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치하의 스페인(1939~1975)

어쨌든 프랑코의 국민 진영은 우여곡절 끝에 1939년 4월 1일,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해묵은 갈등을 총칼로 일거에 정리하겠다는 반동적인 시도의 대가는 꽤나 컸다. 이미 내전으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프랑코는 승자의 관용을 전혀 베풀지 않았다.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하에 1940년 4월 ‘탄압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범위는 내전 기간 동안 인적, 물적 범죄 행위 뿐 아니라 종교, 전통 문화에 대한 테러 행위까지도 망라하였다. 탄압법으로 처형된 사람만 약 3만 5천명이었고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기아, 질병, 자살 등으로 사망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족히 20만 명이 넘었다.

“내전 승리 후, 병사들을 사열하는 프랑코”

프랑코 정권은 파시즘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보수적 가톨릭 색채가 강했다. 냉전 시대의 서유럽 정세는 이 조그만 독재자가 1975년까지 장기 집권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내전으로 인해 국가 인프라와 산업 시설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공화 정부, 국민 진영 모두 전비 조달을 위해 국가보유 금과 광산 채굴권 등 여러 이권을 소련,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외국에 팔아먹는 바람에 스페인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프랑코 정부는 정치 보복에만 열중하였다. 결국 살아남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프랑코 치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초중고, 대학, 직장, 여성계 등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오로지 프랑코 권위주의 정권에 동원되기 위한 하나의 소모적 도구로 재편되었고 문화, 언론, 학문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었다. 프랑코 정권 동안 교육 정책에 가톨릭교회가 큰 영향을 행사하는 등 스페인은 정교분리라는 시대적 흐름에 도태되었다. 교회 당국의 학계 길들이기로 자유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로 간주된 교사, 교수들은 학교에서 퇴출되었고 저술과 출판 행위마저 철저한 감시를 당하였다. 가까스로 석방된 공화 진영 추종자들과 그 가족들 역시 연좌제와 비슷한 사회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고 생계를 위한 구직 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하였다.

마드리드 대학 정신의학 교수였던 안토니오 바예호 나헤라는 스페인의 종족적 소멸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부모로부터 아이를 떼어내 국가 기관으로부터 의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경악스러운 발상은 곧 실제 정책으로 시행되었다. 그 결과 1943년에 12,403명의 아이들이 억지로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정부가 지정한 가정으로 강제 입양되거나 고아원, 종교 시설에 위탁되었다.

운 좋게도 내전 승리 이후 국제 정세 또한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프랑코는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참전 요청을 적절하게 거절하는 중립 정책을 고수한 대가로 패망한 추축국과 달리 전후 연합국으로부터 정권 유지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5,60년대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비민주적인 독재 체제, 인권 탄압 등으로 국제 사회의 지탄을 받았음에도 공산 진영으로부터 서유럽을 지켜야 한다는 냉전 논리 덕분에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았다. 유럽 공산화를 우려한 미국의 비호 아래 정권 안정과 지속적인 경제 개발을 추진할 수 있었고 이는 쿠데타와 독재라는 국민 진영의 과오를 국민들의 기억으로부터 망각시키는 하나의 정치적 선전으로 활용되었다.


“1936년 군사 쿠데타의 주범들”

윗줄 좌측부터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

아랫줄 좌측부터 마누엘 고데드 요피스, 케이포 데 야노, 후안 야구에.


결론: 스페인 내전이 한국 사회에 주는 함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스페인 내전은 결코 머나먼 유럽의 한 나라에서 벌어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차치하고서라도 응축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민주적 절차와 합의 문화의 미성숙 때문에 결국 폭력적인 방식으로 서로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관철하려 한 광기였다는 점에서 한국 전쟁으로 귀결된 해방 정국, 군사 독재로 굴곡진 우리 현대 정치사와 유사하다. 그리고 내전의 상처는 스페인과 한국 민중들 모두에게 끝나지 않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또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봉합하는 과정 역시 스페인과 한국은 여러모로 많이 닮은 것으로 보인다.

