아부었다고 하는데 아이를 낳은 나는 왜 피부로 와 닿지 않을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정부 정책이 대부분

자녀 3명 이상을 둔 집에 혜택이 가도록 만들어 놨다. 애를 낳는 사람만 계속 낳으라고 유도하는 정책인데 어떤 엄마가 직장을 다니면서 자녀를 3명 이상 낳아 기를 수 있을까. 특히나 나처럼 작은 단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워킹맘은 출산휴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이 낳는 것을 아예 포기하는 가정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혹시나 해 대선주자들의 정책을 찾아봤는데 역시나 매력적인 정책이 하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근로시간을 단축해줄 터이니 집에 가서 아이를 보라는 것이 가장 맘에 안 드는데 모든 후보가 이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근로시간을 단축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내 일을 더 해야 한다는 소리이자 함께 일하는 다른 회사들과의 소통이 8시간 근무 시간보다 더 단축된다는 소리다. 이런 근무를 하면 업무 효율이 오를까? 근로 시간을 단축하는데 과연 눈치 보기 직장문화가 근절될까?

 

 

그것보다 워킹맘으로서 내가 바라는 것은 부모가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자아실현이라는 이유도 있다. 그런 여성들에게 근무시간 단축과 같은 정책이 매력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해서 안전하게 아이를 맡기고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곳을 더 많이 만들어주는 정책을 생산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찍 집에 가도 눈치 주지 않는 직장 문화를 만들기보다는 정시에 퇴근해도 눈치 주지 않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낫다는 소리다.

 

정부의 출산율 하락 대책을 보면 여성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정책을 찾을 수가 없다. 모두 어떡하면 엄마와 아이를 붙어있게 할까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여성을 위한 정책을 하나 발견했던 적이 있는데 성남시의 산후조리 지원금이었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하다고 지적하는 시대에 산후조리 지원금을 준다는 소리에 정말 놀랐다.

 

 

사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한 것이 아니라 서양 여성과의 골반 모양 및 크기의 문제, 온돌 사용으로 인해 추위를 잘 타는 체질 등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산후조리를 잘할 수밖에 없다.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가 과하다며 매번 예로 드는 미국 같은 경우 민간 보험사들이 보험료 지출을 줄이기 위해 임의로 출산 후 입원보장 일수를 줄여버렸고 미국 산모들은 아이 출산 후 바로 퇴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 애 낳고 회복이 빨라서 바로 퇴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산모와 아이 건강을 위해 미국 연방정부와 각 주 정부가 출산 후 24시간 이후에 퇴원하는 법안까지 통과시킬 정도였는데 이것을 한국 여성의 산후조리와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올해는 엄마가 아이 보는 시간을 늘리기보단 한 명의 여성이 사회에서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행복하게 살기 위한 정책이 쏟아지길 바란다. 임신ㆍ출산ㆍ육아를 지표로만 보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출산율이 오를 것이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 줄이 선명하게 뜨고 병원에 가서 임신 사실을 확인했다.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펄쩍 뛰며 좋아하기 보단 걱정이 앞섰다. “. 나 이제 뭐해야하지?”

주변 친구 중에 임신한 친구도 없었고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국내 최대 임신출산육아 정보 카페라는 곳에 가입해서 이것저것 읽기 시작했다. 성별을 알고 싶어서 각도를 재서 짐작해보는 각도법이야기부터 이게 가진통인가요? 진진통인가요?’라는 글까지 처음 듣는 단어가 넘쳐났다.


△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책은 매우 다양하다.(본인촬영)

인터넷에 게재된 글이다 보니 믿을만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책도 저자마다 다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출산에 대해 이야기 할 땐 한결같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임신부가 선택한 방법으로 출산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허나 출산의 과정은 임신부 혼자 고스란히 이겨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임신부의 입장을 존중해야합니다.”

 

사실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원하는 출산 방법이 있었다. 바로 수중분만이다. 사람들은 내가 수중분만을 한다하면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한다. 허나 나는 나를 위해서 그 분만법을 선택했다. 물을 워낙 좋아해서 아이를 가졌을 때도 온천 태교를 했고 아이를 갖기 전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목욕탕에 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좋아하는 물에서 아이를 낳으면 긴장감도 덜하고 편히 낳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중분만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과학 선생님이 출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여주셨는데 뮤지컬 배우 최정원씨의 출산 과정이 담겨있었다. 어떤 고통인지는 몰라도 진통이 오자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물에서 아이를 낳아 바로 안아 올리는 장면이 당시 14살의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뒤로 나는 반드시 수중분만을 하겠다고 떠들었고 그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나는 출산 예정일을 열흘 앞두었을 때까지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에 다녔다. 가깝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수중분만을 한다며 인터넷 홈페이지에 써놨기에 간 것이다. 산부인과는 수중분만 외에도 그네분만 등의 특수분만을 한다며 인터넷에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달이 다 돼가도록 담당 선생님이 나의 분만 방법을 묻지 않으셨다. 왜 묻지 않으실까 궁금해서 8개월차에 접어들 때 선생님한테 여쭤봤다.

