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7살이다. 대학원생이고 아직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해 본 경험은 없다.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취직을 했고, 대부분 이름 있는 직장에서 일하거나 기자나 PD등 이름 있는 직책을 맡고 있다. 얼마 전 오빠가 결혼했는데 내 새언니는 나랑 동갑이다. 착한 새언니는 돈 없어 쩔쩔매는 나를 위해 가끔씩 용돈(?)을 주기도 하고, 선물을 사다주기도 한다.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어른이고 나는 아직 철없는 애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느리지만 내가 원하는 길을 걷기 위해 남들보다 조금 더 신중할 뿐이라고 생각하니깐 말이다. 그런데 이 믿음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종종 있다.

얼마전이었다. 등록금 벌이로 과외를 하는데 한 학생이 사정이 생겨 그만두게 되었다. 오랫만에 알바사이트를 뒤지던 중 몇몇의 경우 나이제한으로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금은 충격이었다. , 그렇지. 사회에서는 여자나이 27이면 당연히 취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머지않아 결혼을 할거라고 생각하지.

 

A: 몇 살이세요?

: 27살이요.

A: , 그럼 지금 무슨 일하고 계세요?

: 저 대학원생이예요. 영화이론 공부하고 있어요.

A: 아아.. 멋있네요. 감독되려고 하는거예요?

: 딱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생 카메라를 손에서 놓을 생각은 없어요.

이것저것 재밌는 것들을 많이 찍고 싶어요.

A: 그럼 직업은요? 어느 쪽으로 일하실 생각이세요? 그 분야 되게 힘들잖아요.

: .. , 맞아요. 글쎼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 들어왔어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일어나는 대화의 전형적인 레파토리다. 내 인생의 스펙트럼을 스스로 설계하며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나에게 종종 사회의 기대감으로부터 오는 괴리감은 나를 비정상인으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말하자면 나는 탄탄한 포장도로 옆 샛길로 굳이 험난한 길을 택하고 있는 정상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다. 어떨 때는 아직 현실을 모르는 애라며 질타를 받기도 하고, 어떨 때는 멋있다. 부럽다. (하지만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분열적인 시선을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었다. ‘세상에 좋아하는 일만 하는 사람이 어디있냐? 그냥 아무거나 일단 시작해서 꾸준히 해보는거야. 그러다보면 그 일이 좋아지는거지. 너 같은 애를 피터팬증후군이라고 하는거야. 취직을 위해서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공부하고 싶어서가 이유라니. 그것도 인문학을.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다.’

 

그런가? 나는 피터팬 증후군인가?

 

하지만 영화과를 선택하고, 여행을 다니고, 완전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다른 분야의 것을 공부해보기도 하고, 대학원에 들어오고, 다시 공부를 하는 지난 날의 나의 발자국에.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 나갈 내 발자국들에 나는 한 치의 후회도 없다. 당신의 말은 단 몇 초의 고민으로 내밷은 걱정이겠지만 내가 걸어온 길은 24시간 내내 나에 대한 생각과 고민으로 선택한 후회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답만을 원하고,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 교육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어쩌면 스스로 답을 만들어내는 서술형식 삶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나를 다독이고 당신을 다독이고 싶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시간이 존재한다. 철수는 철수의 시간을. 영희는 영희의 시간을. 나는 나의 시간을 말이다. 그러니 걱정말자.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당신의 시간을 살면 된다.

나는 조금 느리다. 그리고 느린 만큼 오래 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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