1. 민주주의의 숙명적 한계: 우리는 권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앞부분에서 필자는 공화 정부의 패전 원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이라고 이미 밝혔다. 물론 국민 진영도 여러 이념과 다양한 계층이 혼재되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독재 정치 체제를 지향했고 강력한 권위를 바탕으로 수직적이고 일사불란한 조직 운영을 선호했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반면, 공화 정부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치적 자유를 법으로 보장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얽힌 이질적인 집단들이 토론과 합의의 방식으로 행동을 결정했다. 그 결과 국민 진영보다 초기 대응이 느렸고 상부의 결정은 내각이 교체될 때 마다 자주 혼선을 초래했다.

특히 공화 정부 안에서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체계를 선호한 공산당원들과 모든 종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했다. 결과적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맞서는 상황에서 그 태생적인 결함을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다. 전시 상황에서는 빠른 결단과 통일된 조직 강령이 승리를 위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이상, 갈등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 제도적 절차로 이를 관리하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미학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지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과연 어디까지 권위를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잠시 다른 예를 살펴보자. 공화 정부를 돕기 위해 결성된 국제 여단에는 공산주의자 외에도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이들로 따로 조직된 대대는 철저한 탈권위주의를 지향하였다. 상호간에는 계급을 상징하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다음날 벌어질 전투 방식과 자신들의 지휘관을 결정하는 문제도 토론과 투표로 결정하였다. 어쨌든 전문성 측면에서 고도로 훈련된 국민군은 분명 오합지졸에 불과한 국제여단보다 더 우수했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결과적으로 내전은 국민 진영이 승리하였기 때문에 아나키스트 부대의 탈권위주의적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끝난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강제적인 입대가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이상의 수호를 위해 조직되고 운영된 새로운 유형의 군대는 분명 국민군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여 사기가 드높았고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각기 다른 개인의 자유의지가 이상을 위해 자발적으로 결집될 때, 전체주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권위의 공백이 야기하는 기술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도 있다. 항상 유사시를 대비해야 하는 한반도의 안보 상황 속에서 자유 민주주의 체제 역시 수호해야 하는 우리에게 '공익적 가치를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권위'와 '민주주의 철칙'간의 조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사면법: 과거사는 정녕 정리되었는가? 정치적 흥정과 강요된 화해

앞서 말했듯이, 프랑코 사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1976년에 ‘사면법’(Ley del indulto)을 제정하여 과거 국민 진영의 반란과 여러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내전 당시의 시대적, 개인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고 이념의 잣대를 철저하게 배제시킨 사법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며 관련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프랑코 치하 수십 년 간 핍박받아온 반대세력의 구 국민 진영 인사들에 대한 보복의 악순환을 막지 못한다면 사회 통합이 저해되고 향후 국가 발전 역시 지체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면법을 제정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1938~ )”

더 이상의 보복과 갈등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그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스페인의 사회통합에 힘썼지만, 일각에서는 과거사 청산을 회피하고 국민 진영이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정당한 과거사 청산을 마치 과거에 집착하여 분란을 초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과거보다 미래가 중요하다는 논리로 무조건 피해자에게 용서와 이해를 종용하는 방식은 위험하다. 프랑코 국민 진영이 저지른 국가 내란죄와 수많은 인명 살상에 대해 법적, 도의적 책임을 규명하기는커녕, 사회통합이라는 미명하에 그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덮어버리는 식의 청산 회피는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국민적 합의가 실종된 이러한 정치적 흥정은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는 매우 잘못된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 남겨 제2, 제3의 프랑코 식 정치 범죄 행위를 부추길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1976년 사면법 제정 이후, 스페인에서는 81년에 또 한 번의 군사 쿠데타가 시도되기도 했다.)

우리 현대사의 예를 들어보자. 이미 명백한 국가 내란죄로 판명된 1979년 12.12 사태의 주동자인 전두환, 노태우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처단했는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 및 장세동, 허삼수, 허화평 등 하나회 일당을 국가 내란죄로 기소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정치 보복 논리 아니냐는 일각의 시선도 있었다. 하지만 헌법을 부정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초법적 권한으로 학살, 연행, 구금했으며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찬탈하려 한 죄인들을 처벌하는 행위를 겨우 쩨쩨한 정치 보복이나 권력층 내부의 다툼 정도로 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정은 막대한 추징금과 함께 피고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징역 22년 6월을 선고했다. 하지만 신군부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97년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사회통합을 명분으로 그들을 사면하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여생을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로 보내도 모자랄 그들은 지금도 부정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있다.

