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②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③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는 동안, 당신은 또 다른 다큐멘터리 <이름 없는 남자>(2009)를 찍었다. 그 영화는 고립과 고독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또한 인간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의도했던 것인가? 형식적으로 말해, 영화 전반에 걸쳐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을 녹음한 <중국 여인의 연대기>와 대조적으로, <이름 없는 남자>에는 대화가 전혀 없다.

 

 내가 이 남자와 만난 것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우리는 <바람과 모래>를 촬영하다 잠시 쉬고 있었고, 한 친구가 나를 황무지 근처로 안내하고 있을 때, 어디서인지 이 남자가 나타났다. 별안간 나는 그가 살고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가 우리에게 그의 삶의 경험을 전해줬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개인으로서, 또한 사회적으로 물질적 욕망이 커져가는 시간에 살고 있다. 그건 비대해진 욕망의 시간이다. 그리고 여기 가장 가난하고, 외로우나 또한 가장 소박하며, 자발적이고 자급자족하는 존재가 있다. 그는 다른 이들과의 접촉 없이 황무지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구걸할 필요가 없다. 그는 여름에 싹을 틔우고, 가을에 메마르는 풀처럼 자연의 상태에 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움직인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중국 여인의 연대기>를 찍는 동안, 나는 실제로 언어가 영화를 유지할 수 있는 극한을 탐험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남자>에서 대화를 쓰지 않은 이유는 꽤 단순하다. 나는 그 남자에게 그에 대한 영화를 찍어도 되는지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의사소통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존재 상태를 찍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주제는 당신의 최근 다큐멘터리 <세자매>(2012)에서도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이 세자매를 우연히 만났다. 어딘가에서 당신은 중국 남서부의 윈난성雲南省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한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러 갔을 때 그들을 만났다고 밝혔다. 어떻게 그들과 친구가 되었나?

 

그 작가의 이름은 쑨 시샹Sun Shixiang이다. 솔직히 나는 그가 2001년 31살에 요절하기 전까지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와 나는 같은 세대에 속해 있다. 그는 그의 유년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에 대한 회고를 소설화했고, 2004년 사후에 출간된, 『셴시神史』(신의 이야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소설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있다. 소설은 쑨 시샹이 목격한 인간 삶의 모든 양상들로 풍부하다. 그만의 이야기에 더하여, 그는 그의 부모, 조부, 이웃, 친족들의 이야기를 한다. 내 생각에 그는 나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거기다, 그가 소설에서 형상화한 삶을 나도 살았다고 느낀다. 그는 유년기부터 성숙한 뒤까지 효과적으로 우리 세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건 정신적인 경험일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감각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작가나 문학 비평가는 아니지만, 『셴시』야말로 동시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가장 훌륭한 소설 중 하나라 생각한다. 동시대 문학을 여러 편 읽었지만, 대다수는 우리 삶에서 동떨어져 있다. 개인적인 삶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실제로 이 역사적 시기에, 이 국가 사회적 (진행) 과정에서 겪고 있는 삶이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강렬하지만 종종 풍부하고 강력한, 이 생동하는 집단적 경험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내게 이 작품들은 그저 너무 나이브하다. 나는 <바람과 모래> 작업을 하는 동안, 쑨 시샹의 소설을 매우 빨리 읽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의 집에 방문해서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을 만나고 싶었다. 처음에는 촬영하느라 바빴기에 <바람과 모래>가 완성된 후에야 출발할 수 있었다. 내게 그건 무덤을 방문해 경의를 표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이름 없는 남자>(왕삥, 2009)

 

거기서 어떻게 세자매를 만나게 되었나? 당신의 필름이 보여주듯, 그들은 돌봐주는 부모 없이 대부분 스스로 생활하고 있다.

 

쑨 시샹의 무덤은 고산지대에 있다. 언덕에서 돌아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차를 멈추고 길가에 있는 세 아이들을 봤다. 첫째 언니 잉잉Yingying이 일곱 살이어서 아직 학교에 가지 않았으므로, 삼 년 전이었다. 영화를 찍기 시작해씅ㄹ 때, 잉잉은 열 살이었고, 두 동생들은 대략 여섯 살, 네 살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얘기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나를 집으로 데려가 감자로 요리를 해줬다. 그건 시골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시골 생활 방식에 익숙하다. 이상하거나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시골에서 낯선 이의 집에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건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 아이들의 삶이 당신의 유년시절을 상기시켰나?

