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젠가의 겨울과 여름을 생각하며




어쩌다보니 5번째 선거판에 직‧간접적으로 발을 담그고 있다. 심지어 3년을 연달아 치른 선거에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표를 받았다. 선거라는 영역을 단순한 승패의 문제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길 것으로 생각되는 캠프라는 소속감은 구성원들을 한껏 북돋았고, 나 역시 그런 분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즐기는 구성원들, 열정적인 후보, 여러 정치적 상황이 맞물려 내가 속한 캠프는 물론 여당은 예상보다 더 압도적인 결과표를 받을 수 있었다. 


문득 몹시 추웠던 2012년의 겨울, 내가 서 있던 그 광화문 광장이 떠올랐다. 환호하는 사람들이 바다처럼 너울거렸고, 모두가 후보의 이름을 연호했으며,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있음을 그 어떤 때보다 뜨겁게 느낀 겨울이었다. 비록 지지했던 후보는 당선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 정부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제 역할을 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겨울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어느 식당에서 부둥켜안고 울었고, 누군가는 알 수 없는 상실감에 밤새 술을 마셨다는 그런 기억의 단편이 남아있는 계절이었다. 함께 나눈 즐거움의 크기만큼이나 상실감과 괴로움의 크기도 큰 그 겨울은 그렇게 지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의 시계는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렸다.


우리는 그 해 여름부터 국정교과서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웠고,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추적했으며, 마침내 촛불로 가득한 뜨거운 겨울을 광화문에서 다시 맞이해야만 했다. 정말 많은 이상한 일이 있었던 2015년이었고, 그 해답을 찾아가던 2016년이 있었으며, 또 다른 시작점이 된 2017년이었다. 간혹 이 시간을 기억하는 누군가와 함께 우리가 다른 곳에 있었어도 이처럼 뜨거울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곤 한다. 결론은 대개 비슷하다. 다른 모습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의 걸음은 왠지 같은 방향을 향했을 것이라는 것.



△ 투표함에서 쏟아지는 투표 용지들 (사진 - 뉴시스)



새내기의 시선으로 보는 선거의 흔적


선거는 흔적을 남기기가 참 어려운 영역이다. 어느 캠프에 속해 있던 깊숙이 개입할수록 표면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것들은 수면 아래로 묻어둘 수밖에 없다. 또한 캠프마다 스타일이 다르기에 그동안 봐왔던 몇 번의 선거판으로 일반화시키기가 어렵고, 언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나의 경우는 비슷한 연령대 가운데에서는 적지 않은 선거경력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작 몇 번의 선거를 겪어본 새내기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새내기의 시선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작업이라 간단하게나마 이번 선거에 대한 단상 몇 가지를 남겨보려고 한다.



파이가 클수록 정작 내 파이는 더 찾기 힘들다


학창시절 제일 좋아했던 과목은 정치였다. 어떤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그 학문 자체가 흥미로웠다. 먼 고대부터 시작된 이상적인 토의의 장, 정치적 이론과 학설들, 선구안을 가진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학문으로서의 정치와는 여러 면에서 다르고 덜 매력적인 부분도 많았다.


이론적으로는 전문성을 갖춘 대표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가 모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일임하는 것이 ‘정치’이지만 정작 이렇게 하고 있는 대표는 몇이나 되는지 그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이번 선거는 ‘지방선거’로 그 어느 때보다 후보도, 당도 많은 선거여서 이 아쉬움은 더욱 컸다.



 지방선거 후보자 공보물을 정리하는 선관위 직원들(사진 - 뉴시스)


아주 단적인 예로, 이번 선거에서는 지자체 장을 뽑을 선거를 제외하고는 나조차도 우리 동네를 대표해 나온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출퇴근길에 바닥에 떨어진 명함과 어딘가에 붙은 현수막 속 사진을 보며 저 사람이 후보겠거니 생각한 것이 다였다. 선거운동 기간이 짧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선거에 비해 정보가 너무 적었다. 그 뿐 아니라 당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한 공약을 내걸어 후보별의 특색을 찾기도 어려웠다.


특히 구‧시‧군의회의원 선거의 경우는 블로그나 SNS를 활용하지 않는 후보도 많아 공보물에만 의존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블로그나 SNS를 사용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관리해오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특히 초선의 경우 대체적으로 선거를 대비해 신설한다) 온라인을 통해서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어려웠다.


이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관할하는 지역이 크지 않아 직접 돌아다니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후보들의 연령대가 높다는 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각 정당에서 공천 면접 시 그 어느 때보다 청년과 여성을 우대해주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선인들의 연령대는 생각보다 더 높았다.


실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서울특별시의 구‧시‧군의회의원 당선인 통계를 대표적으로 살펴본 결과 전체 당선인 369명 가운데 가장 많은 연령대는 50.7%(187명)를 차지한 50대였으며, 60대 이상 당선인은 26.3%(97명)였다. 50대 이상 당선인은 무려 77%(284명)인 반면 30대 미만은 0.5%(2명)였고, 30대의 경우는 8.4%(31명)에 불과했다.


물론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열정적인 의정활동을 펼쳐왔고, 펼쳐갈 당선자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많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프라인에만 한정될 경우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의정활동 정보를 접할 수 없고, 당선자들 또한 이들의 의견 수렴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분을 감안한 것인지 각 구‧시‧군의회의 홈페이지에는 의원들의 개인 연락처를 공개해놓고 있다. 명시된 것이 업무용 연락처일지라도 직접 연락하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고,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의정활동을 확인할 수 있어 유권자들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의 공간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홈페이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발언, 의안발의 등 기본적인 의정활동만 관리되더라도 좀 더 촘촘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그래도 특정한 당의 후보자가 되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후보로 확정되면 선관위에 의무적으로 재산, 병역 등 각종 내용을 신고해야 하고 공보물도 제출해야하기 때문에 유권자는 이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최소한의 1차 필터링이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그 앞전의 공천과 경선 과정이다. 당에서 심사하는 공천의 경우 유권자는 물론 당원에게도 공천의 심사내용은 공개되지 않는다. 물론 공천 대상자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소 어떤 사람들이 공천 심사대상이 되었는지 일반 유권자는 물론 대다수의 당원이 약력조차 알 수 없다. 공천을 통해 경선을 거칠 후보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다. 당원의 경우 경선 투표에 참여할 수 있으니 ARS에 녹음된 몇 개의 약력을 들을 수 있어 미당원인 유권자들보다 약간 낫긴 하지만, 몇 개의 약력으로 그 사람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니 1차 필터링이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번 선거의 투표율이 높았던 만큼 유권자들과 당원들의 관심이 높았지만 이에 비해 시스템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 않았나 싶다. 파이가 커졌음에도 오히려 내 파이를 찾아먹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크고 많을 거라던 내 아름다운 파이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굿바이 지선②에서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한민국 청년연설대전 연습 과정에서였다. 금빛 머리카락을 갖고 있던 그녀의 첫인상은 매우 밝아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그 반짝거림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지난 6년간 나이를 먹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이를 먹지 못했습니다.” 


2012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14년간 동경하며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연예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그녀를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밥을 먹고 영화도 보고 연인이면 할 법한 것들을 했다. 그녀는 그와 자신이 연인이 된 줄 알았지만, 그는 그녀의 입이 너무 가벼워서 문제라며 입단속 후 돈을 줬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그 돈을 돌려줬고 그렇게 그와 연락이 끊겼다. 


14년을 믿어오고 동경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연락이 끊기자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랑인지 폭력인지 가늠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해서 흘러갔고 그렇게 두 번의 자살시도가 있었다. 한동안은 정신과 병동 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렇게 6년이 흘렀다.