“대체 언제 그들이 사죄했고, 또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

화해와 용서로 사회통합을 꾀한다는 정치적 논리에 의해 범죄에 대한 처벌을 거부한다면 과연 우리는 후세에 어떤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을까?

어쨌든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국왕이 사면법을 통해 프랑코와 국민 진영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에 대해 사면 조치를 단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신군부 인사들을 법적으로 사면했다. 그리고 사면 취지는 두 경우 다 ‘용서와 화해를 통한 사회통합’이었다. 과거사를 판단하는 데 정치적 보복을 목적으로 혐의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 없이 무조건 단죄하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명백한 정치적 범죄 행위를 저지른 자들에게 엄한 처벌과 분명한 책임을 지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민적, 사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사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침묵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과거사에 대해 단죄를 내리는 사법 행위를 고작 사람들을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고 서로 편을 나눠 비효율적인 사회 갈등이나 유발한다는 식의 퇴행으로 인식하는 것은 부당하다. 오히려 철저한 진상 규명과 확실한 처벌을 통해 우리 사회가 후세에 ‘과거의 범죄는 언젠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통해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과거사 청산으로 논쟁 중인 우리 사회는 스페인 내전과 사면법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다급해진 공화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영국은 극도의 중립적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였다. 오히려 독일과 이탈리아 해군이 지중해로 국민군 병력을 수송할 때에도 스페인 본토의 영국령 지브롤터 주둔 영국 해군은 이를 방관하였다. 프랑스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지원에 주저했는데 스페인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의한 ‘불간섭 위원회’가 영국의 주도하에 설치된 이후로는 국제 협약 상의 이유로 내전 개입을 사실상 거부하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불간섭 위원회의 참여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 국민군을 도와 내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여러 정황들이 포착되었음에도 영국은 이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협약 위반에 대해 독일과 이탈리아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소련과 멕시코 만이 스페인 공화 정부의 유이한 후원자였고 특히 소련은 전투기, 폭격기, 전차, 군사 고문단, 공산당원을 비롯한 광범위한 물적, 인적 지원을 하였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 국가들과 공산주의 소련이 격돌하는 무대가 되었다.  

왜 그들은 공화 정부를 도와주지 않았는가?

영국과 프랑스,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파시즘의 확대를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화 정부를 지원해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스페인 내전’의 저자 앤터니 비버는 저서에서 확전에 대한 부담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이탈리아를 자극하려하지 않기 위해 노골적인 유화 정책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련의 스탈린도 히틀러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초반에는 공화 정부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유화 정책은 파시즘 국가들의 폭주를 제어하는데 실패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음으로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이는 곧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또 다른 이유로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이 파시즘 확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1917년 공산 혁명으로 만들어진 소련 볼셰비즘의 확대를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유 진영 국가들이 민주 공화정을 지향했던 스페인 공화 정부를 소련과 비슷한 공산주의 계열로 판단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이 본격화되고 마드리드가 사실상 소수의 소련 고문단과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목격한 이후, 공화 정부 색깔에 대한 의심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스페인 공화 정부가 좌파적 성격은 어느 정도 띠고 있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자유선거를 보장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보통 국가’였다.(실제로 공화정 초기에는 알칼라 사모라-카세레스 키로가의 온건보수 내각이 집권하였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성 보수 정치인들 눈에는 공화 정부는 ‘또 다른 모스크바’와 다를 바 없었고 계급 혁명을 위해 파괴와 폭력을 일삼는 불안정한 국가로 간주되었다. 오히려 서구 진영의 보수 정치가, 자본가 계층은 친기업적이고 반공(反共)의 기치를 내건 프랑코 국민 진영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는 미국 하원에서 공화 정부에 대한 무기 수출 안이 부결되고, 서방 은행들이 점점 공화 정부에 대한 신용 대부를 거부한 반면, 프랑코 정부에 차관을 지원해주는 식의 형태로 노골적인 국민진영 지지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국경으로 유입되는 무기를 막기 위한 감시 활동을 벌였는데 대부분 소련의 무기가 프랑스-스페인 국경을 거쳐 들어가는 것만 적발하였고 지중해에서 국민군에 대한 독일, 이탈리아의 해상 지원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스페인의 공산화를 두려워 한 자유 진영 국가 엘리트들의 보수적인 성향과 불간섭 위원회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의 위험한 도발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공화 정부 패망에 일조하였다.      

