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은폐하고 보수는 외면했던 개성공단의 진실

추재훈

도대체 왜 개성공단이 평화를 위한 안전장치란 말인가? 애초에 적지(敵地) 한가운데 협력적 공단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오늘날 개성공단 존폐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개성공단이 기획된 의도가 상당부분 숨겨져 있기 때문에 유발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성공단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다. 하지만 개성공단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제 자체는 너무나도 불충분하며, 그 숨겨진 의도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개성공단과 평화 혹은 안정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론적·현실적 구상과 근거들이 숨어있다. 이를테면 전략적 요충지인 개성에서의 북한군 후퇴, 개성공단을 근거로 하는 한반도 국제경제지구의 가능성 확대 등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그래서 꼭꼭 숨겨질 수밖에 없었던 개성공단의 성격이 있다. 신자유주의다.


개성공단이 극도의 우파 자본주의적 기획의 결과였음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개성공단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가운데, 개성공단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전무하다. 이 때의 전략은 단순히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개성공단은 햇볕정책이라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정책의 산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좌파·우파와 진보·보수라는 이념적 구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좌우와 보혁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가 만연한 사회기 때문인 탓도 있다.


▲ 정부가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조치로 개성공단 가동을 전면 중단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지난 11일 오전 경기도 파주 경의선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차량에 물품을 싣고 복귀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분단체제, 좌-우, 보-혁의 왜곡


개성공단을 이야기하기 전에 좌우와 보혁에 대해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 좌파-우파, 진보-보수의 틀은 복잡하다. 그러나 핵심은 간단하다. 먼저, 좌파-우파는 결코 민주주의와 관련된 구분이 아니며, 경제적 지향성과 관련된 구분이다. 우파는 사익 중심의 자본주의를, 좌파는 공익 중심의 사회주의를 지향한다(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레닌이 기획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소수 경제기득권의 횡포를 방지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본연의 이념이다. 북한을 결코 사회주의국가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진보와 보수의 경우, 진보는 보다 개혁적인 사람들, 보수는 보다 현상유지적인 사람들의 집합이다. 진보와 보수가 일률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란 없으며 시대에 따라 변한다. 카이사르 시절 로마에서는 공화주의자들이 보수, 왕정주의자들이 진보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근대 이후의 세계는 영미식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이므로, 우파는 자연스럽게 보수로 귀결되었다. 마찬가지로 좌파와 진보 또한 연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말 공산권이 붕괴하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사실에 입각한 채로 개성공단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개성공단은 우파적 이념의 발현이다. 개성공단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대한민국의 자본으로 북한에 공단을 짓고,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을 남북이 나누어갖는 것이다. 북한은 노동력만 투입하고 인건비를 벌어들이며, 나머지 이익은 한국 기업이 갖는다. 경제적으로 봤을 때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의 돈 놓고 돈 먹기 전략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원리다.


▲ 지난 12일, 개성공단기업협회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진 새누리당(左)과 정의당(右) ⓒ오마이뉴스


개성공단, 극도의 자본주의


따라서 이런 식의 공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북한은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커진다. 북한이 개성공단을 쉽사리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개성공단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성공단이 아직까지 북한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처럼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을 때 개성공단을 버릴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즉, 개성공단은 더 커져야 했다. 가령 지금까지 개성공단에는 총 123개 기업이 입주해있었는데, 만약 1,230개 기업이 있었다면, 혹은 한미의 협조 하에 삼성이 들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남북이 구상한 대로 해주공단, 신의주공단까지 만들어지고, 나아가 함흥공단, 원산공단 등이 만들어져 몇 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한국 기업으로부터 월급을 받았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북한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커졌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지금 중국의 영향력과 맞먹거나 혹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북한 정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한이 남북경협을 통해 천문학적인 세금을 거둬들이고 여기에 크게 의존할 만큼 대남의존도가 높아졌다면, 그래서 경협 중단이 정권 운영에까지 타격을 입힐 정도가 된다면, 지금처럼 남북경협 중단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무작정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자행할 수 있을까?


