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감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아니라고 느껴진 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공부는 안하고 대학을 가니 마니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 몰래 고액의 수학 과외를 신청하고, 자기를 부모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해도 좋다고 배수진을 쳤다. 가문 역사상 최대의 패륜아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갈 수밖에 없었다. 과외 첫 날,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낯설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초록색 표지판과 구부러진 가로등과, 색 바랜 횡단보도와 붉은 벽돌의 건물이 처음 보는 양 생소했다. 내 방이 마치 호텔방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나의 동네도, 나의 집도 아니었다. 


상실감 비슷한 것이었다. ‘여긴 우리 집이 아냐!’하는 단순한 반항심이 아니었고, ‘나만의 집을 가질 거야!’하는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생각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무언가가 무너진 느낌이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외 사건’ 이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고, 부모님과의 많은 대화도 있었다(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부모님의 힐난과 나의 저항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때만큼 부모님과 많이 소통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라는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는 식의 사유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원래도 질 낮은 개똥철학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지만, 급작스러웠던 그 날의 낯섦 이후로 개똥철학은 내 뇌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내게 삶의 근원이자 유일한 지지자이며 최후의 안식처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을 내 멋대로 그렇게 정해놓고는, 그에 따른 부모님의 역할을 내 멋대로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부모님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당에 도대체 내가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기나 할까? 차차 고개를 드는 의구심. 모든 것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꼭꼭 숨겨져 있는 진짜 사실들, 몰이해에 파묻힌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


▲  면허를 딴 뒤, 부모님 차를 몰래 타고 친구들과 자주 놀러갔었던 고향의 동해 바닷가.



이방인


사실 그냥 멘탈이 약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나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용인되는 압박을 주었던 것뿐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면 될 일이다. 그럼 지금의 나는 일상적인 고민과 일상적인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 이름난 대학교에서 지금과는 다른 공부를 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다. 그 때, 쓸데없이 낯설어하는 이상한 놈으로.


누구나, 여행을 가면 생각을 한다. 모든 게 새롭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워가는 것처럼 낯선 것들을 바라본다. 다만 어린아이와 여행자의 차이가 있다면, 어린아이와 달리 여행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이해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여행지는 어떤 유형의 내면화된 당위도 없는,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다. 여행자에게는 길을 잃을 자유가 있고, 따라서 좌절도, 희망도, 후회도, 기쁨도, 온전히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자는 본연의 자신과 마주하고, 자신의 힘과 소망에 따라 자라난다. 하지만 그런 만큼, 여행지에 마냥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도대체 이곳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그들의 환경과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밖에서 내 안으로 들어온 타당한 이유보다는, 차라리 내 안에서 만든 비합리적 변명이 나았다. 그야말로 나에게 최적화되어있고,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생각하고 바꿔나갈 수 있으니까. 게다가 내 안에서 만들어진 모든 논리가 밖에 떠도는 다른 것들보다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들과 너무 멀어진 내가 사회 부적응자처럼, 싸이코패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지금의 나를 부정할 순 없다. 그건 내가 이겨내야 할 또 다른 과제다. 


▲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는 영화 ‘Into The Wild’의 한 장면



“만일 지도가 지형과 다르다면, 지도가 잘못된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라면, 한 사람의 세계는 다른 누군가의 세계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지도도 같을 수 없다. 분명히 길이라고 되어있는데 높은 절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과감하게 지도가 틀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만들어야 한다. 미련하게 ‘여기가 길이라고 했는데!’하면서 우왕좌왕하지 않아야 한다. 지도를 고치든, 절벽을 길로 만들어버리든, 선택과 책임은 각자의 몫이다. 


모두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간다.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다들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을 위해 열심히 고민했고, 또 다른 생각을 가지기 위해 현실의 공간과 정신의 공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내게 그 과정은 때로는 즐거웠지만, 때로는 고통스러웠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이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고통스럽게 살아왔음을 안다. 나와 생각을 같이 하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든 관계없이. 그렇기 때문에 내게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면, 우리 모두는 위대하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위대함으로 인해서, 나는 기껏해야 타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을 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다른 누구와 공감하든 그를 비난하든, 그 이전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서사를 존중한다. 하지만 위대성이 곧 존중의 필요성과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가 존중을 모른다면, 비록 그가 위대한 개인이라고 할지언정, 나 또한 그를 존중하지 않는다. 꼭 존중을 받고 싶은 것은 아니다. 구태여 존중받지 않아도 좋다. 나를 존중하고 말고는 타인의 몫이니까. 그러나 내 서사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쓰이는 것은 싫다. 그러니 내게 무슨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지 말길. 내 지도는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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