국제 여단의 참전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s)

파시즘으로부터 자유와 이성을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참전했다.

(출처: http://www.malgusto.com/pequenas-pildoras-historicas-30marzo2015/)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 국가들이 정치적 이유로 공화 정부에 대한 정규군 파병에 미온적이던 동안, 코민테른(전 세계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의 주도로 의용군을 모집, 국제 여단이 결성되었다. 물론 인적, 물적 측면에서 소련의 개입과 지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들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북유럽, 중남미, 중국 등 다양한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파시즘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아래 자발적으로 참전한 사례였다. 총 53개국 약 3만 5천여 명의 병력 규모였고 이들은 간단한 제식과 사격 훈련을 거친 후, 즉시 마드리드 전선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물자 지원은 넉넉하지 못했다. 무기는 낡았으며 각국에서 물자 보급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16종류의 서로 다른 구경과 탄약을 쓰는 총기들이 뒤섞이기도 했다. 총을 다룰 줄 아는 베테랑들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병사들은 서로 다른 모국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작전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국제 여단의 병사들은 반강제로 입대한 국민군과 달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었고,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공화 정부가 반격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지성의 수호를 위해 날아온 자유세계의 사람들

예외의 경우가 있긴 했지만 당시, 전 세계의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공화 정부를 지지하였다. 국민 진영과 그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의 파시즘적 성향이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지식인들이 펜을 잠시 던져놓고 자신의 서재를 뛰쳐나와 공화 정부를 지원하러 기꺼이 총을 들었다.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전선에서 목에 총상을 입어서 귀국 한 이후에는 자신이 보았던 전쟁의 참상과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을 ‘카탈루냐 찬가’로 저술하였다.


“1936~1938년 바르셀로나의 시가전”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전선에서 공화 정부를 위해 복무했고 국민 진영에 대한 반감 뿐 아니라, 공화 진영 내부의 파벌 싸움에 환멸을 느꼈다.

(출처: http://www.fornewssites.org/posts/imagenes/17325420/Fotos-antiguas-con-gran-historia.html)

프랑스 작가인 앙드레 말로와 생텍쥐베리 역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공화 정부를 도왔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종군 기자로 활약하며 파시즘의 만행을 알렸고 후에 내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남겼다. 이외에도 스페인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작품 ‘게르니카’로 폭격의 참혹함을 고발했다. 물론 참전 후 조지 오웰처럼 공화 정부 내 좌익 정당들 간의 파벌 싸움으로 환멸을 느낀 지식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와 지성을 수호하고자 한 대의명분은 다양한 국적과 인종을 하나로 모으는 원동력이었다.

공화 정부는 왜 패망하였는가?

여튼 공화 정부는 1939년 4월 1일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패전의 원인으로는 공화 정부의 내부 분열을 들 수 있다. 온건한 성향의 아사냐 대통령과 키로가 총리가 이끌었던 초기 공화 정부는 내전 발발 당시 자신들의 확실한 우군이었던 노동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키로가 내각은 36년 이미 국민 진영의 반란이 가시화되고 각 지역을 방어하는 공화군과 치안 병력들이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반란에 가담한 군인과 경찰들이 속출했다.) 제일 믿을 만 했던 세력인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다. 중앙 정부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국민 진영 반란군은 식민지 모로코, 카나리아, 발레아레스 제도, 서남쪽의 안달루시아 지방, 북부의 부르고스 지방을 휩쓸었다. 노동자들과 민간인들을 무장시켜 반란군에 저항하는 것은 이제 해당 지방 행정 수장들의 결단에 달려있었다. 하엔 시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사태를 빠르게 파악한 주지사가 반란 가담 우려가 있는 경찰 병력을 무장 해제시키고 대신 노동자들을 무장시켜 국민군의 반란을 사전에 제압한데 반해, 오비에도 시와 같은 경우처럼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을 거부한 우유부단한 주지사 때문에 반란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어 공화 정부의 관리들과 노동자들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태생적으로 민중을 신뢰하지 못했던 공화 정부 정치 엘리트들의 오판이 결국 프랑코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국민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공화군 포로들”

국민군과 공화군 모두 포로들을 무작정 '데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1936년 11월, 시에라 데 과다라마

(출처: http://www.voxeurop.eu/en/content/article/781661-civil-war-still-open-wound)

1. 공산당의 횡포: 우리와 생각을 달리 하는 자는 다 프랑코의 첩자들이다!