“왜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 생각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죽이고 되살려 놓고 용서를 받고 다시 죽이고 애걸하고 울고 웃고 죽고 죽고 또 죽었습니다.”


연설 연습을 끝마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로 그녀는 말을 하며 펑펑 울었다. 굵은 눈물이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고 부축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힘들어 보였다. 연습을 마친 그녀는 대회 날에는 울지 않을 거라며 참가자들에게 말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종료됐다. 



2018년 5월 26일, 청년연설대전 본선 무대에 오른 그녀


그 후, 연설대전 행사에서 그녀를 만났다. 검은색의 차분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앞선 참가자들의 연설을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복잡할 듯하여 쉬는 시간에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녀 뒤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참가자 중에는 ‘방관도 폭력이다. 우리도 페미니즘을 배우자!’라는 주제로 연설한 남성분이 있었다. 그런데 그분의 연설이 마음에 안 들었다며 훈계를 하는 잔소리꾼이 등장한 것이다. 미투 운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연설자에게 강요하던 잔소리꾼이 말했다.


“아니 그러면 옛날 케케묵은 일들까지 다 꺼내 가지고 처벌을 하란 말이야? 그건 아니잖느냐~”


그녀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그녀가 연습 때 힘들어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래서 얼른 그녀 옆으로 뛰어가서 듣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곤 그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조금 떠들다 가겠지라는 생각에 그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도 부탁했다. 그러나 잔소리꾼의 말은 내가 사진을 세 장 찍고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피해자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못 한 채 날카로운 비수 같은 말들을 계속해서 내던졌다. 나는 잔소리꾼이 사라질 때까지 그녀에게 계속 말을 시켰다. 그렇게 길고 긴 쉬는 시간이 끝났고 잔소리꾼은 유유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냥 잊어버리고 살면 된다고 쉽게 말했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면서 겁도 없이 그 집에 찾아간 네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를 용서하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연설에 나선 그녀에게 옛날 일을 들춘다며 떠드는 이도 생겨버렸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김승섭(2017),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p.305


그녀는 지난 6년간 상처받은 이유에 대해 계속해서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그 되새김의 과정에서 요청하지 않았는데도 그녀를 혼내고 훈계하는 일들이 반복됐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발언하는 경향이 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그 침범들은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연설 중에 가슴에 새겨진 말들이 있었다. 


“피해자 여러분, 이유 없이 숨지 마십시오. 가해자 여러분, 비겁하게 숨지 마십시오. 그리고 피해 당사자와 가해 당사자를 제외한 여러분, 어떨 땐 가만히 들어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 


그녀는 연설을 마친 후 당당하게 걸어서 무대를 내려왔다. 고생했다며 힘껏 포옹해주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렇게 괜찮은 것처럼 보이던 그녀는 급히 대회장을 나갔다. 뒤따라가 보니 역시, 그 자리는 무척이나 힘든 자리였나 보다. 그녀는 화장실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이제 제대로 말을 했다며 연설 연습을 했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다. 

그때 그녀를 다독이던 다른 참가자가 말했다. “우리 언제 한 번 모여서 삼겹살 먹죠! 오늘처럼 딱 붙는 정장 말고 고무줄 바지 입고 말이에요!” 그 말은 그 순간에 정말로 적합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울고 있을 때 ‘왜 울고 있니’, ‘네가 잘못한건 아니야?’, ‘잊어버려’의 말보다 같이 삼겹살 먹자는 말이 훨씬 더 알차 보였다. 조만간 우린 고기를 먹을 것이고 그녀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가만히 들어줄 예정이다.   


* 그녀가 그 당시 상황을 부른 노래입니다.



 *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요즘 광고는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오는)’의 세상입니다. 뜬금없는 상황에서 브랜드가 등장합니다. 혹은 잘 만들어진 감정선을 과감히 깨고 반전을 연출하여 브랜드를 제시합니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상황이나 그 상황에서 제시된 브랜드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오히려 흥미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 흥미가 꼭 브랜드의 인지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찰나의 감정으로 브랜드가 묻히게 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광고는 개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뉴트로지나(2018)



 한 화장품 회사의 최근 바이럴 광고입니다. 어떠신가요. 가벼운 몸개그나 말장난으로 웃겨보려는 노력이 다분해 보입니다만,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2분이라는 시간 동안 애써 만든 스토리가 반전으로 인하여 허무해지고 초라해집니다. 

바이럴, 브랜드를 소비자로 하여금 친숙하게 그리고 널리 홍보할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광고입니다. 그래서 바이럴은 대중에게 인지가 쉽도록 만들어집니다. 이 광고에선 이해는 쉬웠지만 브랜드의 개연성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광고가 소비자와의 대화라면, 이는 논리 없이 말하는 실없는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스토리’의 위기


  ‘갑툭튀’와 함께, 지금 광고의 트렌드는 스토리가 현저하게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의 광고 기획에는 유효한 스토리를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제품 하나에 스토리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초코파이는 정(情)을 붙이기 위해, 수많은 스토리를 기획하고 이를 30년 넘게 집행해왔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광고는 오히려 입지가 줄었습니다. 미디어 소비는 이전보다 많아졌지만, 소비자에게 광고를 거를 수 있는 ‘선택’도 동시에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길면 잘 안 봅니다. 주어진 짧은 시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국 광고의 선택은 스토리는 줄이고, 더욱 자극적으로 변했습니다. 언어도 함축적인 단어보다 직관적인 단어를 씁니다. 생각할 시간은 적어지고, 잔상만 남는 광고가 되었습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G마켓(2017)


 이야기 없는 광고는 소비자와의 대화 통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위에 올라온 g마켓 광고는 다들 많이 보셨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세뇌입니다. 브랜드를 저렇게 주입식으로 암기하면, 아이돌의 후크송처럼 각인은 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뭐가 남을까요. 소비자가 생각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안이한 광고, 주입식으로 교육시키려는 불편한 메시지입니다. 제품은 제품 잘난 점만 이야기하다, 소비자는 연관성을 찾지 못하면 그냥 흘려보내게 됩니다.  

그래서 광고는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상품 자신의 설명은 내려놓고, 대중의 스토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중이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해주면 이내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성을 지배하는 좌뇌가 작동하지만 최종 의사 결정을 할 때에는 감성을 지배하는 우뇌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제품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 제품에 내재된 이야기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  p211 [광고 카피의 이론과 실제, 조병량 외]



결국 스토리가 이긴다.



박카스 (2017)



많은 광고들이 있지만, 이야기가 있는 광고는 기억에 남는 편입니다. 이야기가 있다는 광고라고 해서 어떤 드라마나 에피소드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박카스 광고를 꼽아보고 싶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박카스 광고는 하나씩 기억이 나실 겁니다. 박카스는 다른 제품보다 다양한 타깃 범위를 갖고 있습니다. 한 세대만 노릴 수 없다는 얘깁니다.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해하기 쉽도록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향을 택한 것입니다. 위의 광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웃픈 현실의 정곡을 찔렀습니다만, 도리어 스토리를 통하여 브랜드의 역할을 부각하여주었습니다. 어떤 브랜드 광고가 가족 이야기를 순수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꽤 긴 시간 동안 스토리에 대한 연구가 있었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마트(2017)



 ‘갑툭튀’의 홍수 속에도 스토리는 시대의 환경에 맞게 더욱 진화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광고의 이야기는 사람들에서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제품이 더욱 맞춤형으로 다양화되어가고 있는 만큼, 광고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마트는 어플이나 인터넷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마트인데요. 그런 브랜드 특성상 2030에게는 다른 마트들보다 더욱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주 타깃을 공략하기 위해, 그들의 인사이트에 대한 관찰을 많이 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타깃 인사이트, 즉 소비자의 실상과 심리를 꼼꼼하게 잘 분석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 하나로 공감을 건들어서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고, 브랜드와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적확한 분석이 큰 힘을 발휘한 것으로 풀이될 것 같습니다.