우파가 보수와 교집합이 많고 좌파가 진보와 교집합이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왜 햇볕정책과 개성공단이 자칭 보수세력에게 지탄받는가? 그것은 안보지상주의가 만연한 한국의 분단체제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우파적 보수성을 지향하는 사람조차도 정치적으로 반공적·안보적 보수성에 매몰되는 분단모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컨대 이것을 북풍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북풍이 향하는 곳은 이른바 좌파 혹은 종북이라고 이름붙여진다. 이곳에는 안보지상주의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들이 뒤섞여있는데, 진정한 의미의 우파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상당한 국민들은 이를 믿는다. 개성공단은 경제적으로는 철저한 우파적 논리에 따르지만, 분단국의 왜곡된 정치지형 속에서 개성공단이 좌파적이라는 모순적인 비난이 생겨난 것이다.


▲ 개성공단 총계획(左, ⓒ용인시민신문). 계획은 2008년 이후 남북관계 악화와 더불어 중단되었고, 현재는 1단계까지만 진행되었다(右, ⓒ시사저널).


전장에서 시장으로


햇볕정책이 우파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햇볕정책은 남북의 경제적 협력에서 시작해 정치적 협력까지 이끌어낸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이를 기능주의라고 한다. 기능주의는 “자유로운 교역은 전쟁을 억지한다”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모태가 되어, 현대 유럽에서 통합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 유럽연합의 근거가 되었다. 즉 기능주의란 단순히 일상적·평면적 신뢰가 아니라 기능적 협력을 통한 관계적·전략적 신뢰의 구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럽은 기능주의적 사고에 따라 각종 경제적(기능적) 협력을 펼쳐나가면서 1958년에 유럽경제공동체(ECC)를 만들고, 이를 1967년에 유럽공동체(EC)로 발전시키고, 마침내 1991년 유럽연합(EU)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 유럽은 경제위기에 고전하고 있지만, 위기에 맞서 더욱 전향적인 통합을 위해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대전 후 어수선했던 유럽이 통합되는 과정을 벤치마킹한 정책이 햇볕정책이며, 그 속에서 설계된 결과물이 개성공단이다.


그런데 남북은 유럽과 크게 두 지점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로 유럽의 전반적 경제격차에 비해 남북 경제격차가 훨씬 심하다는 점, 둘째로 유럽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안보협력체가 1949년 먼저 만들어져 있었던 점이었다. 남북 경제격차는 유럽 통합이 진행되던 때 유럽 내부적 격차보다 훨씬 심하므로 한국 자본이 북한에 투입되면 될수록 북한의 경제적 종속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남북의 첨예한 군사적 대립은 경제협력의 심각한 제약이었으며, 따라서 경협은 군사대립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보다 전향적으로 시도되어야 했다.


▲ 유럽공동체(EC)는 1991년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EU(유럽연합)으로 출범했다. ⓒAPF


시장에서 광장으로


대한민국이 햇볕정책 구상을 처음 내놓았을 때 북한이 격렬하게 반대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고민했던 부분도 이 부분이다. 두 정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지 몰라도, 햇볕정책은 본질적으로 북한 경제의 한국에 대한 예속을 심화시키는 극도의 자본주의 정책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두 정부는 햇볕정책이 평화를 위한 정책이 될 수 있도록 경제적 팽창주의로 비춰질 수 있는 언행을 최대한 삼가고, 사회적·문화적 협력을 병행하며 정치·군사적으로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역사, 학문, 예술, 종교, 스포츠 등 수많은 분야에서 남북 협력이 이루어졌고,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을 걷고 있는 최근까지 만월대 공동 발굴 등의 협력을 지속할 수 있었다. 북한은 같은 노동력을 투입했을 때 남북경협보다 북중경협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지만 개성공단을 더 전향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햇볕정책이 자리잡기 시작한 2003년 이후 대남도발은 없었으며, 공교롭게도 햇볕정책이 멈춘 2008년 이후 북한은 대남도발을 자행하기 시작했다(이 지점에서 핵 문제는 분명히 북한의 책임이 크지만, 단순히 남북 간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동북아시아 및 세계 전체의 문제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의가 바탕이 됐을 때 개성공단이 남북 안정과 평화에 기여한다는 명제는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햇볕정책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이고, 개성공단이 그 결과물이라는 이유로 비판하고자 함은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여러 문제점을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그것이 제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앞서 살펴본 대로 신자유주의를 통해 최소한의 안정적 남북관계를 일구어낼 가능성은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식의 사고가 불만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우리나라의 왜곡된 정치지형에 의해 개성공단이 이상한 오해의 온상이 된 현실이다.