 

, 수중분만 하고 싶은데요.” 그 말 한 마디에 선생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리곤 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요즘 엄마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물에 들어가서 애 낳는다고 더 쉽게 낳을 거 같아요? 아이를 낳는 건 아플 거 다 아프고 낳아야 하는거에요. 쓸데없는 정보가 요즘 너무 많아서 탈이에요. 수중분만 할 생각은 접으세요.”

 

남편과 나는 담당 선생님한테 왜 혼났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 각종 출산 관련 책에서는 산모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는데 수중분만을 원한다는 이유로 왜 혼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병원을 바꿔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수중분만을 못해서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담당 선생님이 나에게 겁을 줬기 때문이다.

 

태반이 많이 밑으로 내려왔어요. 진통 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전치태반이라는 말씀인가요?

전치태반은 아니에요.”

그럼 정상범위에서 얼마나 내려갔나요?”

정상범위에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린지 병원에 갈 때마다 알 수가 없었다. 태반이 많이 밑에 있는데 정상범위 안에 있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설상가상으로 막달에 접어들자 담당 선생님은 제왕절개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반이 밑에 있어서 진통 왔을 때 정상 분만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 그 날 상황 봐서 응급으로 수술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병원에 갈 때마다 들었다. 응급으로 수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태반이 밑에 있다는데 그 밑에 있다는 것이 정상 범위 안에 있다는 이상한 소리에 나는 반발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도 우리 친척 언니들도 그리고 우리 할머니도 모두 애를 쉽게 낳다며 출산의 기쁨만 얘기해줬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혼나고 겁을 먹으니 도무지 그 산부인과에서 담당 선생님과 함께 아이를 낳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예정일을 일주일가량 남기고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산부인과로 병원을 옮겼다. 태반 검사를 다시 했는데 정상범위에 잘 있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나는 진통이 올 때 태아의 심박수가 떨어지는 바람에 수중분만이 가능한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수중분만을 못했다. 그렇게 자연분만으로 첫째를 낳았다. 코앞에서 원하는 분만을 못했지만 응급상황없이 그리고 원하는 대로 무통주사도 맞지 않고 자연분만을 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 수중분만실의 모습. (본인촬영)

그리고 2년이 흘렀다. 둘째를 낳기 위해 다시 집에서 1시간 떨어진 병원을 향했고 이번엔 원하는 수중분만을 했다. 은은한 조명에 잔잔히 깔리는 음악.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니 부력 때문인지 내 몸이 살짝 떠올랐다. 남편이 내 뒤에서 허벅지를 잡아 힘을 줄 때마다 같이 당겨주니 세배로 더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임신부의 3대 굴욕 중 하나인 회음부 절개를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난 뒤 입원실에 가자마자 온천을 한 듯 나른한 느낌이었다. 그리곤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온 몸을 감쌌다. 수중분만의 효과도 있었겠지만 원하는 대로 마음 편히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만약에 병원을 바꾸지 않았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진통이 오는 정신없는 상황에서 태반이 밑에 있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만 듣고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을까. 그 병원, 그 선생님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난다. 수중분만 하겠다는 그 날, 나는 도대체 왜 혼난 것일까.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의 생일과 시간은 담당 선생님의 수술 스케쥴에 의해 결정된다는 우수개소리가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권장하는 제왕절개 분만비율은 15%이며 우리나라의 경우 35~40%로 매우 높은 상황이다. 제왕절개 분만이 의료 기관 및 관계자의 영리추구에 의해 시행돼서는 안 된다는 가톨릭 의료기관 의학윤리지침서도 있다한다. 돌이켜보니 혹시 정상범위에 있지만 태반이 밑에 있어서 응급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의 숨은 뜻이 느껴지는 것 같다. 혹시 담당 선생님은 나를 생명을 걸고 아이를 출산하는 산모라고 생각하기 보단 그저 한 명의 ATM 기기로 본 것이 아닐까.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나 때는 안 그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뭐가 힘들다고 노약자석에 오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또 들었다. 첫째 때도 전철 탈 때마다 들었는데 둘째 때도 또 듣고 있다. 그럴 때마다 임산부 배지를 더 잘 보이도록 꺼낸다. 허나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나 때는 임신하고도 밭을 멘 할머니들이 전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를 임신하고 첫째를 유모차에 태우고 의정부 경전철을 이용한 날이 있었다. 노약자석 끝자리를 양보해주면 나도 앉아갈 수 있고 유모차도 붙잡을 수 있어서 끝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자리를 한 칸만 옆으로 가주실 수 없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자신이 유모차 봐 줄 테니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유모차가 경전철 설 때 밀릴 수가 있어서 계속 잡고 있어야 하는데요.’라고 했더니 안 밀린다며 자신이 잘 보고 있다가 밀리면 잡아준다며 가운데 자리에 앉으라 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 그 날은 자리에 앉는 걸 포기하고 서서 올 수 밖에 없었다.