 팔리지 않으면 크리에이티브가 아니다는 광고계의 격언이 있습니다. 그 말 덕분에 공모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고 아등바등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크리에이티브 이전에 저는 우리 광고가 보고 있는 사람은 생각하고 집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소비자에게 생각하고 판단할 근거를 줘야, 광고 보고 진정한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난 177, 수많은 2차 가해에 시달리다 못한 후배가 죽었다. 후배의 페이스 북에는 자살의 징후가 가득했다. 산적한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바빠서 그냥 넘겨왔던 게 죽음으로 돌아왔다. 그 애의 사건을 일개 가십 취급하며 소비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성폭력을 화제거리 취급하며 실명이 궁금해서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질려버렸다. 온통 그 애가 당한 성폭력의 수위에만, 그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한 피해자 상에 부합하는가에만 관심이 쏠려있었다. 여러모로 악몽 같은 여름방학이었다.

 

오롯이 나를 좋아해주던 사람의 죽음이었다. 나를 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직접 지목한 진정인의 죽음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여러모로 내게 큰 상실이었다. 나는 그 애의 죽음과 마주하며 과연 앞으로 내가 성폭력 사건 자체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가해자가 사과문을 빙자한 입장문을 붙이고 나서 익명 커뮤니티 반응[사진=커뮤니티 캡처]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학내 익명커뮤니티에 만연한 수많은 2차 가해다. 후배가 생전 고통 받았던 사건 두 개 모두 2016년에 벌어진 일인데, 아직도 당시 익명 커뮤니티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때 익명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에게 왜 익명커뮤니티 시끄럽게 여기에 공론화 하고 난리냐는 반응과 가해자에 동조해서 적극적으로 2차 가해에 가담하는 반으로 갈려 시끄러웠다. 아무리 피해자 편을 들어도 너 피해자 본인이냐? 평소 행실 보니까 억울할 일도 없겠는데 왜 난리냐?’ 는 반응만 돌아왔던 당시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사람들은 익명 뒤에 숨어 그를 적극적으로 난도질했고, 그의 과 사람들은 피해자를 평소 행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하거나 혹자는 별 일 없었으면 과 회장까지 했을 인재의 스캔들을 안타까워했지만, 그마저도 익명커뮤니티의 분위기가 무서워 침묵해야만 했다.

 

결국 그 애에게 자기를 비난하는 익명 여론은 그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싸워주지 못했던 우리 모두와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해가 바뀌고 성소수자 모임 레인의 동아리 승격심사 과정에서 가해자의 친구가 또다시 2차가해를 했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타인을 자살 직전까지 몰아간 사람이 포함된 동아리의 진실성을 의심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시 본인의 사건이 수면 위로 올라와 괴로워하던 그 애는 결국 우리 모두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2차 가해에 대한 의문은 내 안에 남아 아직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20161학기에 있었던 성폭력사건 공론화 당시, 나는 가해자에게 쏟아지는 무분별한 비난을 경계했다. 이 공동체에 가해자에게 떳떳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가해자가 가해를 저지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묵인과 방조를 저질렀고, 성폭력문화에 문제제기하지 않는 우리로부터 성폭력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에는 내가 가진 생각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는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는 게 너무나 힘이 든다. 스스로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대자보를 쓰며 학교의 미온적 대처를 규탄하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 반성폭력 실천 모임 활동을 하던 그 애를 떠올리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까지도 2차 가해를 저지르며 떳떳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피진정인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이럴 때마다 나는 공허해진다. 이론과 함께하지 않는 실천은 공허한 실천이라는데, 나는 그런 공허한 실천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서글퍼지기도 한다.

 

2018년이 되고 미투 운동이 사회 각계에서 터지는 동안에도, 성공회대학교는 여전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들 틈에 수많은 성폭력이 벌어지고 묵인되고 사라진다.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학생사회를 마주할 때마다 그 애가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양예원 씨와 스튜디오 실장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세지를 볼 때마다 2016년 우리학교 익명 커뮤니티에서 가해자 입장대로 떠들어댔던 사람들의 차이점이 대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이 세상에는 아직 가해자의 말이 진실이요, 양 측의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는 양비론적인 말을 진리처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그 애를, 나를, 수많은 피해자들을 무너지게 했을 것이다.

 

성폭력에 의한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죽음을 선택한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타살자들을 마주하게 될까. 자신의 피해를 꾹꾹 눌러 적었던 그 애의 페이스북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며 괴로워하고 위안받았던 다른 학교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댓글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살아있을까? 부디 죽지 않았기를.

 

* 2차 가해/ 2차 피해에 대한 용어적 논의가 있지만 글을 쓸 당시 적었던 대로 2차 가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번 올림픽에 대해 어느 언론(“대회 운영 호평+흑자 올림픽, 흠잡을 데가 없다”, 스포츠 조선, 2.25일자)은 조직위의 저비용 고효율 정책덕분에 흑자 올림픽을 달성했다고 호평을 했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저비용 고효율에 대한 신화는 시장친화적인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각광받는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비용 고효율 개념은 필요한 시설인프라 구축을 방기하고 인건비를 최소화하는 식으로 시장레짐 하위 계층의 희생을 강요하는 시장 폭력의 개념으로 자주 변질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비용 고효율의 패러다임은 자원봉사자들이 감내해야했던 인간 이하의 처우를 시장의 이익으로 치환시키고, 이들의 희생을 흑자 달성이라는 성과로 은폐해 버리는데 일조하고 있다.

 

평창 올림픽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방한용품과 온수 공급부족, 부실한 급식, 근무지와 먼 숙소 배정 및 수송수단 미비)로 대회 직전 2천여명에 가까운 자원봉사자들이 이탈했다(출처: 네이버 tv 'JTBC 뉴스').

 

맑스는 '죽은 노동'(생산설비 등 비인격적 고정자본)살아있는 노동’(인간의 노동 및 그 산출물)의 착취를 통해 증식한다고 했지만 이번 올림픽의 열악한 대중교통 인프라는 그 죽은 노동조차 미비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저비용 고효율 달성을 위해 죽은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 양자 모두에 대한 삭감 및 착취는 이번 평창 올림픽 조직위의 초자본주의적’(Supercapitalism) 특색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조직위의 올림픽 운영 전반을 감독해야 할 문재인 정부가 과연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계속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게다가 이번 평창 올림픽을 흑자 올림픽이라고 내세우는 근거도 빈약하다. 올림픽 비용 14조원 중 고속철 등 인프라 구축에만 12조원이 들었는데 그 비용을 지방균형발전 차원에서의 국가 인프라 구축비용으로 간주하고 올림픽 지출 내역에서 자의적으로 누락시켜버렸다.

 

관광 인구 유입이 대폭 늘어 향후 큰 경제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기사 내용에서 여전히 사람이 아닌 돈이 먼저다식의 사고방식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애석하게도 이번 평창 올림픽의 바가지 요금 사례로 본 경악스러운 지역 이기주의는 향후 강원도 관광수입제고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따라서 올림픽 특수효과가 인지 인지는 장기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해봐야 할 문제이다.

