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없음. 추후에 영화를 볼 예정이라면 마음 놓고 읽어도 무방함 ※)

 

*글을 쓰는 두 번째 자세

 

장수상회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굉장히 많은 생각들이 중첩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볼 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기도 했다. 물론 울지는 않았다. 그래도 눈가는 아마 미세하게 떨렸을지도 모른다. 가족 영화는 그래서 불편하다. 감정이 담긴 통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만드니까. 나와는 대조적으로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웃었고, 울었으며 웃었다. 감정이 참 솔직한 친구다. 엔딩 크레딧을 응시하던 그는 이제 갓 1년 정도 지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이 많이 났을만한 그 영화를 보며 괜찮다, 라고 했다. 정말 괜찮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게 물든 코를 보니 문득 그의 조모상에서 본 그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그가 그런 코를 한 채로 와 줘서 고맙다고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장수상회를 보고 나서 나는 문득 그와 내가 만난 장면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영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묘한 영화.

 

지금 아마 첫 문단을 보며 ‘어, 지난번하고는 좀 다른데.’하고 몇몇은 생각했을 법하다. 그리고 글쓴이가 그 사람이 맞는지도 다시 한 번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실 나는 이런 감성적인 글을 지향하는 인간이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영화를 볼 때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하지만. 나는 영화를 고를 때에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고르고, 평가하는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각기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아 입고, 그 스타일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그 영화에 맞는 글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지난번에 투고한 영화 <화장>에 관한 글은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나는 꽤나 진지체로 그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삶과 죽음에 관한 글은 가벼울 수는 없는 이야기니까 나는 나름대로 그 글의 스타일에 만족했다. 물론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다른 의견이 있다면 겸허하게 수용한다. 그러나 맨날 같은 옷을 입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한 번은 클래식하게, 한 번은 캐주얼하게 글을 코디할 예정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 연습의 일환이라고 보면 되겠다.

 


* 눈이 가는 노년의 로맨스, 성칠-금님 커플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서, 영화를 보고 빠른 시일 내로 글을 쓰겠다던 다짐과는 다르게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와중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름대로 많은 일들을 마무리했지만 이상하게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쉽게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뭔가 진지하게 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거운 영화는 아니었으며, 킬링, 힐링타임 만들고 오라고 추천할 정도로 가벼운 영화도 아니었다.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우리들의 삶,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들은 신파극의 성공 맛을 본 배급사가 또 찍어낸 릴레이 신파극, 너무 많은 것을 넣어서 실패한 영화라고도 평했으나 나로서는 감정선을 건드린 이 영화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장수상회에서 일하는 노인 성칠의 첫사랑이 이뤄질 수 있도록 마을 사람들이 도와준다는 내용이다. 물론 이면에는 성칠이 재개발에 찬성할 수 있도록 금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미인계를 쓰는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 주축은 성칠의 러브스토리다. 아마 이 점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의문을 남겼을 법하다. 보통 러브스토리라고 하면 젊은 층의 소유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매체에서 등장하는 젊은 청년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포장되는 반면 중년이나 노년의 사랑은 불륜, 재산다툼, 새엄마 등과 같은 부정적인 키워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매체에서 이들의 사랑은 비밀스럽고, 은근하게 다뤄진다. 하물며 가장 끝 부분에 위치한 노년의 로맨스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물론 아닌 경우를 배제할 수 없으나 많은 경우 그들의 로맨스는 ‘남사스럽다’라는 표현의 장벽에 막혀 적극적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대놓고 노년의 로맨스를 다룬다. 물론 그들의 사랑에 있어 걸림돌이 될 요소는 없다. 배우자가 없는 상태(금님의 경우)이거나 배우자가 한 번도 없었던 상태(성칠의 경우)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는 장애물이 없다. 자녀의 반발이 약간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이것은 잠시일 뿐 이들의 로맨스는 환대받는 느낌이 더 강하다. 실제로 감독은 한 매체에서 노년의 사랑을 다루는 영화가 걱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잘 안 쓰이는 소재가 될 것 같아 신선했다고 답했는데 그 답이 참 적절했다고 본다. 쉽게 볼 수 없는 것에는 보통 눈이 먼저 가기 마련이다. 쉽게 볼 수 없는 노년의 사랑이, 거기에다 영화의 주축을 이루는 소재로 나왔으니 눈이 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민성-아영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즐기는 성칠-금님 커플

 