 

내가 1970년대에 성장할 때, 중국에서의 삶은 가난 그 자체였다. 전국 모든 곳에서 먹을 음식은 충분하지 않았고, 입을 옷도 없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물질적 빈곤은 우리 기억에 세세히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80년대부터 중국은 기본적으로 이런 가난에 찌든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이런 문제는 점차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빈곤이란 어느 정도 기억의 문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고산지대에 간다면, 갑자기 당신의 눈 앞에 펼쳐진 동일한 빈곤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1970년대 전국적으로 빈곤이 팽배해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부모들이 자립하기 위해 그렇게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떠나는 게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맞다. 그건 과거와는 매우 다른 시기에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 말이 사람들이 항상 행복한 가족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차라리, 높은 확실성의 수준에 대한 말이다. 사람들의 사적인 생활은 사회에 의해 제한받았다. 당신은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쉽게 이혼하거나, 가족을 떠날 수 없었다.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모든 활동이 통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는 만약 당신이 아내, 혹은 남편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떠나버리는 몽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건 실제로 불가능했다. 당신의 개인적 삶을 위한 자유도 가질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다. 이는 별개의 문제다.

 

<세자매>(왕삥, 2012)

 

이런 문제들은 지금도 발생하지만, 그렇게 전적으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건 상당 부분 경제적 발전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이 일생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과 더불어, 경제적 관계는 사람들의 삶에 강력한─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보다 훨씬 더 강한─지배력을 발휘한다. 왜냐고? 간단하다. 이 작고 가난하고 외진 마을을 보자. 일할 수 있는 모든 젊은 노동자들은 이미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곳의 경제는 더욱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소름끼치게도, 경제는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그들의 자유 의지에 의해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을 착취한다.

 

<세자매>는 여러 롱 쇼트들을 통해, 주로 제한된 대화와 내레이션 없이 아이들의 일상을 좇으며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다. 그렇지만 그 이미지들은 매우 강렬해서, 사람들로 가득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들을 하나로 관통하였다. 이런 점들로 미뤄봤을 때, 그런 이미지가 관객을 연결시켜주는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당신에게 있다고 생각해도 되겠나?

 

그 영화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90분짜리로,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보통 TV에 방영되는 영화(다큐멘터리 프로를 말하는 듯 - 옮긴이)는 대략 50분이므로, 90분은 이미 충분히 길다. 또 다른 버전은 영화관 상영을 위해 만들었고, 150분짜리다. 이미 말했듯,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관객과의 접점을 형성한다. 이미지들이 반드시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울 필요는 없다.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영화제작자가 작업하는 방식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계속 보고 있을 때, 당신이 무엇인가에 계속해서 집중하고 있을 때, 왜 당신은 그것을 보고 싶어하며, 그리고 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가? 사람들이 신경 쓰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소녀들의 내면적 충만함, 그들 삶의 모든 디테일들 ─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관객들에겐 이 확대되어가는 복잡함을 반성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친절함을 베푼다. 심지어 막내 아이조차 돼지와 염소 모이를 주는 데 동참한다. 그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매우 슬프면서 단순한 관계다. 이 영화에서 많은 것들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지만, 아이들의 삶과 감정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의 기본적이고 현실적인 측면을 보여준다. 충만한 영화는 광고가 아니다. 충만한 영화는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우리 삶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세자매>는 궁핍한 환경을 다루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영화 전체는 빈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소녀들의 생동하는 실존에 대한 것이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의 영화가 보여주듯, 도시에 일하러 나간 세자매의 아버지는 매년 토마토와, 주식을 심으러 마을로 돌아온다.

 

그렇다, 그리고 명백히 그는 문제가 있다. 이 지점은 중국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발생한 새로운 이슈를 제기한다.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갔지만, 그들의 노동이 도시 경제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에도 임금과 생활수준은 여전히 낮으며, 그래서 시골은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 이 어린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음식, 숙박 등의 생계를 위한 지출을 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이 시골로 돌아왔을 때, 뼈 빠지게 노동했음에도 가져오는 것이 거의 없다. 소녀들의 아버지는 나이가 많지 않으나, 만약 혼자였다면, 훨씬 나은 삶을 살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세자매가 있으니, 그는 도시에서 아무 것도 저축하지 못하므로 다시 돌아와야만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또한 외로움에 대한 것은 아닌가?