 

한 칸 옆으로 가는 것이 그리도 어려웠을까(본인촬영)

 

작년 9월 초였다. 한낮 기온이 24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첫째 문화센터 수업이 끝난 후 경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는데 6개월 차에 들어서는 임신부가 유모차까지 밀고 타니 노약자석에 앉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나보다. 그 때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아니, 애를 반팔을 입히면 어떡해요? 감기 들게?”

지금 기온이 24도에요. 반팔 안 입히면 더워서 울어요.”

내 손자는 어제 반팔 입혀서 감기 걸렸다니깐? 반팔을 왜 입혔어?”

한여름에 태어난 아이라서 더위를 심하게 타서 오늘 같은 날 반팔 입어야 돼요

 

. 나는 한낮기온 24도에 반팔 입힌 죄로 등산복 입은 아저씨의 시비를 고스란히 받아 줘야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번엔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시비를 걸었다.

 

얘 배고파하는데?”

방금 먹고 왔어요. 졸려서 그래요.”

이거 손수건 물고 있는데 빨리 빼요!”

이 나려고 간지러워서 그러는거에요. 괜찮아요.”

 

나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일어나기 싫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날은 도무지 짜증을 참기 힘들어서 보건소로 직행했다. 더 큰 임산부 배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항공사에서 받은 작은 배지에서 보건소에서 주는 큰 배지로 바꿨다.(본인촬영)

 

그 일이 있은 후 커다란 배지를 착용하고 전철을 이용한 날이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핑크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저 한 정거장만 더 가면 갈아타요. 앉으세요.”라고 했고 학생이 그래도 앉으세요.”라고 하려고 ..까지 발음한 순간 우린 발견했다. 핑크의자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그 짧은 순간에 어디서 나타나서 앉으셨는지 너무 몰라서 나도 모르게 어머나!’ 소리가 나왔다.

 

비상상황이 생길까 두려워 전철을 혼자 탈 때마다 남편에게 미리 연락해놨다.

 

그 모습을 보며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탔다. 운이 좋은지 노약자석에 자리가 있었고 앉아서 간지 5분 정도 됐을까. 공포의 그 순간이 왔다. 술 취한 아저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표적은 나였다. 일어나라고 일부러 내 다리에 짐을 내려놨다. 그 순간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전화번호 하나를 주문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1544-7769. 1544-7769. 1544-7769. 저 아저씨가 시비를 걸다가 혹시라도 내 배를 때리면 바로 문자해야지 그런데 문자할 시간이 있을까? 미리 써놨다가 전송되게 해놔야지. 그것보다 차라리 서서 가더라도 옆 칸으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생각 저 생각에 복잡한 순간 반대편 노약자석에 자리가 나서 술 취한 아저씨가 앉았다. ‘. 다행이다. 지금 일어나면 30분은 서서 가야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에이~ 설마 그 정도겠어?”라는 반응이 많다. 그런데 전철을 10번 타면 8번은 이런 일이 발생한다. 요즘엔 워낙 캠페인을 많이 해서 인식이 많이 개선됐지만 그것도 젊은 사람에 한해서다. 자리 전쟁은 임산부 vs 비임산부가 아니라 임산부 vs 노인이 된지 오래다. 나는 임신하고도 밭을 메지 않은 죄로 노약자석에 앉던 핑크의자에 앉던 노인들의 표적이 됐다.

 

  휠체어도 유모차도 매번 한참을 기다려야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유모차를 가지고 전철을 탈 때마다 매번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전철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가면 항상 첫 번째에 타지 못한다. 유모차도 휠체어도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한데 그런 사람들을 제치고 빨리 올라가려는 노인들이 엘리베이터를 먼저 장악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가기 힘들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있을 때도 꼭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간다. 그것도 휠체어와 유모차를 밀어내고 말이다.

 

누군가 나보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극심한 곳을 뽑으라고 하면 전철이라고 답하고 싶다. 핑크의자를 백 날 만들어봤자 노인들의 인식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임산부든 장애인이든 모두 노인에 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 아닐까.

 

다시 핑크의자를 졸업하며. 다시는 핑크의자에 앉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간절하다.