공화 정부 집권 내각인 인민 전선은 다양한 이념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이루고 있었다. 사회주의, 좌파 공화주의, 중도 자유주의, 아나키즘(절대 자유주의), 공산주의 등을 표방하는 연립 정당들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국민 진영이 개전 초기에 이미 프랑코를 총통(generalissimo)으로 추대하고 내부 결속을 다진데 반해, 공화 정부는 내전 기간 동안에만 네 번의 내각 교체가 단행되었다. 통일되지 않은 지도 체제는 전시 상황을 관리하는데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소련 공산당이 배후 조종한 스페인 공산당은 공화 정부 내각에서 주도권을 쥐려했고 사회주의 세력과 아나키즘 세력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한편 이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당의 중앙 집권적이고 위계적인 조직 운영 방식은 절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아나키스트들의 거센 불만을 야기했다. 

심지어 물자 보급을 담당하던 공산당 소속 장교들은 전방에서 국민군과 싸우고 있는 몇몇 부대에 무기 지원과 의약품 보급을 거부하였는데 해당 소속 부대장이 공산당원이 아니거나 아나키스트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온건 자유주의자였던 후안 네그린이 공화 정부의 마지막 총리로 임명되자 그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산당의 횡포를 방관했다. 공산당원이 주동이 된 군 수사국은 묻지마 식으로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거나 공산주의에 비판하는 좌파 진영 인사들까지 잡아 감금, 고문, 처형하였다. 스페인 공산당의 비이성적이고 폭력으로 일관된 숙청은 프랑코 국민 진영이 했던 짓거리와 별 다를 게 없었다. 

이에 대해 아나키스트 이론가 아바드 데 산티얀은 “네그린이 공산주의자 무리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프랑코가 이탈리아인들과 독일인들을 데리고 승리하든 우리에게 그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2. 와해되는 국제여단

인민전선 내각 안에서 불필요한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동안 사상 검증에 따른 보급품 수송이 자주 지연되었고 이 때문에 전방에 배치된 공화군 병사들은 점점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자유를 수호하려 이역만리 타국으로 온 국제 여단 소속 병사들은 점차 공화 정부와 국민 진영 간에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게 되자 편지로 본국에 있는 가족, 자국 언론에 공화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선이탈, 탈영, 태업 등의 방식으로 국제 여단 병사들이 저항하자, 스페인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은 거칠게 대응했다. 편지를 검열하거나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국제 여단 병사들을 집단 수용소, 정신 병원에 감금하였고, 심지어 즉결처분하기도 했다. 급기야 1937년 9월에 공화 정부가 국제 여단 병사들의 지위를 스페인 공화군 소속으로 규정짓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곧 외국인이었던 국제 여단 병사들이 스페인 군법의 적용을 받는 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들의 제대나 본국 귀환은 이제 기약이 없었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고자 했던 그들의 용맹함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웠다.

3.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대립

스페인 내전은 단순히 보수 국민 진영과 진보 공화 정부 간의 이념 전쟁으로만 정의할 수 없다. 왕정복고(카를로스 왕당파), 보수적 공화주의(몰라 이하 여러 장군들), 급진 파시즘(팔랑헤당) 등 국민 진영 안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이견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 정부 내부에도 여러 대립 구도가 존재했다. 


“필사의 탈출”, 1939년

공화 정부의 패망이 거의 기정사실화되자 많은 스페인인들이 목숨을 걸고 스페인-프랑스 국경을 넘어가 수준 이하의 난민 생활을 감수했다. 

(출처: http://es.fanscup.com/real-betis-balompie/forumpost/39595)