 

<세자매>에는 보이지 않는 제약이 있다. 우리는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아이들의 일상에 어떠한 부분도 차지하지 않는다. 사실, 그녀는 몇 년 동안 아이들을 남기고 떠난 상태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의 아버지와 집 주위에서 몇몇 사람들을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세 명의 외로운 어린 아이들처럼 보일지라도, 사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경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경제는 우리 모두를 납치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의 인간  관계란 본질적으로 경제적 관계다. 경제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위치를 할당하고,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채찍질한다(reinforce의 의역 – 옮긴이). 결국 이러한 위치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원유>와 <석탄, 화폐>에서 논했던 것과 상응하는가?

 

그렇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 오늘날 중국의 불특정한 사회적 관계다.

 

<세자매>(왕삥, 2012)

 

당신이 보기에 세자매 같은 아이들이 자라면, 그들 또한 도시를 갈망할 것 같나?

 

아이가 도시를 갈망하진 않을지라도, 중국의 경제는 도시에 집중되어있다. 도시들은 마치 자석과도 같다. 그건 개인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관계의 문제다. 실제로 과거에는 중국의 경제가 시골에 집중되어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골 경제, 도시 경제 그리고 하찮은 산업 사이에는 심연이 있었다. 이제는 무거운 경제적 힘이 도시에 자리 잡고 있고, 그 도시는 엄청난 부의 중심이 되었다.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고, 기회를 찾기 위해 이 부에 이끌린다. 자석의 에너지는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지역의 범위를 결정한다.

 

언젠가 당신은 중국에서 오직 상하이만이 도시 문화를 갖고 있으며, 다른 곳은 ─ 예컨대, 베이징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치 문화다. ─ 그렇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도시들이 그런 자석이 되어가고 있다면, 이는 도시 문화를 성장시키겠는가? 혹, 반대로 문화는 후커우戶口[각주:1] 거주자 등록 시스템에 의해 좌절되겠는가?

 

그게 그러한 경향을 늦출 거라 생각진 않는다. 그 말은 중국 시네마에 대한 논의 중에 나왔다. 국가로서 중국은 농경 문명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다수의 사회 이데올로기의 핵심에는 여전히 그러한 프레임이 자리하고 있다. 도시 문화가 대다수의 인구가 도시에 살 때 등장했는지 ─ 혹은 어떻게 등장했는지 ─ 의 여부는 미래를 위한 문제다. 하지만 도시들은 성장을 지향할 것이고, 시네마 또한 도시 문화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우리 삶의 모든 다른 부분까지도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의무 또한 있다.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걸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다.

 

그 말은 당신이 영화는 그만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영화는 다른 모든 것들이 그렇듯 변화할 것이다. 우리 세계는 점점 더 시각적 이미지에 의존해가고 있지만, 그에 대해선 대수롭지 않아한다. 과거에, 비록 우리는 문자 언어에 기반을 둔 풍성한 문화를 향유했음에도, 이미지들은 그렇게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작곡법, 어휘 게임, 서사 장르, 풍속에 대한 묘사 등 모든 것들은 문자 언어를 응용해서 창조한 문화의 구성요소였다.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예술의 역사는 훨씬 짧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변화하고 있다. 동시대 시네마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다. 시네마는 오래 전부터 우리 레퍼토리에 축적되어온 것에 제한받지 않을 것이다.

 

- 끝 -

 

<원문 p. 129-13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 사진출처: 다음영화

  1. 중국의 후커우(戶口, 호적) 제도는 신분과 거주지를 증명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제도, 본적제도와 비슷하지만, 후커우의 이동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즉, 현행 후커우 제도는 정부가 국민들의 거주지 이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다.(네이버 지식백과 – 옮긴이) [본문으로]

* <철서구West of the Tracks>의 감독이 시골과 도시 세계 사이에서의 성장, 영화 교육과 다큐멘터리 훈련에 대해 말한다. 변화하는 중국의 민낯과 사회경제학적 법칙의 중력이 형성한 삶의 장대한 초상.