최근 ‘그것이 알고 싶다’(2017. 1. 07)에서 일반 순경 공채에 대해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왔다. 
청와대 경호실에 파견된 경찰 고위 간부의 노트에 경찰 내부의 고위 인사이동 뿐 아니라 ‘순 공채’에 관해 청탁을 암시하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었던 것이다.


"경찰 인사 및 채용 청탁 비밀노트"
청탁이 아니라면 해당 수험생 수험번호가 거기에 대체 왜 적혀 있었을까? 거기에 적혀있던 다수의 인사이동은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한다. (출처: 뉴스엔)

공평한 시험 기준으로 선발한다는 (사실 이것도 최소한의 ‘명목 상’ 평등이지만) 공무원 공채 시험마저 부정 청탁이 의심되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노량진과 신림동에서 젊음과 적지 않은 돈을 걸어가며 눈물 젖은 빵을 먹고 있는 청춘들에 대한 배신이며, ‘노오력’만 하면 된다고 읊조리던 보수적 가치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지난 역사를 복기했을 때, 본격적인 망조가 나타난 왕조 말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매관매직’과 ‘과거제 문란’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공동체 신뢰의 위기’는 20년 전, IMF외환위기보다 더 중대한 위기이다. 아울러 사회적 신뢰가 밑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 때마다 후보의 경제 정책 역량에만 모든 초점이 맞추어지는 정치 세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현대 민주국가의 주요 요소인 민주적 정치문화, 사법 시스템은 물론이고 시장경제체제 역시 ‘사회적 신뢰’를 밑바탕으로 존재한다.수요, 공급 성향에서부터 정부 재정, 통화, 금리 등 거시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사라지면 ‘비효율’이 나타날 것이다. ‘합리적 기대학파인 루카스의 수직 공급곡선’과 행태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정부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건전한 시장 경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변수라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되어 있으며 그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신뢰가 부족하면 경제뿐 아니라 보건, 국방, 교육 분야 등에서 어떤 획기적인 정부 정책이 나올지라도 국민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방위사업청에서 전력(戰力) 강화를 위해 신형 무기를 도입한다 해도 “또 몇몇 똥별들 주머니로 들어가겠지.”라는 인터넷 상에서의 비아냥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민들에게 시종일관 거짓말만 일삼았던 메르스 사태 당시 보건 당국을 보건대, 이제 질병 관리에 관한 지극히 상식적인 정부 가이드가 존재할지라도 국민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정해진 매뉴얼조차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우리 사회는 하나의 ‘커다란 세월호’가 되어가고 있다.

이보다 더 무서운 사태가 있을 수 있는가? 또한 이러한 사회적 신뢰 부족 현상이 음모론에 환호하고 의심증에 절어있는 국민들의 ‘유난스러운 종특’때문일까? 
사회에 만연한 신뢰 부족 현상은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보건대, 국가 권력이 그간 법과 제도를 멋대로 유린하고 불공정하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사법 시스템에 대한 집단적 불신의 결과물이다.

"국가 내란죄로 법적 심판을 받아야 할 쿠데타 주축들이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되고 그 일족들이 아직도 호의호식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 시민들이 사법 시스템과 민주주의에 대해 신뢰할 수 있을까?"

세월호와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의회민주주의와 사법 시스템 등이 평범한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권리와 생명, 재산조차 보호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국가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깨지게 마련이다. 법과 민주주의가 정의에 대한 국민들의 최소한의 욕구마저 만족시키지 못함에 따라 사회 질서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그 효용성에 대한 비판적 회의가 국민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절차에 실망한 우리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문제 타개 방식이 통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과정이 어찌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라는 한탕주의와 “꼬우면 출세하든가” 식의 염세적인 배금주의 풍조가 사회를 잠식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우선주의’를 외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밑바탕부터 썩어문드러진 사회적 신뢰의 복원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사회적 신뢰와 공정 경쟁이 실종된 이 천박한 ‘헬조선식 정글 자본주의’는 오늘날까지 ‘경제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사회적 신뢰와 국가에 대한 시민의 권리를 등한시해왔다. 애석하게도 대한민국이 경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2017년 오늘날까지도 진보,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정계의 화두는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경제만 잘 살려서 ‘따슨 밥’먹게 해주면 되겠지 라는 일차원적 내치(內治)의 시대는 끝났다.