그리고 사실 어느 세대든 사랑은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중년과 노년이 되어도 그들은 사랑할 때만큼은 다시 청년이 된다. 칠성 역시 마찬가지다. 까칠하고 꼿꼿한 70대의 노인이었던 그는 사랑을 하며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장수의 딸인 아영-민성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즐기며, 그는 본격적으로 노년의 로맨스를 시작한다. 노년의 로맨스는 관객의 눈길을 끄는데, 데이트 장면을 보면 성칠과 금님이라는 캐릭터에 다른 배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이상 적합한 배우는 아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무엇보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그 동안에는 미처 접하지 못했다는 것에 그 의외성이 있다. 성칠 역을 맡은 배우 박근형은 그동안 로맨틱한 노신사, 혹은 근엄한 노신사로 많이 등장해왔다. 최근에 등장했던 예능에서의 모습이나 드라마에서의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금님의 역할을 맡은 윤여정 또한 비슷한 입장이다. 그 동안 집안의 억척스러운 엄마, 가장에 순응하는 엄마와 같은 이미지로 등장해 로맨스물에 어울리는 인물인가에 대한 의문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웬걸, 두 사람의 케미는 정말 의외인 것처럼 느껴진다. 깐깐한 노인으로 변신을 시도했던 박근형은 영화 전반을 지나며 로맨틱한 노신사로 변해가고, 그 옆에서 금님은 더할 나위 없이 고운 여인이 된다. 그들의 데이트는 장수의 딸인 아영과 민성의 데이트만큼이나 싱그럽다. 로맨스가 청년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들의 데이트는 청춘이다.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성칠과 금님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감독은 인물 캐스팅을 하면서 성칠과 금님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의 캐스팅은 적중해서 그들의 모습을 본 관객들이라면 확실히 이 이상의 캐스팅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과정, 그 속에서의 이웃 그리고 가족

 

칠성이 로맨스를 시작하며 부드러워짐에 따라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도 점차 부드러워진다. 이런 그의 변화에 마을사람들은 칠성의 로맨스를 도우며 점점 하나로 뭉친다. 물론 여전히 이면에는 재개발 문제가 엮여있지만 뭐 어떤가. 어쨌든 그들의 조화로운 모습은 유쾌하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나타나며 관객을 웃음 짓게 만든다. 현실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그 친화되는 과정이 참 인상 깊었다. 무엇보다 인간적이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인간적, 얼마나 살가운 말인지 모르겠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같은 건물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현재적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예전에 살던 동네는 옆집, 뒷집 가족이 몇 명인지, 어느 집의 손주가 무슨 상을 탔는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이웃끼리 모여 집 앞에 돗자리를 펴놓고 수박을 쪼개 나눠먹기도 했다. 어디 먼 시골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시에 있었던 어느 동네의 이야기다. 그런 동네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참 반갑고, 친근하게만 느껴졌다. 그 중에서 누가 제일 친근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마트 직원인 제갈청수를 꼽고 싶다.(사실 자갈치라고 그를 지칭하고 싶다. 성칠은 그의 이름을 종종 까먹고 그를 자갈치라고 지칭했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목소리와 수다를 떠는 모습은 어디에나 있을법한 캐릭터이기도 했고, 그의 오지라퍼(오지랖을 떠는 사람)적 특성은 관객을 폭소하게 만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캐릭터가 오지라퍼였기 때문에 더욱 인간적이고, 매력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외의 인물들도 이웃으로 두고 싶을 만큼 친근하다. 성칠의 로맨스를 돕는 마트 사장 장수나, 성칠을 위해 손님의 양복을 몰래 빼서 다려주는 치수와 같은 인물은 얼마나 코믹하면서 인간적인가.

 

성칠과 금님의 만남을 응원하는 동네 사람들
(제갈청수는 왼쪽 상단부에서 두 번째 인물이다.)