 

효율성 강조와 꼰대 지수간의 상관관계

 

이번 올림픽에서 저비용 고효율의 패러다임은 비단 경제 논리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았다. 효율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종종 정치 영역에서 민주적 가치를 훼손하기도 한다.

 

시간 및 갈등 비용을 아낄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의견 수렴 과정을 생략하는 하향식 결정 방식에 대한 유혹은 민주 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커 보인다.

 

남북 단일팀의 추진 과정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일방적이었다. 이는 불통으로 일관하다 철저하게 몰락한 박근혜 정권을 뒤로 하고 소통을 강조하겠다고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가장 지양했어야 할 태도였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평화, 화합을 도모하는 지구촌 축제이다. 하지만 그 외형적인 평화가 누군가에 대한 일방적 희생 강요를 통해 내부 불만을 은폐시킴으로써 만들어진 평화라면 나는 그 평화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남북 단일팀의 대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이 갑작스레 대회 불참을 번복해서 시간이 없었다는 사정도 알고 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팀 추진 과정은 문재인 정부의 모토대로 공정하고 평등해야 했다.’ 무엇보다 일반 국민, 아니 최소한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 감독에게 먼저 의사를 타진했어야 했다.

 

만약 이런 기본적인 의견 수렴 과정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다면 아쉽지만 이번 남북 단일팀 논의는 애초에 포기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는 대의만을 앞세워 그대로 밀어붙였다.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자기들끼리 내부적으로 단일팀 추진 결정을 불가역적인 상수로 만들어버린 다음에 선수들에게 이해를 구하러 가는 웃지 못 할 촌극은 소통이 아니라 쇼통에 가깝다(출처: 뉴시스).

 

어차피 하위권 팀이고 국가가 지원해줬으니 국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 이건 또 무슨 중앙집권적 냄새나는 주장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모든 국민은 국가로부터 공공 서비스를 받고 있으니 국민의 처우와 권리에 대해 국가 마음대로 해도 된단 말인가? 모든 대학들은 정부 보조금을 받고 있으니 대학의 내부 행정과 교칙에 대해 국가 마음대로 개입해도 된단 말인가? 중앙정부 교부금을 받는 지자체는 어떠한가? 저런 논리라면 지방자치제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남북 단일팀은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불공정했고 국가 일방적이었다. 무엇보다 선수단에 대한 희생 강요를 전제로 했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할 여지조차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런 이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평창올림픽과 남북단일팀을 마냥 평화의 상징이라고 자화자찬할 수만은 없다. 남북평화의 대의를 존중할지라도 그 과정이 국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하위 집단의 일방적 희생에 의한 것이라면 이런 잘잘못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언론이 그 역할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수의 언론은 남북 단일팀의 과정은 다소 잡음이 있었을지라도 결과론적으로 해보니 좋지 않았느냐 식으로 유야무야 넘어가버린다.

 

이런 특성은 문 정부 주요 지지층과 현 정부 요직의 주를 이루는 586세대의 집단적 한계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보수정권 10년 동안 핍박받는 야당 지지층임을 호소하는 한편, ‘민주화 세대로서 자부심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이나 회사 등 조직 사회 안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일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체현하는 데 실패했다. 이들은 일사불란하지만 의사결정과정에서 여전히 경직적이고 권위적이기까지 하다.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내 말대로 해보니까 좋았으니 문제없잖아식의 마인드는 산업화 세대뿐 아니라 민주화 세대들의 사고방식에도 그대로 존재한다.

 

애석하게도 나 같은 2030세대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

 

2030세대가 남북 단일팀의 극적인 성사를 통해 감동받기 보다는 공정성과 불통을 문제 삼아 놀랐다는 청와대 참모들의 고백을 보고 나 역시 놀랐다. 소통 정부임을 자처하는 현 정부 참모들의 세대여론 파악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번 평창올림픽은 시장권력과 민족국가권력의 동맹을 통해 개인의 소외가 여실히 드러났다.

 

사람보다는 효율’, ‘개인보다는 민족적 대의’(남북평화)가 두드러졌다. 전자를 우파의 실책이라 하면 후자는 좌파의 전체주의적 한계를 보여준다. 둘 다 마찬가지로 수직적 권력구조 하에서 대회 종사자, 선수 개개인이 직면하는 소외현상을 눈여겨보지 않는 태도는 비슷하다.

 

효율의 가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간의 가치를 조금 더 존중해주는 따뜻한 시장논리’, 조금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정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난 8월 중순, 평소 문화재청 개혁을 외치던 문화평론가 출신 박물관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 벌금 300만 원과 추징금 105만 원을 선고받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평소 해외반출문화재 관련 시민운동 등을 전개했던 이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  서경덕 교수가 국가정보원 민간인 댓글 부대 연루 의혹에 휩싸이자 개인 SNS에 올린 해명 글, 현재 그의 SNS 계정은 삭제된 상태다.

 

 

그로부터 보름 뒤인 9월 초순엔 한국홍보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국가정보원 민간인 댓글 부대 연루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국정원 직원이 실적이 모자라 허위보고를 했다고 SNS상에 해명 글을 올렸다. 그러나 며칠 뒤 자필 서명된 국정원 영수증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고 돈을 받지 않았다던 서 교수는 국정원 영수증에 서명한 사실은 있으나 유네스코 한글 작품 전시를 위한 지원금이라고 해명하며 말을 번복했다.

 

 

소위 말하는 국뽕('국'가+히로'뽕'이 합쳐진 말이다. 국수주의 민족주의가 심하며 타민족에 배타적이고 자국만이 최고라고 여기는 행위나 사람을 일컫는다.)관련 일을 하고 있던 활동가들의 구설수에 오르자 그 전에 그들이 했던 운동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나오고 있다.

 

 

▲  1910년에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도록에 ‘이순신 장군이 항상 차고 다니던 칼’이라는 설명과

더불어 ‘쌍룡검’의 실제 모습이 담긴 사진이 담겨있다.(출처 : 문화재제자리찾기)

 

 

문화평론가 출신 박물관장은 2014년 8월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1910년에 조선미술대전에 보면 쌍룡검이라고 이순신 장군이 썼던 칼이라고 해서 한 쌍의 칼이 나오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63년도에 현충사에 있는 이 칼이 나올 때까지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없어진 칼이 63년도에 보물로 지정됐다”며 보물 326호 충무공 장검이 가짜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쌍룡검과 장검은 다른 칼이다. 당시 그가 다른 칼을 같은 칼로 혼동하여 보물로 지정된 장검을 가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 문제가 제기됐었다.

박물관 재직 시절엔 장애로 몸을 가누기 어려워서 특수제작 된 유모차를 탄 6살 아이에게 일반 유모차로 갈아타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다고 했고 이와 관련하여 ‘뇌 병변 1급이라고 얘기하셨잖아요. 그 장애어린이가 유물을 보나요?’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당시 그는 오프더레코드를 기자가 기사화했다고 해명했다.)

 

 

▲ 이영애가 재능기부하여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비빔밥 광고

 

 

 

서경덕 교수는 2013년 초, 이영애가 재능 기부하여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비빔밥 광고로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비빔밥 광고 하단부에 비빔밥 재료들을 설명하면서 한국어 ‘김’을 일본어 ‘노리’라고 표현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문제점을 지적받은 후에도 문구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 상해 빌보드 광고를 강행해 강도 높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 2014년 올해 가장 괴상한 광고라고 혹평받은 추신수 선수의 불고기 광고

 

 

2014년 초에는 추신수 선수의 불고기 광고가 등장하자 광고업계 전문지인 ADWEEK는 ‘올해 가장 괴상한 광고’라며 혹평했다. 한국 문화 블로그 운영자인 조 맥퍼슨은 칼럼을 통해 “(이 광고는)홍보의 대상이 외국인이 아니라는데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런 걸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며 비판했다.