"일자리 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문재인 대선후보"

국가가 시혜적 입장에서 단순히 일자리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시장을 감시하는 게임판에 시민을 ‘동등한 플레이어’로 참여시킬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

오히려 과도한 '먹고사니즘' 정치 슬로건은 '공정해야할 사회 규칙이나 통치 방식이 어떻게 운영되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상관없다'는 식으로 시민들의 탈정치화를 가속화시킨다. 그리고 시민을 ‘권리를 쟁취하는 능동적 주체’에서 최소한의 먹거리와 엔터테인먼트에만 만족하는 ‘수동적 개, 돼지’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공정한 게임을 위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정책 참여 보장이야말로 사회적 자본의 확충뿐만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까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탯줄타고 나는 것도 능력이라며 ‘유전자 전형’으로 인생 하이패스 하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신뢰가 회복되어 (사회적 출발 지점에 대한 존 롤즈 식의 배려 정책이 있다는 전제 하에)노력하는 사람들이 웃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대한민국 정계에서도 성장률에만 함몰된 '경제발전'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신뢰가 회복된 ‘사회발전’을 우선시하는 정치 어젠다를 외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복잡합니다. 복잡하니만큼 사고도 많습니다. 개인에게는 무수한 그리고 불확실한 위험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하나하나 대비하고 조심하자니 개인에겐 명확한 방법도 계획도 마땅치 않은 것 같습니다. 보험은 개인의 이런 걱정을 먹고 태어났습니다. 닥치지 않은 걱정이지만, 그래도 돈을 냄으로써 대비책을 갖는 개념. 사람들은 비용보다 걱정에 대한 해결을 더 선호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런 보험 광고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보험 광고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여기선 보험 브랜드(회사) 광고를 다루고 싶습니다. 개별적인 상품을 소개(치과보험, 무배당보험과 같은 상품만 알리는 광고)하는 지엽적인 광고보다, 보험 브랜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대한 차별성에 대해 더 하고픈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보험 광고는 어떻게 할까요? 위험을 상기시키게 겁을 줄까요? 의외로 무작정을 겁을 주진 않습니다. 금연과 같은 공익적인 차원의 메시지만 아니라면 위협소구(대중에게 위협적 메시지로 상품 소비를 자극하는 것)는 통하지 않습니다. ‘알 건 다 아는’ 대중들한테는 위협 소구가 뻔한 상술로 치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는 뻔한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은 신경을 끄게 됩니다. 관심이 꺼진 광고는 팔리지 않는 광고, 결국 ‘죽은 광고’가 되는 것입니다. 


동부화재_꾸준한 가족 소구



사랑한다면 약속하세요 (2016, 동부화재)


동부화재 광고입니다. 대체적으로 많이 봐온 시나리오 아니실까 생각이 됩니다. 다른 보험 브랜드가 소재와 컨셉을 바꾸는 동안, 동부화재는 꾸준히 가족을 주제로 한 광고를 견지하고 있는데요. 아이의 애교, 그걸 지켜보는 가장 또는 엄마.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누구나가 원하고 유지하고 싶은 가족의 모습일 겁니다. 그런 개인의 모든 소망, 즉 가족의 화목함을 지키는 약속이라고 광고에서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있진 않지만, 이런 소중한 가정을 위험이 생길 때 지켜주겠다는 자신의 역할을 광고 밑바탕에 깔아놓은 것입니다. 

사실 보험 광고는 가족 소재를 하는 것이 전통적입니다. 어차피 생명보험 광고의 타겟이자 대상은 가족이니까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건드는 광고인만큼 조심히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무작정 약속을 지키겠다며, 가족 누군가의 사고를 광고로 보여주었다간 여론의 뭇매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소재로 잡았을 때는 가족의 평범한 일상에서 소재로 많이 찾습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소재를 따뜻하게 조용하게 다가가서 ‘스윽’ 브랜드 이름을 내미는 것이 보험 광고의 기본적 시나리오입니다. 예전에 “Bravo your life" 라는 삼성생명의 캠페인 광고가 거의 대표적일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딸 등등의 가족의 한 사람으로 따뜻하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따뜻한 ‘가족 사랑’을 토대로, 가족 전체의 삶을 동반하며 곁에서 응원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Bravo your life(2005, 삼성생명)



삼성생명_가족의 재발견

삼성생명도 앞서 말했듯 가족을 중심으로 한 캠페인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트렌드도 바뀌고, 상품도 많이 내는 기업이다 보니 광고도 다양하게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절대 다수의 상품은 가족입니다. 가족을 건드려야 상품을 팔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방식이 좀 다릅니다. 처음부터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라며 위협소구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게 뭐지?” 싶을 즈음에 중간에 수식어를 끼워넣습니다. “앞으로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라고 말이죠.


