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화장>과 영화 <화장>의 만남

 

화창한 어느 봄날, 나는 영화 <화장>의 시사회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관계없이 주관적인 영화 감상을 즐기는 나로서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평에도 불구하고(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젊은 여성과의 불륜 영화로 착각하고 있다.)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시사회 당첨 문자를 받은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원작 단편이 들어있는 김훈의 <강산무진>의 구입이었는데, 보통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원작을 감상하던 나로서는 책을 먼저 읽고 간다는 것은 큰 도전처럼 느껴졌다.


다른 단편보다 먼저 <화장>을 펴서 읽어 보았는데 소설은 담담하고, 깊은 맛을 내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책의 표지는 고서를 생각나게 하는 황색이었고, 그 영향과 문장 때문인지 단편을 읽으며 잘 우러난 황차 한 잔이 계속 생각났다. 소설은 비교적 간단한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었고, 죽어가는 아내에 관련된 ‘화장(火葬)’과 젊은 여사원에 관련된 ‘화장(化粧)’에 대한 중년 남성의 시선에 관한 내용이었다. 단편을 읽고 나니 기대했던 고소한 황차의 느낌보다는 씁쓸한 황차의 느낌이 강했다. 약간의 먹먹함과 함께 죽음과 삶이라는 다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다가 영화는 이런 내용을 어떻게 담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시사회에서 감상한 영화 <화장>은 기대 이상으로 원작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었다. 너무 충실한 나머지 일반 관객들은 밋밋하다고 여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영화보다 소설 <화장>을 훨씬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는 영화와 소설이 보여준 두 가지 방식에 다 만족한다. 소설은 소설대로 텍스트와 장면을 상상하며 읽는 맛이 있었고, 영화는 영상미와 더불어 소설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상세한 내용까지 덧붙여서 다뤄주었기 때문에 새로운 맛이 있었다. 유난히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이 많았고, 소설에서는 알 수 없었던 작은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다뤄지면서 나는 텍스트에서 느낀 먹먹함과는 또 다른 먹먹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다뤄지는 오 상무보다 영화에서 다뤄진 오 상무가 더 공감이 갔고, 왠지 모를 여운까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중점으로 뽑은 몇 가지 키워드로 이야기를 더 진행해보려고 한다.

 


* 오 상무의 시선

 

[추은주를 응시하는 오 상무]


영화나 소설을 통틀어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오 상무의 시선이었다. 삶과 죽음으로 대표되는 두 여자 사이에 존재하는 오 상무는 죽음의 가까운 삶을 사는 아내를 간호하며 화사한 추은주를 종종 응시한다. 누군가는 관음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나는 오 상무의 이 시선을 응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응시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이라는 말 보다는 동경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선은 추은주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다소 감정적으로 변한다. 꿈과 환상 속에서 오 상무는 추은주를 응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인 시선과 태도로 그녀를 찾아다닌다. 물론 이것은 꿈과 환상 속일뿐 현실에서 오 상무는 부하 직원인 추은주의 점심 걱정을 하며 초콜렛을 챙겨주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오 상무의 시선 때문인지 추은주는 연신 아름다운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추은주를 연기한 김규리라는 여배우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하는 생각이 연신 들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표현되는데, 이를 위해 촬영 감독이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반대로 병중에 있는 아내의 모습은 자꾸만 바래는 느낌이 강해진다. 이 역시 오 상무의 시선이 반영된 결과로 오 상무는 점차 모든 일상에서 추은주를 생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영화에서 추은주와의 회상 씬이 등장하는 장면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초기에 건강한 아내와의 장면도 많이 나오던 것과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아내는 병자의 모습으로만 등장한다.

 

오 상무의 상념 깊은 시선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환상을 드나든다. 최근에 본 샘 에스마일 감독의 <코멧>이라는 영화에서도 시점은 과거와 현재, 미래일지도 모를 어느 시점을 드나든다. 그러나 표현의 방식에 있어 <코멧>은 누구의 시점에 고정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어 관객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영화 특유의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나는 그 영화를 온전하게 이해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반면에 <화장>에서는 오 상무의 시선으로 장면이 회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시점의 회전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으며 오 상무라는 인물에 점차 동화되어 간다. 사실 임권택이라는 영화감독을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이러한 효과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 경관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점차 동화시키며 연출하는 그의 기법이 인물의 시선에도 적용된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타 인터뷰에서 감독은 실내에서 주로 촬영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걱정스러웠다라고 밝혔지만, 오히려 그의 기법이 공간에서 벗어나 시선에도 적용되었기에 새로웠고 더 좋았던 것 같다.