특히 공화 진영의 내부 결속을 저해했던 원인 중의 하나가 중앙-지방간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이었다. 바르셀로나가 위치한 카탈루냐 지역은 전통적으로 마드리드 주도의 중앙 집권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었고 이는 바스크 인들이 대다수였던 바스크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 불신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 인들과 바스크 인들이 내전 기간 동안 공화 정부를 지지한 까닭은 그나마 공화 정부가 프랑코보다 덜 중앙집권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은 프랑코라는 점 외에 여러 면에서 이질적이고 융화될 수 없었던 중앙-지방간의 느슨한 연합은 시간이 지날수록 와해되기 시작했다. 내전이 발발하자 지방 정부의 자치는 보류되었다. 또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선호하는 공산당이 공화 정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다른 좌파 정당을 탄압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대다수였던 카탈루냐 지역은 이에 반발, 1937년 5월, 스페인 공산당을 상대로 ‘내전 속의 내전’을 벌였다. 여기서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들이 패배하고 공산당이 득세하자, 공화 정부 내의 여러 지방 도시들에 대한 통제는 심화되었다. 1937년 초에 남부 도시 말라가가 결국 국민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공화 정부의 총리 라르고 카바예로는 이 지역의 뿌리 깊은 독립 의식을 싫어하여 말라가에는 탄약 한 발도 주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공화 정부가 프랑코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로 단결하는 내부 통일에 집착할수록, 지방 민심을 점점 상실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공화 정부 패망 임박”

1938년 5월, 국민 진영(회색)의 공세는 공화 정부(붉은색)를 두 동강 내버렸고 바르셀로나는 고립되었다. 패전이 확실시되었음에도 이듬해까지 전쟁이 계속된 이유는 공화 정부가 프랑코를 상대로 항복 협상 조건을 보다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4. 선전 효과 집착에 따른 전술 실패

공화 정부의 관료들과 공산당원들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선전 효과에 집착했다. 1937년 초부터 전세가 불리해짐에 따라 이러한 독선은 더 심해졌는데 전략적으로 별 의미 없는 소도시 몇 개를 대병력을 이용해 점령한 후, 자신들의 성과를 언론을 통해 지나치게 자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제공권에서 절대 우위였던 국민군은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화력 지원을 등에 업고 공화군에 뺏긴 지역을 금세 수복하곤 했다. 오히려 국민 진영의 뒤이은 반격으로 공화군은 더 큰 손실을 입었고 이런 식의 불필요한 병력 소진은 1938년 7월 에브로 강 대공세 작전의 실패로 전체 병력 대부분을 잃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이 공군을 이용하여 아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기 식의 무리한 전진은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지만 패배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마드리드의 공산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전략적 실수를 인정하기는커녕, 내부에 프랑코의 첩자가 있어서 패배했다는 논리를 펴며 반대파들을 제거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다음편 예고)두 개의 스페인(下): 아물지 않은 상처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을 뒤흔든 전쟁, 혁명은 절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50여년 넘게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혁명적 사건의 시발점은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내재된 원인들이 누적된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조그만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폭발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은 즉흥적이거나 우연이 아닌 이유로 발생한다.

1936년 7월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은 공화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이하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이하 몰라) 등 보수적 성향의 장군들이 팔랑헤 당(파시즘 정당, 후에 통합 팔랑헤당으로 개편, 프랑코 내각의 집권여당이 된다.), 왕당파와 함께 스페인령 모로코와 북부 스페인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보수 우익 반란군 진영인 국민 진영'과 '인민전선 내각이 이끄는 공화 정부'가 이념의 차이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약 35만 명이 사망, 50만 명의 국외 망명자가 발생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장한 공화 정부 여성 지지자들, 1936년, 마드리드.”
후방 지원과 시가지 전투 참여까지 실제로 여성들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출처: http://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war-and-conflict-spanish-civil-war-pic-23rd-july-1936-an-news-photo/80752137)

작용과 반작용: 지배 세력의 억압에 대한 민중의 대응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사상의 자유와 과학이 전 유럽을 아우르던 20세기 초반까지도 미신에 근거한 가톨릭 권위주의와 절대왕정에 푹 절여있던 스페인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 스페인에는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종교 재판소가 아직 존재하였고 학문의 자유와 교육, 문예는 가톨릭교회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세기 제국의 위용을 갖추던 모습은 쇠퇴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군인들의 총칼로 민중을 지배하였다.