 


격변의 대지를 필름에 담다 - ①

 

 

<철서구>(왕삥, 2003)


영화를 많이 봤었나? 당신에게 특별한 영향을 준 영화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하루같이 여러 장르의 영화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비록 시네마의 역사가 겉으론 매우 풍부해 보이지만, 또한 상당히 단순하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즉, 처음에 당신은 여러 영화제작자, 학교, 국가적인 전통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방식으로 그 분야를 검토하면, 그것의 전반적인 풍경에 대해 상대적으로 포괄적인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사는 매우 짧은 반면, 예술사는 매우 길다.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지닌 시네마는 오래된 형식이 아니다. 거기다, 활동사진motion pictures이 탄생하고 얼마 안 있어, 그 형식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적인 문화에 침투해 들어왔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시네마는 문화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그 영향의 정점에 다다랐다. 여러 학교와 전통이 생겨났다.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과 소련. 각각은 상대적 환경과 사회적 문맥에 따라 형성되었다. 각 사회의 시네마에는 고유한 기능과 필요조건이 있었다. 가령, 미국에서 영화가 재빨리 상업적 이익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반면, 소련에서 영화는 프로파간다의 수단이 되었다. 처음부터 나라별로 실험과 탐구는 상이했다. 시네마 혁신─형식적. 예술적 특성과 기술적 진보 모두에 있어서─이 취한 방향들은 지역의 사회문화사와 연관되어있다.

 

학우들과의 논의에서, 당신은 촬영기법과 같은 기술적인 물음들에 집중했었나, 아니면 이미 대개 영화제작으로 관심이 바뀌어 있었나?

 

단지 촬영기법만 한정하진 않았다. 시작부터, 우리의 관심은 특정한 측면 대신 전체를 쥐어 잡는 것에 있었다. 첫 해는 진정 시네마─역사, 동시대적 발전, 그리고 여러 국가의 전통에 대해─에 대해 배웠다. 요컨대, 목표는 영화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였다. 꼬박 일 년 동안 이 방식으로 작업한 후에,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기본적인 요약과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기본적인 방향성은 점차 명료해졌다.

 

당신이 영화제작에 눈을 돌렸던 90년대 중반, 중국 감독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 시네마가 당신의 생각의 영향을 주었나?


아니다. 나는 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당시 영화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제작자 개인을 싫어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비록 몇 편의 영화들이 1980년대 이후로 국제적 권위의 상을 받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문화적으로 매우 황량했고, 세계적인 예술의 특성인 풍부함과 예측불가능성이 결여되어있었다. 모던 아트는 삶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포함하지만, 당시 영화들에 그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고? 문화적 표지cultural markers 또는 이정표의 문제에 더하여, ─내가 보기에─PRC[각주:1]의 체제establishment 하에서 지속된 영화 제작이 주된 문제였다.

 

1990년대에 영화제에 참여하기 위해 정부의 승인 없이 해외로 몰래 작품을 반출했던 영화제작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고, 더 이상 제도적 체제institutional establishment 속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지 않나?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내가 체제 속의 영화제작이라고 말할 때, 누구라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뭘 의도한 거냐고? 간단하다. 체제의 영화들은 동시대적 문화와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몇몇 고유의 특징들을 갖고 있다. 체제의 관점은 여전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아직 동시대적이지도, 진정으로 현대문명의 작업도 아니다. 어떤 점에서, 또한 이건 중국 시네마의 역사 때문이기도 하다.

