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내게 신호를 꼭 지키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로에 차가 있거나 없거나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신호등은 하나의 약속이자 원칙이었다. 처음 들인 습관 덕분일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신호를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졌다. 물론 초록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참 지루한 일이지만 말이다. 특히 방금 막 빨간 불로 변해버린 신호등 앞에 설 때면 그 기다림의 시간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몇 분 남짓의 시간이 내게는 매우 소중하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멍하니 서 있는 순간, 그 찰나에 나는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전화기를 꺼낸다. 통화 연결음을 듣는다. 음이 울리는 동안만큼은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만 해도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는데 이내 긴장감이 눈 녹듯 풀린다. 잡생각을 멈추고 전화기에 귀를 바짝 댄다. 경쾌한 사운드에 기분이 좋아질 무렵 음악은 적막으로 뒤바뀐다. 마치 깜박이던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 것처럼. 마음속 평온은 불안으로 전복된다. 이때부터 추측과 공상이 이어진다. 상대방이 나를 부러 피하는 것인지, 혹여 너무 늦은 시각에 전화한 건 아닌지, 갖은 이유를 찾으려 한다. 상대방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경우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잠자코 상대방의 연락을 기다릴 뿐이다.

 

이제껏 기다리는 건 누구보다 잘해왔다고 자부한다. 그게 신호를 잘 지켜서인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바보 짓 좀 그만 해” 맞다. 백번 타당한 지적이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일은 너무나도 비효율적일 테니 말이다. 그들은 내가 좀더 과감히 행동하거나 다른 대안을 찾길 바란다. 적어도 가만히 기다리는 일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며 나를 설득한다. 잠깐의 망설임이 뇌리를 스친다.

 

상상을 해본다. 신호를 무시한 채 길을 건너가거나 다른 길로 우회해본다. 확실히 목표지점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에 내게 남는 건? 평소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데에서 오는 자족감 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잃어버린 건? 충분히 기다린 후에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성취감 또는 끝내 신호가 바뀌지 않을 때 느끼게 될 좌절감일 것이다. 성취감이나 실패로 인한 좌절감은 곧 경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자존감으로 환원될 것이다. 잠깐의 자족감을 얻기 위해 자존감을 잃어버려야 하는 건가.

다시 신호등을 바라본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초록불은 아니다. 빨간불이 유난히도 붉다. 언제쯤 초록불이 들어올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적어도 내가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건 가능성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아니니까. 설령 초록불로 변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기다림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마땅한 이유가 없으니 기다림을 멈추기도 어렵다. 끝이 있는 기다림이었다면 애초부터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 같다. 기다림의 시간은 어차피 상대적이니까.

 

기다림의 성공이나 실패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기다리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도 신호등 앞에 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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