스페인 왕국 안의 이민족이었던 북쪽의 바스크 인들과 동남쪽의 카탈루냐 인들은 여전히 마드리드 중앙 정부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갈등은 카스티야 지방(마드리드)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내전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 왕, 군인, 교회, 자본가와 대지주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고 장군들의 빈번한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일반적인 의미의 쿠데타와는 다른 스페인, 남미에서의 군사 항명. 국왕으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는다.)는 스페인 사회를 도덕적 해이와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고 가곤 했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지배를 감내해야했던 도시 중산층, 노동자, 소작농 계급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신론,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급진적인 외래 사상에 쉽게 포섭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듯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이미 50여 년 전부터 스페인 사회는 군주제, 가톨릭, 군벌, 자본가,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다양한 계급과 이데올로기로 사분오열되었고 온건한 개혁이나 타협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대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르고스 지역에서는 사제들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중세적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대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였고, 말라가나 산세바스티안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하는 등 모순적인 공존이 가능한 곳이 바로 19세기 말 스페인이었다. 타협할 수 없었던 양대 세력의 거대한 충돌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내전의 대내적, 대외적 영향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진영이 승리하기까지 3년 동안 전선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공화군과 국민군 양쪽 모두에 의해 정치인, 민간인, 지식인,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보복 학살 및 불법 구금, 고문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광기를 피해 스페인인들은 미주, 중남미, 프랑스 등 국외로 도피하였고 이는 스페인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초래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진영의 방관 속에 공화 정부를 지원한 소련과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지한 나찌 독일, 이탈리아가 충돌하는 국제 대리전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신형 무기와 전술을 스페인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시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승리를 통해 이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내전 종식 후 5개월 뒤 벌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31년 대규모의 민중 혁명으로 국왕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직후 수립된 스페인의 ‘유일합법 공화 정부’는 서구 진영이 사태를 방관하는 사이에 결국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 반란군에게 패망하였다. 반란군 장군 중 하나였던 프랑코는 ‘지도자'(caudillo)로 등극, 1975년 죽을 때 까지 36년 간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고 77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은 민주화가 되었다.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Ι)는 자유선거 실시와 정당 활동을 합법화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는 한편, ’사면법‘을 제정, 좌익 진영의 과거 범죄와 더불어 프랑코 진영의 반란죄 및 기타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구 반란 세력을 단죄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으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스페인 내전의 특징과 민중들의 수난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남유럽 국가의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우리의 해방 정국 이후 현대 정치사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절대 왕정과 일제 통치라는 강압적 지배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중들은 점점 폭력이 수반된 극단적인 혁명을 모색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한국의 민중들은 각각 왕정 폐지, 일제 패망에 따른 절대 권력의 공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율적인 국가 경영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 의회민주주의 같은 상식적이고 온건한 입헌적 절차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백색 테러, 적색 테러 등 무고한 살인과 폭동, 사보타주 따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 했다. 집단이성의 마비에 따른 시대적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 등의 방식 외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던 결과가 내전(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이었다.

1. 내전 발발 초기

 

 

스페인 내전은 장기간 누적되어온 보수와 진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 가톨릭과 무신론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갈등을 과격한 반동적 쿠데타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 뿐 아니라, 주요 거점에 배치된 일개 하사관이나 병사들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공화 정부의 관리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분명하였다. 반란 초기에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등 분명 여러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었던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부대 지휘관의 결단이나 하급 장교 혹은 병사들의 조직적인 행동, 그리고 치안대와 돌격대 같은 준군사 조직, 각 주지사들이 어느 편에 설지에 대해 신속하게 입장 표명을 함으로써 내전 발발 한 달 만에 스페인 전역은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아직은 건재한 공화 정부”
내전 발발 한 달 후인 1936년 8월. 국민군(회색)은 고작 식민지 모로코와 지중해의 여러 제도, 그리고 북부의 부르고스, 팜플로나 지방, 서남부의 안달루시아 일부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공화 정부(붉은색)는 수도 마드리드와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북부의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시가 북쪽의 국민군 영역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제3의 도시 발렌시아와 군사 요충지 카르타헤나 항 역시 공화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2. 미디어를 통한 국제 여론 포섭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이전의 전쟁의 양상들, 즉 군대 대 군대의 싸움에 의존했던 일차원적 전장의 개념을 벗어나 라디오 방송, 신문과 같은 현대 미디어를 통해 상대 진영의 사기를 꺾으려했고 각 진영의 공보 담당 관리들은 외신들을 이용하여 각자 자기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였다.

3. 우리 안에 적이 있다!