 

▲ 군함도 관련 영상 광고에 등장하는 광부가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 밝혀져다. (사진출처 유튜브)

 

그 뒤로도 서 교수의 사소한 실수가 이어져 올 7월에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등장한 군함도 관련 영상 광고에 등장하는 광부가 군함도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알려져 사과한 바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실수는 왜 바로 잡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한국과 관련하여 일하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 사람들의 인식이 관대해져서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리고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면 ‘까임 방지권(타의 모범이 될만하거나 개념 있는 어떠한 일로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잘못을 저질러도 어느 정도 비난을 방지 받는 권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2015년, 세종 때 제작된 측우기가 영국 왕립과학박물관에 있다며 이것을 환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소식을 듣고 세종 때 제작된 측우기가 어떤 이유로 불법 반출됐는지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자가 일하는 문화재제자리찾기(해외로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로 측우기에 대한 질의가 계속 들어와서 조사해보니 영국 왕립과학박물관에 있던 측우기는 모조품이라는 사실이 5분 만에 밝혀졌다. 측우기가 모조품이라는 사실은 각종 블로그에도 심심하지 않게 올라가 있는 상황인데 자신이 본 것만 믿은 시민단체 관계자가 언론에 크게 떠들었던 것이다.

과거사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 한 번의 실수가 국익에 해를 끼칠 수도 있고 한 번의 실수로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2013년 3월 절도범에 의해 우리나라로 밀반입된 관세음보살좌상 회수 문제를 위해 한국의 시민단체가 대마도 관음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당시 약속도 잡지 않고 관음사를 방문하여 일본 우익 세력에게 ‘한국은 도둑질한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무례한 민족이다’라고 말할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그 후, 일본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한 시민단체의 활동이 제한당했다. 지금도 일본 측은 대마도 불상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어떤 문제도 언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2013년 한국 시민단체의 대마도 방문 사건은 성급한 판단 때문에 모든 시민운동가의 활동을 방해하여 일본에서 진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된 사건이다.

 

▲ 2012년 10월 11일, 판결직전 최봉태변호사가 개정표에 있는 사건명을 가리키고 있다.

 

 

2012년 10월 11일 오전 10시 30분,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법원은 한일협정 문서 완전 공개에 대해 ‘공개 판결’이라는 역사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100% 공개는 아니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공개하라는 판결이다. 당시 원고였던 최봉태 변호사는 2008년에 제소하여 4년이 걸려서 ‘공개 판결’을 받아냈었다.

 

 

2001년 1월 12일, 당시 미국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노근리 사건과 관련하여 유감 성명을 이끌어낸 사람도 있다. 노근리국제평화재단 정구도 이사장이다. 그는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각국의 대학생들에게 평화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국가를 위해 정말 좋은 일하는 것에 대해 칭찬할 때는 칭찬해야 한다. 그러나 실수가 있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관대하게 대하다 보면 더 큰 위기에 다다를 수도 있다. 지금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단순히 말로 떠들고 홍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더 평가받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진짜 싸워서 이긴 사람들을 평가해주어 그들이 더 힘을 내서 성과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문정왕후어보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반출된 지 66년 만의 일이다. 기자가 일하고 있는 종로구 사무실에서 대각선 거리로 국립고궁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 문정왕후어보가 와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찡했다. 창문 앞에서 고궁박물관을 향해 서 있다가 사무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아주 슬픈 음악에 참았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09년부터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을 시작했다. 드디어 그 결실을 보았는데 ‘시민단체’, ‘민간단체’라는 익명의 이름으로 그동안의 노력이 두루뭉술하게 처리된 것 같아서 너무 서러웠다. 기자가 입사했을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일본 궁내청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를 포함한 도서 1,205책을 반환받았을 때였다. 그 당시에도 문화재청은 ‘문화재제자리찾기’라는 이름을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넘겨버렸다. 그래서 입사하자마자 대표에게 처음 들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나라는 이순신 장군도 백의종군시킨 나라잖아.”

 

△ SNS에 담긴 사진, 이 사진 덕분에 많은 응원을 받았다.

 

그렇게 열심히 교육받았는데도 막상 당해보니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그 모습이 사진에 담겨 SNS에 퍼졌고 그 사진 한 장으로 엄청 많은 응원의 메시지를 받았다. 또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여 기사도 실렸는데 이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아 이 글을 쓰게 됐다.

 

기자가 그 날 고궁박물관을 바라보며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그동안에 받았던 모멸과 비웃음이 생각나서였다. 2016년 초,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민간단체 보조금 신청 면담을 하던 날이었다. 그때 앉아있던 심사위원이 기자에게 말했다.

 

“정부가 잘하고 있는 일을 시민단체에서 그만 좀 훼방 놓으세요!”

 

그렇게 2016년 민간단체 보조금 중 해외 출장비용이 전액 삭감됐다. 해외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를 찾는 단체에 해외 출장비용을 전액 삭감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겠다고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 정도 되면 2013년도부터 보조금을 받았던 단체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 전화가 올 법도 한데 재단 측은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해외에 출장 나가 있을 때는 너무 심하게 전화해서 제발 이메일로 정리해서 보내달라고 할 정도인 재단이었는데 말이다. 창밖을 보며 울다 보니 그 당시 심사를 보았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팀장님의 말도 떠올랐다.

 

“다른 단체는 보고서도 예쁘게 꾸며서 내던데 여기는 참 …….”

 

△ 당시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는 승복바지를 잃어버려 검은색 운동복 바지를 입고 협상장에 갔으며(왼쪽) 필자는 한복 속치마 레이스가 밖으로 튀어나온지도 모르고 협상장에 들어갔다.(오른쪽)

 

반환발표가 나던 날도 떠올랐다. 당시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승복바지를 잃어버려서 검은 운동복 바지를 입고 협상장에 갔고 기자 역시 한복 속치마의 레이스가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줄도 모르고 협상장에 들어갔다. 그만큼 협상 문서 이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던 날이었다. 그런 기자에게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린 작전을 안 짰잖아! 여기 괜히 온 거 같아. 우리 여기 왜 왔어?”

 

그런 모멸과 비웃음을 꾹 참으며 했던 운동이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이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언급되지 않고 ‘민간단체’, ‘시민단체’로 대충 넘어가 버렸고 그래서 그 날 창밖을 보며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9년간의 운동이어서 한 번도 그 과정을 통째로 이야기해본 적이 없기에 글로 남길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어떻게 하면 쉽게 문정왕후어보 반환 운동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 운동이 총 4개의 악장으로 이뤄진 교향곡 같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가기록보존소 출입증, 2011년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가 미국 국가기록보존소에 방문하여 <볼티모어 선>기사를 발견했다. 2012년 1월 28일까지 출입증을 사용할 수 있다고 표시돼있다.

 

1악장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로 논거 확충하기 시간이다. 어보가 불법 반출됐다는 미국 국무부 문서 확보 및 어보가 한국으로 반환돼야 한다는 법률적 근거를 정리했던 시간이다. 이 작업은 알려진 대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진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및 미국 내 불자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문정왕후어보 결의안 발의 기자회견, 국회 정론관에서 문정왕후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 발의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악장은 2013년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된 LA 카운티박물관과의 협상 과정이다. 이 때 문정왕후어보 반환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발의됐고(아쉽게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LA 카운티박물관과의 1,2차 협상 진행 및 LA 카운티슈퍼바이저 면담, 백악관 청원운동 ‘응답하라 오바마’ 등이 진행됐다. (LA카운티 박물관은 2013년 9월 19일 문정왕후어보 반환발표를 했다) 이때 안민석 국회의원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 면담, 2014년 당시 김진태 검찰총장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힘써줬다.