 

<철서구>(왕삥, 2003)

 

이 말은 당신이 이른 20세기 중반 이후 수많은 영화들을 봤고 동시대 영화를 그 당시와의 연관 속에서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오, 그렇다. 우리는 모든 영화들을 봤다. 당신이 영화계에 발을 들인다면, 영화는 당신의 삶이 되므로 당신은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이 작업을 해왔다. 여전히 매일 영화를 본다. 이건 영화제작자로서 내 삶의 일부다. 중국의 영화사를 보면, 영화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그건 마치 땅에 떨어진 씨앗과 같았다. 영화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했고, 그들 또한 영화에 대한 의식을 형성했다. 중국인들은 시네마가 새로운 문명을 대변한다고 받아들이지도, 또 다른 문화적 형식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만약 그 상황을 연구한다면, 당시 중국인들에게 시네마는 그저 장난감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영화는 주로 이 새로운 장난감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걸 발견한 몇몇 부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당시의 자료는 랜덤 저글링random juggling이나 무대 공연 쇼트들이 전부다. 이건 유럽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영화는 아주 강력한 시네마 문명으로서, 새로운 문명─중국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이 초기 국지화localization가 수행된 방식이다. 하지만 중국 시네마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국, 유럽과 일본 영화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모로 변화했다. 중국인들은 영화가 단지 갖고 노는 새로운 장난감이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문화를 암시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또한 중국 자체가 매우 급속히 변화하고 있던 시기와 겹쳤다. 정치와 경제의 발전은 중국 시네마의 역사와 함께였다. 오늘날 통상의 표현은 이 시기를 ‘좌파 시네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렇게 정의내리긴 어렵다. 1949년 이전 상하이에서 발전한 시네마는 중국 영화사상 가장 뛰어난 시기였다. 당시 영화들을 세심히 보면, 교과서에서 봤던 버전과는 달리, 씬 뒤에서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을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역사적 문제가 되었으므로, 이 시기를 차분하고 조리정연한 눈으로 보는 것은 쉬울 것이다. 내 눈에 이 시기의 영화에는 세 가지 요소들이 있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헐리우드를 표방한, 상업적이고 스타 중심적인 작품도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지적인 전통에 기반을 둔 작품도 있다. 영화를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몇몇 요소들이나, 과거 지식인들의 윤리적 표현들, 그리고 동시에 지배적인 스타 시스템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도시 아방가르드적urban avant-garde이고, 어떤 영화에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리얼리즘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실, 대부분의 영화는 혼합되어있다. 영화의 여러 스타일은 보통 감독들의 다양한 배경 때문에 생긴다.

 

중국의 영화제작자와 평론가 대부분은 국가(중국 – 옮긴이)의 영화사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그건 중국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학자들이 왕왕 중국의 시네마에 대해 논쟁하지만, 중국사회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로는 비록 그들이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자세한 연구를 수행할 수 없다. 대조적으로, 그들은 방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당면한 문화역사적 배경의 맥락 속에서 자국의 시네마를 연구하는데 투자한다. 국가의 영화사는 이런 종류의 연구로 출현한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와 같은 작업이 없다. 우리의 영화사를 정초하려는 노력─신중하고, 명확하며, 합리적인 노력─이 결핍되어있다. 물론 세계의 영화사와 다른 나라들의 영화사를 이해해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사회문화적 질서와 동시대적인 영화제작뿐만 아니라, 영화사에 대한 뚜렷한 관점을 갖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전반적인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본질을 무엇인가? 지금 시네마의 실정은 어떠한가? 영화제작자로서 보건대, 자기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인내력을 가져야 한다. 나의 관점은 이렇다.

 

 <원유>(왕삥, 2008)

 

 

당신은 90년대 말에 북동쪽으로, 선양으로 돌아가서 그곳의 사양화한 지구의 철거에 대한 장편 다큐멘터리 <철서구>(2003)을 찍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테마로 결정했나?

 

나는 베이징에서 때로 텔레비전 시리즈 작업에 참여하거나 카메라맨으로 일하면서 삼년을 보냈다. 이후 <철서구>를 찍기로 결정했다. 나는 이미 톄시(铁西) 산업지구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양에서 컬리지에 다닐 때, 주말이면 종종 그곳에 사진을 찍으러 가곤 했다. 그곳의 공장들, 노동자들과 거주자들. 나는 그 장소에 익숙해졌다. 반면에, 그 결정은 또한 우리네 시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왔다. 내게 톄시 지구를 상기시키는 고적감desolation─중요하던 역사가 이제 점차 우리 눈 앞에서 쇠퇴해가고, 와해되어가고 있다는 감정─이 있었다. 그 이후, 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런 테마와 수많은 캐릭터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나가느냐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공단과, 그곳의 생산 일과routine, 그리고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는 것도 포함되었나?