당신에게 남은 시간 (2014, 삼성생명)

실험 대상자뿐만 아니라 시청하는 이들에게도 처음에 의문과 위협을 던져줍니다. 그러나 그 위협은 ‘가족’이라는 소재에 대한 공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아무리 가족이 중요한다고한들, 그 소중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때 더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튜브 조회수 500만이 넘었고, 2014 광고대상에서 은상까지 받은 이 광고는 기존의 보험 광고와는 가족을 기존과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했습니다. 단방향적으로 ‘가족 사랑’을 홍보하는 것보다, 대중에게 직접 모니터 밖으로 ‘당신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세요?’라고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합니다. 동영상 후반엔 ‘가족 시간 계산기’까지 있어서 참여를 유도하게 합니다. 이런 쌍방향적 소통, 대중의 참여와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광고를 ‘인터렉티브’라고 합니다. 단순히 메시지를 투척하는 게 아니라, 광고를 본 대중이 스스로 행동을 하여 브랜드를 기억하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이 기법은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교보생명_가족이 아닌 친구로

가족이란 소재를 발판으로 삼성생명은 보험 1위 자리를 공고히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보험사가 다 똑같이 가족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히려 삼성생명의 브랜드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꼴이 됩니다. 이수원 씨가 쓴 [1등 기업의 광고, 2등 기업의 광고]라는 책에서도 이 사례를 제시하면서 2등은 1등과는 다른 이미지와 개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보는 조금은 다른 시선을 소개하게 됩니다.

마음에 힘이 되는 친구의 노래처럼(2004, 교보생명)


중년의 남성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어려운 일을 당한 것 같습니다. 친구를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하다 최민식은 ‘젊은 그대’를 부릅니다. 힘내라는 말보다, 친구니까 능청스레 할 수 있는 위로가 진정하게 더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확실히 가족이 아닌 친구를 소재로 택했습니다. 가족이라는 입지를 쓰진 못했지만, 또 다른 이점을 얻었습니다. 가족은 지켜야 할 대상, 책임감의 이미지가 부여된다면 친구는 함께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무거운 책임감이 사라지고 거기에 능청맞지만, 고객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이미지로 이어집니다. 교보생명은 그렇게 자신만의 컨셉을 잡아서 1위와 싸울 수 있는 경쟁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다른 광고가 USP, 즉 브랜드만의 고유한 메리트를 내세워 강조해왔다면 보험광고는 고객과 더 다정다감한지의 싸움입니다. 누가 더 친하고, 누가 더 아낄 수 있는 지에 대한 이미지 싸움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가족을 소재로 하는 것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색다른 소재와 컨셉으로 시장을 뒤집을 풍운아가 나오면 어떨까라는 기대도 해봄 직할 것 같습니다.



북한 붕괴가 남북 통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세계를 이해하는 길은 그 세계의 밖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전공이 북한학인 필자는 이 말에 적극 동의한다. 북한을 이해하는 길은 북한 밖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을 이해하는 길은 한국 밖에, 남북을 이해하는 길은 한반도 밖에 놓여있다. 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진 이후에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이 더욱 객관화되고 정밀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특히 북한 붕괴와 관한 이야기가 넘실대는 최근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에 더욱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의 탈북을 시작으로 ‘북한 위기론’이 온 사회를 휩쓸고 있다.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적극 독려하는 발언을 했고, 북한은 발끈하여 헛소리 하지 말라는 무지막지한 발언을 내놓았다. 그 이전에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위기론을 기정사실화하듯 김정은 위원장에게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말했고, 북한은 “죽을 날이나 기다려라”고 대답했다. 국가 수반 사이의 외교적 발언이라고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발언들이 오가고 있다. 최근에 한국 당국은 북한에서의 대규모 탈북에 대비한 탈북민 캠프를 설치하는 구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태영호 탈북 이후 '북한 고위층 탈북'이라며 북한 위기론이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이 실제로 위기에 처해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북한의 위기’라는 담론 이면에 숨겨져 있는 한 줄기의 사유를 파헤쳐야 한다. 북한 위기론은 하나의 강력한 사유체계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데, “북한 붕괴는 곧 통일”이라는 사고방식이 그것이다. 사실일까? “북한 붕괴는 곧 통일”이라는 명제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판단해볼 수 있다.

 

1. ‘위기’, '급변사태', '붕괴', ‘통일’은 딱히 상통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짚어두어야 할 것은 북한의 ‘위기’, '급변사태', '붕괴', ‘통일’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기는 급변사태로 이어진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붕괴로 이어진다’, ‘북한의 붕괴는 통일로 이어진다’는 명제는 단언컨대 단 하나도 성립되지 못한다.


제재, 도발 등의 방법으로 북한을 자극하면 필연적으로 북한 내부에 어떤 형식으로든 통제가 어려운 위기 및 급변사태가 발생하고, 이는 국가의 붕괴로 이어지며, 남한 주도의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붕괴통일론의 핵심이다. 또한 이것이 북한 위기론의 기저에 깔려있다.