 

3악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7년 6월 30일까지다. 이때부터는 조선왕실 어보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받자는 운동을 2차례 진행했다.

2014년 4월 25일,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대한제국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인장 9점을 반환받게 한 작전명 ‘응답하라 오바마’를 1차로 진행했는데 당시에 문정왕후어보가 올 줄 알았으나 오지 못하여 다시 반환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 후 2017년 6월에 와서야 드디어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되어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오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미 수사공조 시스템을 활용해서 검찰총장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나아가 정상회담으로 문정왕후어보가 반환될 수 있도록 각별히 신경써주었다.

 

양주 회암사지, 문정왕후 사망 후 하루아침에 폐사가 됐다.

 

문화재환수 운동은 반환이 끝이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문정왕후어보가 돌아옴과 동시에 4악장을 시작했다. 기자는 남편과 아이와 함께 문정왕후어보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오던 지난 주말, 양주에 있는 회암사지를 찾았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8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열기로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무차대회를 3일 앞둔 4월 5일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 뒤 무차대회를 주최했던 보우스님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 극형에 처하게 되었고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화로 하루아침에 폐사됐다.

(* 무차대회 : 승려, 속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여 법문을 듣는 법회)

 

보스턴 미술관 라마탑형 사리구 방문조사 당시(2011년) 조계종 승려였던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가 회암사지에서 반출됐다고 추정되는 사리를 예경하고있다.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결정적 증거가 됐던 아델리아 홀 레코드(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에 의해 어보가 47과 약탈됐다는 미 국무부 문서)는 회암사 유물을 찾기 위해 미국 내 자료들을 조사하다가 발견한 기록이었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회암사지와 문정왕후의 인연이 가볍지 않다고 여겨 2015년 10월부터 문정왕후어보를 회암사지 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긴 호흡으로 3년 정도 앞을 내다보며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2건 더 있다. 이것은 시민단체만의 순수한 힘으로 해내기 위해 아직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 2015년 10월, 양주 회암사지에서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풍등 날리기 행사를 진행했다.

 

서럽게 울고 난 후 다시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직 문정왕후어보와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직 서운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교향곡이 끝나면 함께 고생한 모든 이에게 기립박수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한·미 양국 정부가 오는 6월 29일~ 30일 진행되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협의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문정왕후어보는 6.25전쟁 당시 약탈당한 문화재로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가 2013년 9월 19일 LA 카운티 박물관으로부터 반환 결정을 이끌어낸 문화재다.

 

 

 

▲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화재반환 포스터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4년과 2017년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문화재 반환운동을 두차례 전개했다.

 

시민단체,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어보 반환을 두 번째 이끌어내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문정왕후어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반환됐으면 좋겠다는 시민운동 'Fly to the 문'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 국무부 및 한국 외교부와 국무총리실 등에 관련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한국 외교부는 이에 관하여 6월 14일까지 답변을 하기로 하였으나 현재까지 답을 미루고 있는 상태다. 아마도 계속해서 미국 정부와 협의 중이기 때문인 것 같다.

문정왕후어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돌아온다면 시민단체가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문화재 반환을 이끌어 낸 두 번째 사례가 된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4년 4월 25일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을 반환하게 만든 단체다.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 역시 6.25전쟁 당시 분실된 문화재로 2013년 샌디에이고에서 압수된 문화재다.

 

 

 

▲ 문정왕후어보 반환은 시민단체의 승리 2013년 9월 20일 월스트리트저널은 "LACMA가 소장한 문정왕후 어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된 것은 한국 시민단체의 승리'라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외면하고 해외에서만 평가받은 시민단체의 문화재 환수운동
월스트리트 저널은 2013년 문정왕후 어보 반환 발표를 접한 뒤 "문정왕후어보 반환은 시민운동의 잠재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또한 국내 언론들도 문정왕후어보 반환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대한제국 국새를 포함한 조선왕실 인장 9점이 2014년 청와대에서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반환됐을 때도 국내 언론 역시 시민단체가 정상회담을 통해 문화재 반환을 성공시켰다며 주목하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만이 시민단체의 노력을 평가절하 한 채 공식문서에 한 차례도 단체의 이름을 명시하지 않았다. 민간이 주도하여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 정부는 문화재를 받아오는 통로가 되겠다며 '만관협력'을 강조하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그러나 민간이 주도하여 협상에 성공하면 민간단체는 배제된 채 모두 정부의 성과로 치부되는 것이 문화재환수 운동이다.

 

 

 

 

▲ 문정왕후어보 측면에 '六室大王大妃(육실대왕대비)'라고 흐리게 써진 묵서가 보인다.

 

정부의 무능과 무시는 언제까지 계속될까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LA 카운티 박물관과 1차 협상을 하던 날이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협상이 끝난 후 문정왕후어보를 살펴보다가 어보에 붙은 묵서를 발견했다. "六室大王大妃(육실대왕대비)", 종묘 6번째 방에 이 어보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글자가 쓰여 있던 것이다. LA 카운티 박물관 스테판 리틀 동아시아 부장은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문정왕후어보와 관련된 조사를 하였는데 왜 그때는 얘기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 점이 이상하여 안민석 국회의원이 LA 현지에서 한국으로 연락해 알아본 결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직원이 LA에 왔다가 어보 조사를 하지 않고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시애틀에 간 것이 확인됐다. 지금까지 이 직원의 업무 태반에 대한 징계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정부의 무능함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2014년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대한제국 국새 반환을 위해 검찰에 진정서를 냈을 때의 일이다. 이를 통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대한제국 국새의 반환이 차일피일 미뤄진 이유가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국새 및 압수 인장에 대한 감정 평가서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서가 오지 않으니 미국 내에서 반환을 위한 절차가 멈춰 있던 것이다.
이에 김진태 전 검찰총장의 지시로 관련 서류가 정리되었고 미국 메넨데즈 상원 의원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가열찬 시민운동이 진행되어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반환이 성사됐다.

 

 

 

▲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타종식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3년 8월 30일, 문정왕후어보 반환 기원 보신각종 타종식을 진행했다.

 

2014년 당시, 대한제국 국새와 함께 오기로 한 문정왕후어보의 반환이 늦어지자 2015년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한 번 더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어보가 반환되어야 한다며 다시 검찰총장을 면담하고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아쉽게도 당시에는 한미정상이 문정왕후어보의 조속반환을 합의하고 법무부 장관이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어보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2016년 문화재제자리찾기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민간단체보조금 지급을 신청하였으나 심사 면접에서 '정부가 잘하고 있는 일에 시민단체가 시끄럽게 하지말라.'며 문정왕후어보 반환 관련 보조금을 전액 삭감당했다. 2013년에도 문화재청이 문정왕후어보 반환에 관한 민간단체보조금을 천 만원 교부하기로 하였으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자체적으로 절반을 삭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16년부터 정부 보조금을 거부한 채 문화재 환수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 6월 9일, 문화재청은 문정왕후어보의 몰수절차가 완료 됐다며 수사절차 종결 합의서를 작성하고 문정왕후어보가 6월 말 즈음 돌아온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그 기사를 보며 너무도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시민단체의 노력은 한 줄도 서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문정왕후어보 수사절차 종결 2016년 6월 9일, 나선화 문화재청장이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국 이민관세청과 수사절차 종결에 합의했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청장이 합의서를 들고 찍은 사진을 보며 2013년 9월 20일, 문정왕후어보 반환 발표가 있던 다음날 새벽,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호텔 로비에 홀로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반환 결정이 난 날, 협상장에 올라가는 문서를 작성한 적도 없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가 공을 가로채려고 발악하는 모습을 보았기때문이다. 모두가 기뻐 할 줄 알았던 순간에 그런 모습을 보니 별별 다양한 감정이 교차되어 '나는 왜 이 운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무척이나 허망했던 기억이 있다.