 


* 죽음과 삶 사이에 선 오 상무의 존재

 

[추은주의 캐릭터 포스터와 오 상무의 아내 캐릭터 포스터]


오 상무의 시선은 항상 삶의 에너지로 가득 찬 추은주에게로 향해 있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병자를 간호하는 남편에 불과하다. 죽음을 아내, 삶을 추은주라고 생각한다면 구도는 간결하다. 오 상무는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과 삶이라는 잣대를 놓고 봤을 때 오 상무의 위치는 어느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사실 죽어가는 아내의 옆에 있는 오 상무는 종종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관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스크린에서도 아내와 추은주는 여러 방면에서 대조되는 존재이다. 그리고 오 상무는 아내를 응시하기 보다는 추은주를 더 많이 응시한다. 건강한 아내도 응시하던 초반부와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추은주에 대한 응시와 상념은 증가한다. 삶과 죽음의 구도에서 아내의 옆인 죽음 쪽에서 슬슬 삶의 쪽으로 기우는 것도 같다. 그러나 아내의 화장(火葬) 후 삶의 구도로 치우쳐야 할 오 상무의 위치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추은주에게 향할 것 같던 그의 발걸음은 또 다른 길로 향한다. 여기에서 나는 내 생각의 오류를 발견했다. 죽음(아내)-인간(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인 것 같던 세 인 물은 사실 죽음(아내)-또 다른 삶(오 상무)-삶(추은주)의 구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구도는 어떤 극단적인 양 방향을 두고 있는 구도가 아니라 서로 환원하는 원형의 구도였다. 결국은 살아가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식사 중인 오 상무와 추은주]


그렇게 생각 하면 ‘사랑’을 키워드로 내세운 이 영화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개념 중 하나인 에로스-타나토스를 가지고 설명하자면 ‘삶과 죽음은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정리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것이라면 이 영화는 참 똑똑한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키워드, 살아가는 이야기에 이어 오 상무라는 인물의 캐스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일단 김규리와의 베드신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점이 그랬고(그는 많은 배역에서 정중하고 신사다운 역할을 많이 맡았기에 관객은 그의 베드신을 기대하는 편이었다. 실제로 영화 안에서 그 베드신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추은주를 보는 그의 시선은 혹자에게는 관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섹시한 맛이 있다.), 작은 동작과 낮은 목소리로 연기한 점이 그랬다. 안성기라는 배우는 오히려 더 깊고, 무거운 것을 표현하며 관객의 깊은 곳까지 닿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 내가 이 영화는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결론을 내리기에도 그의 역할이 꽤나 중요했다.

 


* 와인과 슬리퍼 그 사이에서, 오 상무 그리고 나

 

위에서 언급한 추은주에 대한 오 상무의 동경은 아내의 장례식을 기점으로 끝이 난다. 한 쪽의 대조점을 잃은 추은주로 대표되는 삶은 오 상무가 다가가기 어려운 또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 상무는 결국 또 다른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다만 이 부분에서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소설에서 오 상무와 추은주의 관계는 일방적인 오 상무의 응시와 추은주의 퇴사로 끝이 난다. 반면에 영화에서는 오 상무는 추은주의 이직을 위한 추천서를 써줄 만큼 가까운 사이로 발전했으며,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하려 별장으로 찾아오는 추은주의 모습까지 등장한다. 작가는 이에 대해 소설에서 이뤄지지 못한 사이가 영화에서는 이뤄지길 바랐다는 가벼운 이야기까지 했으나 영화에서도 둘은 이어지지 못한다. 다만 오 상무의 약간 미련 섞인 마음은 투영되었는지 그는 별장 안에 추은주를 위한 와인상을 차려놓은 채 자리를 비운다.


자리를 비운 오 상무는 별장 마당을 지나쳐 흙길을 걸어가는 장면에서 다시 등장한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오 상무의 뒷모습에서는 왠지 모르게 인간의 삶에 대한 비애마저 느껴졌다. 그렇다. 어쨌거나 인간은 아름다운 것들을 버리고 종종 현실로 돌아와 다시 살아가야 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은 늘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것일지도 모른다. 오 상무의 아내도 오 상무의 현실이 되기 전에는 추은주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오 상무로서는 추은주를 붙잡지 않는 것이 그녀를 아름답게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이 때로는 이상으로 남겨져 있어야 더 아름다운 것처럼.


그래서일까, 오 상무가 걸어가는 길을 추은주가 탄 차가 지나쳐가는 장면이 등장한다. 잠시 오 상무는 멈칫 하며 걸음을 멈춘다. 동시에 내 시선도 스크린에 멈췄다. 어쩐지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는 오 상무의 모습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이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내가 머무는 길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내 이상과 현실, 그리고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생각과 또 다른 나의 오 상무가 다시 걷는 장면이 재생된다. 아직 그 결말을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오 상무 역시 영화 속의 오 상무처럼 길 어딘가를 정처 없이 걷다가 결국은 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다만 그가 조금 덜 건조하기만을 바라며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응시할 뿐이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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