전쟁의 양상은 전면전과 더불어 후방에서의 게릴라 전, 도시 점령 후 시가전 등 꽤나 지루하고 소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적의 첩자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경향을 가진 인사들이 각각 상대 진영 도시에 암약하여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설령 일부 도시에서는 그런 세작들의 활동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안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각 진영 내부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불신과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군 국민 진영의 장군 몰라는 방송을 통해 “마드리드에는 우리의 제5열이 침투해있다.”라는 식으로 공화 진영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였는데 결과는 예상외로 효과적이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한 축인 스페인 공산당원들은 군 수사국을 이용해 초법적 권한으로 우익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처형과 고문을 자행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려했다.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비이성적인 공포 정치는 결국 공화 정부 내각에 대한 민심 이반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회 민주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 중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내부 불신은 프랑코의 마드리드 입성과 공화 정부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인민재판: 우리 편 아니면 전부 빨갱이(혹은 반동)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결백한 민간인인지를 판단하거나, 적에게 얼마만큼 부역했는지 에 대해 혐의를 입증하려는 능력도, 의지도 사실상 양 진영 모두에게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일부 도시에서는 공화 정부 쪽 민병대에 의해 국민 진영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지주, 성직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다. 또한, 공화 정부의 치안 당국은 국민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미리 정치범 수용소의 우익 인사들을 줄줄이 총살시켰다. 그러다가 국민군이 점령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우익 인사들은 기세등등하게 좌익 인사들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밀고하는 등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무장한 사제들과 레케테(카를로스 파 민병대: 왕당 보수파), 팔랑헤당 당원들은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노동조합원, 노조 간부, 공화군, 공화 정부 관리 및 반 국민진영 혐의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어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즉결처분하였다. 물론 변호인이 동석하거나 삼심제 형식의 상식적인 재판 절차 따위는 없었다. 국민 진영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보통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국군의 보복, 밤에는 빨치산 세상을 감내해야 했던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민초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지 모로코에서 거병한 국민 진영은 현지 리프족들로 이루어진 외인부대를 반란에 끌어들였다. 본토에 상륙한 후 이들은 뛰어난 매복술과 근접전으로 국민 진영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스페인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적인 학살, 강간, 약탈을 저질렀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 점령군의 희생양이었던 그들이 스페인 장군 프랑코를 위해 총을 든 것은 참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출처: http://www.alternatehistory.com/discussion/showthread.php?t=287588)

5. 시가전에 따른 국민군의 보복

내전 기간 동안 국민군의 도시 탈취 작전에서 되풀이 된 시가전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국민 진영은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 지원으로 공화 진영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시 접수’를 위해 투입된 지상군 병력 중 상당수가 건물이나 주택에서 은폐 중인 공화군 잔당과 무장한 노동자, 민간인들의 기습 사격이나 저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건물을 하나하나씩 제압하면서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병력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독이 오를 데로 오른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아랍인으로 구성된 스페인령 모로코 외인부대)들은 민가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병원의 환자들을 집단 살해하거나, 생포한 민간인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만행으로 대응하였다.

6. 무차별 도시 폭격 작전과 민간인 살상

프랑코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원한 이탈리아와 나찌 독일은 공화 진영 도시들에 대해 현대 전쟁사에서 최초로 다수의 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대량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독일의 리히트호펜 대령이 지휘한 콘도르 군단(스페인 파병 독일 군대) 소속 하인켈, 융커 폭격기의 무자비한 폭격은 비인도적인 인명 살상을 초래했고 특히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은 적지 않은 민간인 학살(민간인 희생자 수에 대해선 국민 진영과 바스크 자치정부가 다르게 주장함)을 초래했기 때문에 나찌 독일과 국민 진영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진영과 동맹국의 폭격전략은 국민 진영이 공화 진영의 도시들을 탈취할 때 그 심리적, 전술적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은 더욱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7. 대리전쟁(독일, 이탈리아 vs 소련)

애초부터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정부는 막대한 차관과 군대, 무기 등을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스페인에 자신들과 유사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 프랑스의 후방을 위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 수송기들은 모로코 주둔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들을 지중해 건너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에 신속하게 상륙시킬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공화 정부가 국민 진영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독일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나찌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 국민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콘도르 군단’을 결성, 파병하였는데 스페인 전장을 많은 신무기와 전술을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하였다. 거의 수직으로 강하하여 목표물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하는 슈투카 폭격기도 이 중 하나였다. 폭격시에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났기 때문에 공화군과 스페인 시민들이 느꼈던 심리적 공포는 배가되었다.

(출처: http://www.thisdayinaviation.com/tag/stuka/)

(다음편 예고) 두 개의 스페인(中): 지성의 패배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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