2017년 6월 30일, 한미정상회담이 끝나면 대통령 전용기에 문정왕후어보가 함께 올 것이다. 대통령 전용기로 문정왕후어보가 한국에 오면 8월부터 고궁박물관에서 특별전을 한다고 한다.
만약 이번에도 정부가 시민단체를 외면한다면 민간단체에 의한 문화재환수운동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이미 정부의 외면덕분에 국내의 문화재환수운동가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가장 나이 어린 활동가(행정직 제외)라고 알고 있다. 필자가 이 일에 뛰어든지 6년이 다 돼 가는데도 그 뒤로 이 운동에 뛰어드는 젊은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 의한 문화재환수운동도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 마지막으로 문정왕후어보 반환을 위해 묵묵히 노력해준 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정부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영원히 잊힐 것 같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거리에서 백악관 청원을 위해 뛰어준 문화재제자리찾기 청소년연대(단장 신수진, 부단장 정경서)학생들과 아카데미 수료 학생들, LA에서 도와주신 정연진, 노태현 선생님, 문정왕후어보 소식을 발 빠르게 전해주신 뉴욕 뉴스로의 노창현 기자, 매넨데즈 상원위원에게 청원서를 제출해주신 제이크 정, 제니스 정 변호사 부부, 워싱턴 PNP포럼의 홍덕진 목사,하남에서 홀로 뛴 이영아 위원, 대전에서 도와주신 서진희 선생님, 번역을 도와준 최우수씨, 자선 콘서트를 열어준 아웃사이더, 협상 때마다 동행하여 도와준 안민석 국회의원, 시민단체의 요구에 흔쾌히 법률 처리를 도와준 김진태 전 검찰총장,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발견하여 어보들의 반환을 이끈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와 언급하지 않았지만 문화재제자리찾기 시민운동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전한다."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느냐 책 읽는 시간마저 허락이 안 됐던 올해 초, 아이가 잠든 사이 소파에 기대 숨소리 내지 않고 SNS를 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던 시간에 사진으로 올라온 <<82년생 김지영>>을 발견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이리 많은 사람이 읽을까 궁금했고 아이가 통잠을 자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자 드디어 나에게도 책장을 넘길 기회가 왔다.


▲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본인촬영)


‘이거 내 이야기인가?’

82년생 김지영 씨의 이야기는 87년생 나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현실은 심하면 더 심했지 절대 덜하지 않았다.

출장 프로젝트 건으로 수원의 한 식당에서 저녁 겸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상대측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냐 마느냐 선택하는 날이었다. 출국이 일주일 남은 상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주인은 상대측 인사의 친구라며 미팅 도중에 불쑥불쑥 방으로 들어왔다. 그냥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날계란과 소주를 들고 말이다.

식당주인은 맥주잔에 날계란을 넣고 남은 공간을 소주로 가득 채웠다. ‘저게 뭐하는 걸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앞에 맥주잔이 놓였다. 나는 날계란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며 한 번에 그 많은 소주를 마셔본 적도 없었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못 마시겠으면 거부해도 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왔고 그 자리에서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식당 주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어른이 타주는데 안 마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명령조의 말을 듣자 황당했다. 내가 왜 저 사람의 강요를 들어줘야 할까. 오늘 나의 미팅 상대는 저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다시 마시지 못하겠다고 했고 상대측 인사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시지 말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 식당 주인은 다시 한번 나에게 반말을 시작했다. “야, 빨리 마셔 안 죽어.”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중견 기업의 홍보부와 회식을 하게 된 김지영 씨. 홍보부 부장이 따라주는 술을 억지로 마시고 19금 유머까지 참아가며 자리를 지켰던 김지영 씨. 홍보부 부장이 대학생인 딸이 데리러 오라 했다며 자리를 일어나는 장면을 보며 했던 그 생각을 나도 그 날 날계란이 담긴 소주를 마시며 했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주변인 1이 되다.’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출산휴가만 쓰고 육아휴직은 건드려보지도 못한 채 아이를 두고 회사로 복직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퇴근 후 친정엄마 집에 맡긴 아이를 데리러 가면 아이가 나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 할머니와 둘만 공유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럴 때면 나는 외딴 섬에 홀로 갇힌 사람 같았고 아이에게 엄마가 아니라 그저 ‘주변인 1’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맘충이 되었다.’

‘주변인 1’을 벗어나기 위해 그나마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문화센터 가기였다. 그 날만큼은 아이와 신나게 놀아주는 날이었다. 조리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육아정보를 교류하는 날도 그 날이었다. 아기 띠를 매거나 유모차를 끌며 다니는 우리를 많은 사람이 지켜볼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루는 100일 된 둘째 아이를 데리고 조리원 친구들과 점심을 먹게 됐다. 뷔페식 식당에 자리 잡은 아이 셋과 엄마 셋. 다행히 아이는 잠들어있었고 오랜만에 맛있는 것을 먹을 생각에 엄마 셋은 들떠있었다.

그러나 접시에 음식을 담아 한 숟가락 먹자마자 지옥이 시작됐다. 내 아이는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울었고 다른 엄마 둘은 오뚝이처럼 아이가 깨지 않도록 몸을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기저귀를 다 갈고 오자 이번엔 다른 아이가 깨서 밥을 달라고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가 모유 수유를 마치고 오자 이번에는 또 다른 아이가 수유할 시간이 됐다. 엄마 셋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식당을 나왔는데 식당밖에 긴 줄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데려와서 자리를 오래 차지한 맘충이 됐다.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그저 맘충이 됐다. 1500원짜리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로 맘충이 된 김지영씨처럼 내 돈 내고 밥을 먹으러 들어갔는데 맘충이 돼 버렸다.

 

나는 분명 매일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점심시간, 나보다 2살 많은 85년생 주임님과 밥을 먹으며 <<82년생 김지영>> 이야기를 했다.


“주임님, 저는요. 택시 타기 전에 현금을 준비해야하는 제 모습이 싫어요. 남편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무슨 얘긴지 전혀 못 알아듣더라고요.”

“아휴, 연구원님. 현금만이 다예요? 물건이 무거워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달라고 하면 택시 기사가 투덜대서 결국 현금 내고 거스름돈을 포기해야 하잖아요.”


▲ 19대 대통령선거 후보자토론회 (SBS캡처)

 


지난 6차 대선 토론에서 유승민 후보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인구가족부를 신설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다. 이 소리를 듣고 지난 10년간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나는데 그에 따른 인식은 왜 제자리인가에 대한, 그러니까 내가 왜 82년생 김지영 씨처럼 살고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 같았다.

