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사실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리기도 했고, 큰 기대를 했던 건 아니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의 끝에서 다소 실망스러운 결과를 맛보기도 했다. 힘들었다. 그런데 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지내보니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관계든 일이든 꿈이든 어느 것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건 없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너무 얽매여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어쩌면 내 멋대로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세상은 참 따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먹기도 씻기도 불편한 곳을 굳이 찾아가기도 귀찮고, 평소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데에는 친구들의 역할이 컸다. 아마 혼자였다면 나는 분명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도 가능했다. 덕분에 나는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영화제 행사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부산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꽤 긴 시간이었지만 별로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간식을 먹고, 대화하고, 잠을 자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역이었다. 부산역의 풍경은 뭐랄까, 서울역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았다. 우리는 그 여유가 좋았다. 부산역 근처에서 밥을 해결한 후, 해운대 근처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강풍이 불었는데 제법 시원했다.

우리가 출발한 날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있던 날이었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배우들의 모습을 정면에서 보지는 못했지만 그 흥과 분위기는 우리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첫날부터 영화를 보는 건 무리라 생각해서 우리는 숙소 근처 횟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다. 꿈, 돈, 여자 등 다양한 주제가 모둠회마냥 썰려 나왔고, 소주 한 잔과 함께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적당히 취한 상태로 숙소에 들어가니 고요했다. 침대에 가로누워 창문을 바라보니 반달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보름달이었는데 시간이 참 야속하게 느껴졌다.

다음날부터는 오직 영화에 집중했다.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까지 영화를 본 적은 없었는데, 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첫 영화 <디판>만 같이 보고, 나머지는 각자 예매한 영화들을 따로 봤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기억에 더 남는다. 함께이면서 동시에 혼자였던 여행이었다. 어쨌든 영화 3편을 이어 보니 정신이 없었다. 오후 1시쯤 헤어진 우리가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건 11시가 넘어서였다. 간단하게 야식을 먹을 겸 해운대 포장마차촌에 들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영화 관계자와 연예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다음에 올 때는 좀 더 여유 있는 상태로 오자는 다짐과 함께.

숙소에 와서 눈을 붙이려 했는데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은 피곤했는지 모두 잠들어 있었다. TV를 이리저리 돌리다 영화 <이웃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김성균의 악역 연기에 빠진 사이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내가 잠에 못 든 건 영화가 재미있어서일까, 아니면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 것이다. 이따금씩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는 지금도 선명하지 않다.

마지막 날 남은 영화 한 편을 보러 영화의 전당에 갔다. 그곳엔 레드카펫이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하고 부탁하는데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사실 처음엔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3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대학 선배였다. 부산에 사는 형도 아닌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는 걸 보면 우연이라는 게 정말 있긴 있구나 싶었다. 어쨌든 사진도 잘 찍고 우리는 다시금 헤어졌다. 마지막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부산 서면에서 권총 도난 사고가 일어났다는 기사를 봤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그런 소식을 접하니 씁쓸했다. 인간은 참 다양한 성격의 군상들로 모인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에서는 부산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에서처럼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했고 더 이상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주제가 고갈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컨대 여행에 내려갈 때는 공동으로 할 이야기가 많지만, 올라올 때는 딱히 그런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 부산으로 내려가는 시간보다 서울로 올라가는 시간이 더 길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지루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 할 일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간은 가득 채워졌다. 서울에 도착하니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이제 가을인가 보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해묵은 감정과 이야기들을 쏟아내며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우리는 여행의 목적에 충실했다. 이제 다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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