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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달린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속력을 높이며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귀가 막힌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난 뒤 빠르게 고도를 높일 때 전해지는 느낌과 같다. 비록 그것보단 자극이 덜하지만 그런 먹먹함은 순식간에 답답함으로 바뀐다. 열심히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하품시늉을 한다. 그래야 내이와 외이 사이의 압력차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宇宙人이 될 팔자는 아닌가보다. 지상에서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갈 때 이정도의 먹먹함을 느낀다면, 그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가야하는 우주여행은 얼마나 힘이 들까. 겨우겨우 우주공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귀머거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의 우주여행을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지금은, 진주星으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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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 행선지인 진주를 가기 위해 안동에서 열 시에 기차에 올라탔다. 두 시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환승을 한 뒤 또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진주에 도착했다. 환승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은 이유로, 나는 진주성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내일로 여행자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진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한참 여행경로를 짜고 있을 때, 진주가 고향인 동아리 후배 H의 생각이 났다. 남들이 쓰지 않는 소재로 잘도 소설을 써냈던 그는 2년 동안의 대학교생활과 1년 동안의 동아리 생활을 뒤로하고 의무 소방으로 입대를 했다.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진주 바로 옆 D시에 배정이 된 것이 5개월 전 일이었다. 나는 H에게 SNS를 통해 연락을 했다. 군부대가 아닌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H였던 탓에 어렵지 않게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진주 일정인 19일 날 H역시 외박을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H와 진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원래 진주 기차역은 진주성 근처에 있었지만, KTX가 개통되면서 원래 역이 폐쇄되고 시내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새로운 역이 생겼다. H와는 중간 중간 연락을 해가며 진주성 앞에서 네 시에 보기로 했다. 진주역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처럼 꾸며져 있었고 현판엔 또박또박 한글로 진, 주, 역, 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 앞에서 나는 진주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진주나 서울이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았다. 장을 보고 집에 가려는 아줌마, 학원을 가는 학생 그리고 데이트를 하러 약속장소에 가는 젊은 여자까지. 그들 역시 버스를 타고 카드를 단말기에 찍었다. 


농협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그대로 길을 따라가 진주성 쪽으로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H였다. 패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전혀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간편해 보이는 복장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오늘 그가 입고 나온 바나나가 그려진 노랑 티셔츠와 무릎께까지 오는 청바지의 조화도 멋있었다. 여름인데도 짧은 머리를 가리려는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와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여 H에게 말했다.

“네, 형. 근데 소방서가 좀 짜증나요.”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말에 네, 해놓고선 바로 소방서에 대해 불평을 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매표소 앞에서 나는 이천 원을 주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진주 시민인 H는 진주성 입장료가 무료였다. 그는 돈 대신 신분증을 내밀고 입장권을 받았다. 입구 바로 앞엔 누각인 촉석루가 있었다. 잠시 땀도 식힐 겸 그곳에 올라갔다. 그곳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H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12월이었으니, 육 개월 만이었다. H는 진주에 살았지만, 진주를 잘 모른다고 했다. 형, 집에 너무 틀어만 박혀 글을 써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진주성도 마찬가지였다. H는 진주성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가 이랬었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쨌든, H와 나 모두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눈앞이 탁 트이며 진주의 강남(江南)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코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건물이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울의 그것보단 훨씬 적었다. 


진주성 중앙 평평한 곳엔 박물관이 있었다. 상시전시로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이 있었고, 계절마다 전시물이 바뀌는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작가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입장권 안에 박물관입장료까지 포함되어있었는지, 박물관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은 많진 않았지만 전쟁의 처음과 끝까지 그 시간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있었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본 떠 만든 모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었다. H에게 부탁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왠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컷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오른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는 동상은 그 크기가 크지 않았지만 용맹함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진주성 관람을 마치고 나는 H와 함께 그가 친구들과 술을 자주 마시러 갔다는 K대 근처로 이동했다. 방학이기도 하고, 시간도 일러서 문을 연 술집이 몇 개 없었다. 골목을 돌다가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곤 그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니 좀 더 진솔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H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H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나의 것보다 전혀 쉽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라든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긴 가족사이의 갈등.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H가 건강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제 3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H가 자신의 문제들을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

술을 먹는 중간, 동아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 역시 H와의 통화에 즐거워했다. 우리는 안주 하나를 더 시키고 먹은 뒤 술집을 나왔다. 


나는 원래 일곱 시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술집을 나오지 여덟 시가 넘었다. 다행히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밤 버스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진주성이 있는 시내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열 시 버스표를 샀다. 아직 버스 시간까지 한 시간 이상이 남아, H와 나는 다시 한 번 진주성에 가보기로 했다. 아까 먹은 안주와 술을 소화시킨 다는 명목도 추가하면서. 


도로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거리가 뿌옇게 됐다.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오면서 거리는 안개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짧아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진주가 ‘진주’가 아닌 ‘무진’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무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김승옥의 소설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는 불투명한 연기로 가득 찼고, 차들은 그 연기를 뚫으며 나아갔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난 뒤, 나는 그것이 소독차 때문에 생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소독 연기가 무색무취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진주는 아직 이십 세기의, 그런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던 것은, 여섯 시 이후의 진주성은 입장이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입장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진주성 자체는 서울 도심에 있는 창경궁이나 경복궁과는 다르게 밤에도 시민들을 위해 개방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촉석루와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재들은 문을 꼭 걸어 잠갔다. 해가 완전히 지자, 진주성 곳곳의 가로등이 켜졌다.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진주성 안에는 나와 H말고도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간혹 볼 수가 있었다. 진주성은 지주 시민들에게 그들의 도시에 있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친근한 산책코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H도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안 듯 신기해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진주의 야경 역시 멋있었다. 저 멀리서는 다리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드리운 어둠이 건물에서 켜진 빛과 어우러지면서 그대로 진주 남강에 투사되었다. 날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달도 보였을 텐데, 지금쯤 동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태풍이 못내 아쉬웠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나와 H는 다시 진주성을 나왔다. 진주성 바로 앞에 12지신을 등불로 만든 상이 있었다. 나는 말 앞에서, H는 개 앞에서 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H와 악수를 나누며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 다음 휴가 땐 서울 올라와. 계속 고생하고. 


버스는 열 시에 맞춰서 진주를 출발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 나는 내 몸통만한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편안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의 첫 비를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맞았다. 청량한 비를 가로지르며 버스는 부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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