저출산 문제는 ‘아이를 낳으면 이것도 해주겠다 저것도 해주겠다’는 저출산만 생각하는 정책들로는 해결할 수 없다. 아이를 낳아도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여성가족부 폐지 견해를 들으며 더 안타까웠던 것은 여성가족부의 ‘여성’이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인구’라는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유승민 후보의 ‘인구가족부’ 신설과 같은 이야기는 행정자치부가 만들었던 저출산지도와 같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다음 정권이 더는 생물학적 차이를 ‘출산’이라는 단어로 묶어 차별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출산 문제가 여성만의 문제라는 인식이 사라질 때 저출산은 사라질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는 왜 기분이 우울한가에 대해 고민해봤다. 어쩌면 아무리 극복하려고 해도 극복되지 않은 사회 인식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82년생 김지영>>의 마지막 문장이 더더욱 가슴에 파고든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 내가 일할수록 내 아이는 정말 불쌍한 것일까?

 

▶ 출근 시간, 시간이 없어 감은 머리를 말리지도 못한 채 아이를 맡기러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있다. (본인남편촬영)

 

출산휴가가 끝나고 육아휴직에 돌입했다. 작은 비영리단체에 다니는데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대체 인력을 투입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많다. 휴직 기간 동안 내 업무를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급한 업무만 우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발로 밀어가며 했다. 우는 아이를 재우고 다시 일하고 다시 달래고 일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당연히 업무효율은 최악이었다. 애를 보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심신이 지쳤다. ‘차라리 출근하자!’고 외치며 2달간의 육아휴직을 종료하기로 선언했다.

 

출근을 결심하자 아파트 단지에 ‘0세아 전용 어린이집’이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첫째 아이에 이어 둘째 아이까지 친정엄마에게 맡기기엔 죄스러웠다. 그래서 현수막을 보자마자 입학 상담을 했다. 어린이집 상담 후 둘째 아이를 오전 8시 30분에 맡기고 오후 8시에 데려오기로 했다. 필요하면 토요일에도 아이를 맡길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 아이와 선생님이 적응할 필요가 있으니 출근 2주 전부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어린이집에 적응훈련을 보내기로 했다. 아이가 둘이어서 둘째 아이가 종일반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 주민센터에 가서 잘 알아보고 종일반으로 등록하라는 소리도 들었다.

 

다음 날 주민센터에 가서 알아보니 첫째 아이가 종일반에 다니기 때문에 둘째 아이가 종일반 등록을 할 수 없다 했다. 출산 휴가 및 육아휴직 동안 내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 둘 다 종일반 등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일을 쉬는 동안 첫째 아이가 종일반으로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둘째 아이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 했다.

방법은 하나, 맞벌이라는 것이 증명되면 오늘이라도 둘 다 종일반을 보낼 수 있다고 했다. 출근 날짜는 정해져 있고 어린이집에서는 종일반으로 등록하라고 했으니 난감했다. 종일반 등록을 해달라고 했던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 때문에 출근 직전 열흘 동안 종일반 등록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주민센터에서 담당자와 한참을 대화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육아휴직 급여를 열흘 치 포기하기로 했다. 어린이집 적응 기간을 위해 나는 서류상으로 정식 출근보다 열흘 일찍 출근한 것이 됐다.

 

이제 100일이 갓 지난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긴다 하니 이번에는 어린아이가 불쌍하다는 친척들의 비난이 들렸다. ‘아이는 엄마가 봐야 하는데……’라는 이야기를 첫째 때부터 꾸준히 3년간 듣고 있다. 내가 일을 하면 아이들이 불쌍한 존재가 되니 마음이 아팠다. 첫째 때보다 죄책감 지수가 10배는 되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는 단어로 몸부림치다 보니 복직하는 날이 돌아왔다. 준비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 보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더 심한 눈치 보기가 시작됐다.
입학 상담 당시 8시 30분에 아이를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8시 30분에 갔더니 ‘아이가 일찍 왔네요?’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 약속한 시간에 갔는데 일찍 왔다 하니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나 싶었다. 아이를 맡기며 오늘부터는 출근하기 때문에 오후 8시에 아이를 데리러 올 수 있다 했더니 아직 어린데 그렇게 늦게 오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어려서 걱정해서 하는 말이겠지 하면서도 어린이집에 눈치가 보였다. 점심시간에 친정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친정엄마가 첫째는 업고 둘째는 유모차에 태워서 오후 6시 30분에 대신 하원을 시켰다. 친정엄마에게 또 미안해졌다.

하루는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변을 못 봤다 하여 유산균을 챙겨 보냈다. 하루에 2~3포 먹었다 했더니 많이 먹는다는 답이 왔다. 권장량대로 먹이고 있는데 많이 먹는다는 답변이 오니 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분유 타줄 때 유산균 넣기 귀찮다는 뜻인가 하여 괜히 눈치가 보였다. 어린이집 선생님의 한 마디에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큰 뜻이 없는 이야기일 텐데 괜히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았다.

출근하는 날엔 아침에 아이를 맡기려니 머리를 말릴 시간도 없어 머리카락에 물이 뚝뚝 흐른 채로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아침마다 어깨가 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결국, 감기에 걸렸다. 아이에게 감기를 옮길까 전전긍긍했다. 머리도 못 말리고 출근한 내 자신이 또 원망스러웠다.

 

 

 

▶ 집에오면 본격적으로 집안일이 시작된다. (본인촬영)


일하는 도중에도 퇴근해서 아이 찾아올 생각만 들었다. 아이를 찾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부터 집안일이 시작됐다. 아이를 씻겨야 하고 먹여야 하고 재워야 한다. 아이가 자기 시작하면 아이 옷을 빨고 널고 개고 젖병을 소독해야 한다. 밤중 수유도 이어져서 24시간 쉴 시간이 없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올 6월까지 주 2회 출근 주 3회 재택근무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출근하는 날은 정말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전쟁이었다.    

다음 달 내 생일에 1박 2일로 혼자 동해바다 보러 여행 갈 테니 남편한테 아이를 좀 봐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운전도 못 하는데 혼자 보낼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3일 잘 버티다가도 4일째 되면 혼자 떠나고 싶고 다시 3일 잘 버티다가도 4일째 되면 또 혼자 떠나서 아이 울음소리 없는 푹신한 침대에서 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그런 상태로 매일 매일을 꾸역꾸역 버티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토요일에 출근해야 하는 일정이 잡힌 것이다. 첫째가 둘째만 안으면 울고불고 난리가 나서 친정엄마가 아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린이집 찬스를 반드시 써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아침에 아이를 맡기면서 어린이집 선생님께 토요일에도 아이를 맡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고 말씀드렸다. 당연히 될 거로 생각했는데 어렵다는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토요일에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알아봐 주겠다 했다. 그 날이었다. 아이를 데려와서 어린이집 가방을 열어보니 근로자의 날 등원 수요조사 종이가 왔다.

‘맙소사, 출근해야 하는데 이를 어쩌나!’ 혹시나 토요일에 아이를 맡아줄까 싶어 원래 출근해야 하는 요일임에도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에 가서 업무를 보자 했지만 이제 막 4개월이 돼가는 아이를 데리고 회사에 나갈 순 없었다. 토요일 등원만 손꼽으며 수요조사 종이에 근로자의 날 아이를 데리고 있겠다는 서명을 한 후 돌려보냈다. 그렇게 3일이 지났고 아이가 너무 어려서 토요일에 맡아줄 수 없으니 양해해달라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첫째를 친정엄마에게 맡길 땐 친정엄마 눈치만 보면 됐는데 둘째를 어린이집에 맡기니 이제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눈치까지 보게 됐다. 아이가 둘 이상 되는 맞벌이 가정들은 그동안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모르겠다. 

5월 징검다리 연휴를 보니 아찔하다. ‘2일과 4일에 임시 휴원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그나마 다행이다’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일하면 할수록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또 내가 일하면 할수록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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