그러나 급변사태는 말 그대로 급변사태일 뿐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북한에 닥친 위기가 급변사태로 이어진 경우는 굳이 꼽아봐야 90년대 말의 ‘고난의 행군’ 시기밖에 없으며, 그것조차 붕괴로 이어지도록 하지 않았던 것이 북한의 시스템이다.


북한 고난의 행군 시기 MBC 보도



고난의 행군이야말로 붕괴로 이어질 개연성을 가장 크게 갖춘 사태였는데, 당시 많은 주민이 아사했고, 북한의 국가 시스템은 깡그리 붕괴했으며, 이에 최고 고위층이었던 황장엽을 포함한 대규모 탈북사태, 대규모 작업장 이탈, 극심해진 지역차별 등의 상황이 닥쳤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북한이 당연히, 정말 당연히 멸망하리라 예상하고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 장마당을 개설하고 이를 발전시켰으며, 국법보다는 주민 자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비성문적 법칙을 만들어나갔다. 북한 정부는 장마당을 허용하고,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였으며, 이 사태를 '고난의 행군'이라 명명하며 인민의 이해와 인내를 이끌어냈다(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칭하는 용어다). 한 국가가 멸망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급변사태가 북한에서는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관련 글: 근거 없는 '북한 붕괴론'이 위험한 이유)


설령 어떤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때, 붕괴되는 것이 단순히 국가라고 할 수도 없다. 붕괴는 단순히 ‘국가붕괴’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주의 체제나 주체사상의 몰락인 '체제붕괴', 혹은 김씨 일가의 몰락으로서의 '정권 붕괴'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가령 쿠데타라는 급변사태가 닥쳤을 때,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생존을 한국이나 미국에 맡기기보단 중국이나 러시아에 의존하고자 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쿠데타 세력이 고위층일 경우 지금까지 북한에서 일어났던 인권탄압의 책임을 한국이나 미국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쿠데타 세력이 민중이라고 하더라도, 남북관계가 파탄나고 북중관계만 살아있는 오늘날 중국보다 한국이 매력적일 이유는 하등 없다.


쿠데타 세력이 김씨 일가를 몰아낸다고 하더라도, 덩샤오핑과 같이 자기식 자본주의를 개발하거나, 소련 이후의 러시아처럼 기존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해체하고 북한 지역에 새 국가를 선포할 수도 있다. 국제적으로 정권붕괴 혹은 체제붕괴 시 타국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으며, 국가붕괴 시에는 북한 주민들이 제3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높다.


2. 국제사회는 북한 붕괴 이후의 남북통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실제적 붕괴를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붕괴 국면에서 미국, 중국 등 강대국을 제치고 한국이 끼어들 틈은 없다. 중국과 러시아는 결코 위기에 빠진 북한이 이후에 한미일 세력에 포섭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미국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깡그리 무시한 채 북한을 집어삼키려 할 수 없다. 현상유지적 안정을 꾀하는 국제사회가 남북통일을 도울 이유도 전혀 없다. 냉정해지자. 북한 붕괴 시 한국 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희망적 사고에 불과하다.


특히 중국의 존재감이 위압적이다.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은 또 한 번 그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주체’ 정신을 버리고 중국에 의존하기 시작했다(이 때 중국의 간섭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 ‘핵’이다. 1차 핵실험 이후 김정일은 ‘이제 중국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에 지원을 하지 않으면 북한은 저절로 위태로워지고, 고난의 행군과 같은 새로운 급변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국제사회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가하면 할수록 북한은 중국을 향한 문을 더 활짝 열어갔다.


10일 북한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손을 잡은 채 팔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남북관계가 파행을 시작한 2008년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북한의 대외 교역량 중 대중 교역량이 90%에 가깝다. 뿐만 아니라 위화도, 황금평 등의 땅과 각종 자원에 대한 채굴권을 중국에 팔고, 서해 어업권은 물론 동해 어업권까지 중국에 판매했으며, 창지투 개발지구와 같은 북중 협력을 강화하고, 심지어는 나진항을 중국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내어주기까지 하며 북중경협을 공고히 하고 있다. 최근 중국이 동북3성을 개발하는 점을 적극 이용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북한이 붕괴했을 때 북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가장 크게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이다. 또한 중국은 한국보다 많은 사업자를 북한에 보내고 있는데, 중국이 ‘북한 내 중국인을 보호한다’는 식의 명분으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주장할 때, 한국이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은 무엇이 있는가? 남북 간 합의서 따위는 지금까지 다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중국의 ‘자국민 보호’ 명분 앞에 한국이 ‘원 코리아’ 따위를 주장한다 해도 이 추상적인 개념을 과연 어느 나라가 인정할 것인가? 개성공단이 폐쇄된 이후에는 북한에 대해 우리가 주장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만약 북한이 완전히 붕괴되어 무정부상태가 되더라도 중국은 북한이 스스로 제3국을 건설할 수 있도록 돕거나 분할신탁통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북한이 급변사태를 맞이하거나 붕괴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북한이 중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위험이 있고, 1,400km에 달하는 북중 국경선을 통한 대규모 탈북사태로 중국 동북3성의 질서가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 특히 대량탈북 사태는 탈북민의 난민 지위 문제로 다시 한 번 중국을 곤욕스럽게 할 것임은 물론 북한 주민-탈북민-조선족을 끈끈하게 묶어 조선족발(發) 분리주의를 촉발시킬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중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를 막으려 할 것이다. 