 

물론이다. 어떤 테마를 정한 뒤에, 모든 영화제작자는 여러 기술적인 접근을 선택할 것이다. 실제로 기술 장비들을 실행 가능하도록 배치하는 법을 고려하는 것, 그게 전부다. 많은 이들은 왜 첫 영화의 러닝 타임이 9시간인지 물었다. 하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개인적으로 그건 내게 전혀 특별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나는 전혀 특이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관객들로부터의 저항resistance(저조한 관객수를 말하는 듯 – 옮긴이)을 예상하지 않았나? 그리고 영화 제작에 있어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나?

 

저항? 그런 건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 처음부터 완성할 때까지의 계획을 자각하며 영화에 공을 들여야 한다. 내 직업은 완성하는 것이다. 거기에 현시presentation와 재현representation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건 주로 나날의 실제 작업과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나는 공장으로 들어가고, 노동자들과 사귀는 것 등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모든 건 참으로 간단했다. 영화제작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돈이다. 매일같이 찍고, 매일같이 수많은 세부사항들을 다뤄야 한다. 작업에는 물적 자원의 지속적인 투입이 필요했다. 기본적으로 내 친구들과 가족이 나를 지원해줬다.

 

<원유>(왕삥, 2008)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잠재적인 관객들의 저항을 고려하지 않았나?

 

뭐라고? 영화의 비용은 박스오피스 수익과 다른 문제다. 둘은 연관이 없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박스 오피스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완전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은 뒤얽혀있지 않다.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로부터 경제적 이윤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요지는 둘은 서로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고 하자 – 옮긴이). 그건 명백히 큰 이윤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중요하다고 믿는 한, 계속해야 한다. 그건 경제적인 문제의식으로 결정할 사항이 아니다.

 

이후 당신은 <철서구>의 테마를 잇는 듯한, 다큐멘터리 두 편 <원유Crude Oil>(2008)와 <석탄 가격Coal, Money>(2010)을 더 찍었다. 엄동설한에 중국 북서쪽 칭하이靑海성의 황야에 있는 유전에서 노동자들을 기록한 <원유>의 러닝타임은 14시간이다. (<원유>는 – 옮긴이)로스 엔젤레스에서 관객들이 임의로 들어오고 나가는 전시관에서 상영되었다. 사실상, 거기 앉아서 영화 전부를 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치 설치미술 같다. 의도했었나?

 

그랬다. 로테르담 영화제를 위한 것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설치 시네마 섹션을 원했다. 그들은 내게 요청했고, 나는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 영화는 특별히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수익은 별로 없었다. 당시 나는 북서쪽에서 작업하고 있었으므로, 편의를 위해 유전을 찍기로 결정했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모두 중공업이나 에너지 산업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원유>에서는 노동자들의 휴게실에서나, 바깥 리그rig(굴착 장비 – 옮긴이) 옆에서나, 대화나 행동이 거의 없다. 영화에 대한 단일한 인상은 심지어 그들이 말을 하거나 주위를 돌아다닐 때에도 끊기지 않으며, 보통 몇 분여간 지속되는 롱 쇼트들은 그 효과를 더욱 강화한다. 이건 관객들이 집단의 유대감뿐만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공동체와 삶lived life에 대한 강렬한 감상을 품는 <철서구>와는 상반된다. 그러한 대조는 지역의 차이 때문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중국은 변화하고 있다. 과거의 공장들에는 공동체 정신이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은 공장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이곳의 정규직 노동자라면, 노동 현장에 대한 소유 중 일부를 가진 것으로 간주된다. 유사하게, 사람들의 일상은 공장에서 그들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옮긴이) 이는 오늘날의 생산시설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디든지 계약-노동 시스템으로 이뤄져있다. 그건 고용이라는 단순한 관계이며, 보통 일시적이다. 유전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계약 시스템에 속해 있다. 본질적으로 노동 현장은 더 이상 당신의 삶과 관계가 없다.

 

 

<원문 p.119-124>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https://d1tyf8b78tco2j.cloudfront.net/3d16c62a/cea14667/images/b929d2662ab573ede55da76278e346248724a391.1000.jpg
http://www.lightindustry.org/crude_oil.jpg

  1.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중화인민공화국. 중국 (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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