이웃뿐만이 아니다. 장수와 장수의 딸인 아영, 금님과 민정과 같은 가족과 가족의 사이도 눈여겨봐야 한다. 가족들은 서로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간다. 진정한 가족이라는 게 사실 어려운 게 아니다. 가족이어도 개인과 개인인 ‘나’와 ‘나’로 이루어진 관계가 ‘나’와 ‘너’로 인정되는 관계이다. 이런 가족 친화적인 요소는 이 영화가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볼 만한 영화로 손색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더불어 이 인간적인 친화는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들에게까지도 물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면서 가족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가장 큰 이유도 가족 생각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다들 누군가를 떠올렸겠지만, 나는 성칠과 금님에 중점을 두고 보다 보니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한때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꼬장꼬장한 성칠과 닮아있던 외할머니는 세월이 흐르며 점차 작아지고 중이다. 한 성격 하던 때와는 달리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와 목소리가 작아짐에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이 작아지고, 그런 당신을 나는 가끔 외면하지는 않았나. 문득 처음에 언급했었던 붉은 코의 그가 말한 것이 생각났다. 며칠 전까지도 할머니가 그렇게 가실 줄 몰랐었다고, 더 오래 계실 줄 알았다고.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금님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그들의 로맨스를 반대하는 민정에게, ‘우리에겐 이런 게 마지막일 수도 있어.’라고. 어쩐지 그 말이 여운이 남는다. 물론 나는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총 횟수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더 늦게 전에 할머니에게 종종 연락을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장수가 아버지의 곁을 늘 지켰듯이, 장수의 딸 아영이 할아버지를 의지했듯이, 그렇게 할머니 일상의 부분인 것처럼. 더불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권유해본다. 내일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한 번 해보는 건 어떨지를.

 

* 스포일러를 할 수 없기에 비교적 가벼운 이야기로 대처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더불어 반전은 지켜달라는 장수씨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네이버영화

 

 

*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만남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영화 <화장>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주관적인 영화 감상을 즐기는 나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평에도 불구하고(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젊은 여성과의 불륜 영화로 착각하고 있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시사회 당첨 문자를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원작 단편이 들어있는 김훈의 <강산무진>의 구입이었는데, 보통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원작을 감상하던 나로서는 책을 먼저 읽고 간다는 것은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다른 단편보다 먼저 <화장>을 펴서 읽어 보았는데 소설은 담담하고, 깊은 맛을 내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의 표지는 고서를 생각나게 하는 황색이었고, 그 영향과 문장 때문인지 단편을 읽으며 잘 우러난 황차 한 잔이 계속 생각났다.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죽어가는 아내에 관련된 ‘화장(火葬)’과 젊은 여사원에 관련된 ‘화장(化粧)’에 대한 중년 남성의 시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단편을 읽고 나니 기대했던 고소한 황차의 느낌보다는 씁쓸한 황차의 느낌이 강했다. 약간의 먹먹함과 함께 죽음과 삶이라는 다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다가 영화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담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사회에서 감상한 영화 <화장>은 기대 이상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너무 충실한 나머지 일반 관객들은 밋밋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영화보다 소설 <화장>을 훨씬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영화와 소설이 보여준 두 가지 방식에 다 만족한다. 소설은 소설대로 텍스트와 장면을 상상하며 읽는 맛이 있었고, 영화는 영상미와 더불어 소설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상세한 내용까지 덧붙여서 다뤄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맛이 있었다. 유난히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많았고, 소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작은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다뤄지면서 나는 텍스트에서 느낀 먹먹함과는 또 다른 먹먹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다뤄지는 오 상무보다 영화에서 다뤄진 오 상무가 더 공감이 갔고, 왠지 모를 여운까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중점으로 뽑은 몇 가지 키워드로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려고 한다.

 


* 오 상무의 시선

 

[추은주를 응시하는 오 상무]


영화나 소설을 통틀어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 상무의 시선이었다. 삶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두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오 상무는 죽음의 가까운 삶을 사는 아내를 간호하며 화사한 추은주를 종종 응시한다. 누군가는 관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나는 오 상무의 이 시선을 응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응시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는 말 보다는 동경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선은 추은주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다소 감정적으로 변한다. 꿈과 환상 속에서 오 상무는 추은주를 응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시선과 태도로 그녀를 찾아다닌다. 물론 이것은 꿈과 환상 속일뿐 현실에서 오 상무는 부하 직원인 추은주의 점심 걱정을 하며 초콜렛을 챙겨주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오 상무의 시선 때문인지 추은주는 연신 아름다운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추은주를 연기한 김규리라는 여배우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생각이 연신 들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를 위해 촬영 감독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반대로 병중에 있는 아내의 모습은 자꾸만 바래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 역시 오 상무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로 오 상무는 점차 모든 일상에서 추은주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영화에서 추은주와의 회상 씬이 등장하는 장면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초기에 건강한 아내와의 장면도 많이 나오던 것과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아내는 병자의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오 상무의 상념 깊은 시선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상을 드나든다. 최근에 본 샘 에스마일 감독의 <코멧>이라는 영화에서도 시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일지도 모를 어느 시점을 드나든다. 그러나 표현의 방식에 있어 <코멧>은 누구의 시점에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어 관객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특유의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나는 그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반면에 <화장>에서는 오 상무의 시선으로 장면이 회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으며 오 상무라는 인물에 점차 동화되어 간다. 사실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이러한 효과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 경관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점차 동화시키며 연출하는 그의 기법이 인물의 시선에도 적용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타 인터뷰에서 감독은 실내에서 주로 촬영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걱정스러웠다라고 밝혔지만, 오히려 그의 기법이 공간에서 벗어나 시선에도 적용되었기에 새로웠고 더 좋았던 것 같다.