또한 중국은 북한과 유일하게 군사 동맹을 맺고 있으므로, 북한이 붕괴할 경우 북한에 군사적 진입을 할 수 있는 누구보다 강한 권한과 명분을 가지고 있다. 신빙성은 미약하나, 북한 급변사태 시 군사를 투입해 남포와 함남 이북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해 통제하겠다는 '병아리 작전'의 존재가 알려진 적이 있으며,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에 대비하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물론 중국은 내정 불간섭의 원칙을 가장 중시하는 나라이므로 이와 같은 걱정은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이나 한국이 북한 지역에의 권리를 마음껏 주장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리도 만무하다. 중국에게 북한은 순치관계에 있는 국가이자 미국에 대한 압박 카드로서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국가다. 중국은 북한이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최근 미사일이나 북핵문제와 관련해 북한을 압박하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동조하고는 있지만, 군사적 대립관계가 경제적 협력관계와 큰 연관이 없는 점, 그리고 이미 언급했듯 중국이 정말 필요로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안보-경협을 분리해서 접근할 것이다. 


미국 또한 위와 같은 상황을 염두하여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 수준 이상 펴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면서도 한국과 군사작전 계획을 세울 때엔 핵무기 등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통제권만 가지고 통일이나 북한에 대한 진군 등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속내를 반영하는 것이다.


기실 북한이 석유나 천연자원을 다량 보유한 국가였다면, 북한은 미국의 공격과 점령에 이미 망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한국만 필요할 뿐, 구태여 남북통일을 이끌어 중·러와의 관계를 꼬아버리고자 하지 않는다.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통제권만 가질 수 있다면 문제덩어리인 북한이 어떻게 되든 관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 오늘날 북한붕괴통일의 끝은 재앙이다




최근 최승호 기자가 연출을 맡은 <자백>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박근혜 정부 하의 국정원에서 기획한 탈북민 간첩조작사건을 담은 영화다. ‘먼저 온 미래’라고 불리는 탈북민들, 그들이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단면을 짐작해볼 수 있게 한다.


지금조차 이러할진대, 통일 이후 남북 주민 간 화합을 기대하는 일은 허황된 꿈이다. ‘종북’, ‘빨갱이’에 대한 위기의식이 만연한 한국사회에 이북 출신의 진짜 빨갱이가 대거 남하한다면? ‘종북’ 수준이 아닌 ‘북’ 그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북한 주민들에게 무조건적인 변화와 순응, 그것이 아니면 퇴출을 요구할 것인가? 이것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제국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순응이 아니면 죽음을.” 영화 <밀정>에서 데라우치 총독이 식민지 조선인에게 말했다고 소개된 말이다. 이에 북한 주민들이 남한의 고압적인 태도에 못이겨 “분리독립하자”고 주장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디 감히?”라고 말하며 총칼을 들이밀 것인가?


‘북한 위기론’ 기저에 있는 ‘붕괴통일론’에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우리들의 뿌리깊은 선민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승리한 대한민국과 실패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승패의 구조에서 패자인 북한은 승자 남한의 경험을 그대로 전수받아야하며, 그 과정에서 불만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1948년 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한 우리도 87년에 민주적 절차성만을 간신히 갖췄다. 자그마치 4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그조차도 반성이 많다). 독일은 통일 전부터 남북보다 더욱 전향적인 평등주의를 추구했지만, 통일 후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동서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을까? 지금 갑자기 통일이 된 한반도,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을까?


러시아가 일본에 제안한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장 계획 ⓒ한겨레신문



지금까지 통일 편익으로 제시되었던 수많은 근거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열차다. 통일 한반도에서 서울에서 파리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매력적인 통일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남북 경색 국면이 지속되자,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반도를 우회하여 쿠릴열도를 거쳐 도쿄로 이을 구상을 내비치고 있다.


세계는 점차 화합해가는데, 한반도가 버려지고 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통일도 되기 전에 통일편익이 사라지고 있다. 북한 위기 및 붕괴가 통일로 이어질거란 막연한 희망 속에서, 통일의 희망은 점차 시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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