 


* 죽음과 삶 사이에 선 오 상무의 존재

 

[추은주의 캐릭터 포스터와 오 상무의 아내 캐릭터 포스터]


오 상무의 시선은 항상 삶의 에너지로 가득 찬 추은주에게로 향해 있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병자를 간호하는 남편에 불과하다. 죽음을 아내, 삶을 추은주라고 생각한다면 구도는 간결하다. 오 상무는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과 삶이라는 잣대를 놓고 봤을 때 오 상무의 위치는 어느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사실 죽어가는 아내의 옆에 있는 오 상무는 종종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관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스크린에서도 아내와 추은주는 여러 방면에서 대조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오 상무는 아내를 응시하기 보다는 추은주를 더 많이 응시한다. 건강한 아내도 응시하던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추은주에 대한 응시와 상념은 증가한다. 삶과 죽음의 구도에서 아내의 옆인 죽음 쪽에서 슬슬 삶의 쪽으로 기우는 것도 같다. 그러나 아내의 화장(火葬) 후 삶의 구도로 치우쳐야 할 오 상무의 위치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추은주에게 향할 것 같던 그의 발걸음은 또 다른 길로 향한다. 여기에서 나는 내 생각의 오류를 발견했다. 죽음(아내)-인간(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인 것 같던 세 인 물은 사실 죽음(아내)-또 다른 삶(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도는 어떤 극단적인 양 방향을 두고 있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 환원하는 원형의 구도였다. 결국은 살아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식사 중인 오 상무와 추은주]


그렇게 생각 하면 ‘사랑’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 영화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인 에로스-타나토스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은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것이라면 이 영화는 참 똑똑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키워드, 살아가는 이야기에 이어 오 상무라는 인물의 캐스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단 김규리와의 베드신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점이 그랬고(그는 많은 배역에서 정중하고 신사다운 역할을 많이 맡았기에 관객은 그의 베드신을 기대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그 베드신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추은주를 보는 그의 시선은 혹자에게는 관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섹시한 맛이 있다.), 작은 동작과 낮은 목소리로 연기한 점이 그랬다. 안성기라는 배우는 오히려 더 깊고, 무거운 것을 표현하며 관객의 깊은 곳까지 닿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 내가 이 영화는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도 그의 역할이 꽤나 중요했다.

 


* 와인과 슬리퍼 그 사이에서, 오 상무 그리고 나

 

위에서 언급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동경은 아내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한 쪽의 대조점을 잃은 추은주로 대표되는 삶은 오 상무가 다가가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 상무는 결국 또 다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다만 이 부분에서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소설에서 오 상무와 추은주의 관계는 일방적인 오 상무의 응시와 추은주의 퇴사로 끝이 난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오 상무는 추은주의 이직을 위한 추천서를 써줄 만큼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려 별장으로 찾아오는 추은주의 모습까지 등장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소설에서 이뤄지지 못한 사이가 영화에서는 이뤄지길 바랐다는 가벼운 이야기까지 했으나 영화에서도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다만 오 상무의 약간 미련 섞인 마음은 투영되었는지 그는 별장 안에 추은주를 위한 와인상을 차려놓은 채 자리를 비운다.


자리를 비운 오 상무는 별장 마당을 지나쳐 흙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애마저 느껴졌다. 그렇다. 어쨌거나 인간은 아름다운 것들을 버리고 종종 현실로 돌아와 다시 살아가야 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늘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오 상무의 아내도 오 상무의 현실이 되기 전에는 추은주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오 상무로서는 추은주를 붙잡지 않는 것이 그녀를 아름답게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이 때로는 이상으로 남겨져 있어야 더 아름다운 것처럼.


그래서일까, 오 상무가 걸어가는 길을 추은주가 탄 차가 지나쳐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잠시 오 상무는 멈칫 하며 걸음을 멈춘다. 동시에 내 시선도 스크린에 멈췄다. 어쩐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는 오 상무의 모습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내가 머무는 길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이상과 현실, 그리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또 다른 나의 오 상무가 다시 걷는 장면이 재생된다. 아직 그 결말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오 상무 역시 영화 속의 오 상무처럼 길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은 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만 그가 조금 덜 건조하기만을 바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응시할 뿐이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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