오늘날 북한문제와 관련해 중국역할론과 중국책임론이 나오는 이유는 중국의 대북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대외교역 중 대중교역이 90%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런 전략적 노력을 하지 않으면서 중국이 북한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이에 반해, 지금은 중국이 전유하고 있는 대북영향력을 대한민국이 스스로 갖고자 기획된 것이 햇볕정책이었다. 또한 그 영향력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경협이 늘어났다면 우리가 지금과는 달리 주도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남북이 함께 일구어낸 성과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 정부도 강조하는 신뢰와 평화라는 원칙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개성공단은 결코 헛된 공상이 아니다.




부조화의 조화


단어에는 의미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여있다. “고독”에는 짙은 외로움의 감정이, “여행”에는 낭만에 대한 그리움이, “복면”에는 익명성이라는 담론이 내포되어 있다. 특정한 단어가 포괄하는 다른 ‘무언가’는 시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때문에 단어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내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무엇과 연결되는지 면밀히 고민해야한다. 2015년 겨울, “복면”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다가오고 있을까. 테러리스트의 폭력성이 깃들고 있는 복면이라는 단어를,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해도 되는 걸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서로 연결되는 현상은 흔하다. 예를 들면 ‘푸른 종소리’나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와 같은 공감각적 표현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새로운 차원의 심상을 만든다.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만 봐도 가슴이 뛰거나, 헤어진 연인과 함께 듣던 노래를 들으면 슬퍼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 ‘부조화의 조화’ 현상은 보기보다 강력해서, 심리치료에까지도 이용된다.


때문에 특정 단어가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 단어와 관계된 것들을 꺼린다. 그러다가는 그 단어 자체는 물론 관련된 것 모두를 거부하게 된다. 소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가 대표적인 예다. 마법사들에게 볼드모트는 곧 죽음이었다. 마법사들은 볼드모트라는 이름을 의도적으로 입 밖에 꺼내지 않음으로써 그를 두려움 자체로 만들었고, 볼드모트를 두려움으로 대상화함으로써 그에 대한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했다. 볼드모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더욱 막강한 공포권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 해리포터와 볼드모트. ⓒ네이버영화


단어, 프레임


같은 것도 그것을 나타내는 서로다른 단어에 의해 여러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단어는 가장 효과적인 ‘프레임’이다. 일례로, 교정에서 부조리를 폭로하고, 서투르게나마 올바름을 말하는 학생들을 흔히 ‘운동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순간, 학생들은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지닌 느낌(강경함, 진보지향적, 조직적, 융통성 없음, 반사회적 등)에 매몰된다.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몇몇 학생에게는 잘 들어맞을지도 모르나, 모든 운동권 학생에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그 매몰은 실제 운동권 학생들이 지닌 신념이나 태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 ‘운동권’은 외재적인 프레임이다.


대학교에 막 입학한 새내기 시절, 90년대에 대학에 다닌 선배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선배는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었는데, 그 때를 이렇게 추억했다. “극도로 진보적이었고, 극도로 보수적이었어.” 전자의 진보는 선배가 속했던 정치적 진영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후자의 보수는 진영 속에서 선배의 태도였다. 대립적인 두 단어가 동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는 단순히 정치 진영을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광대한 의미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에 따라 다른 프레임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 지형의 진보와 보수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보와 보수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지칭하는 정치 진영 현실 간의 심각한 부조화를 느꼈을 것이다. 보수와 진보(혹은 우파와 좌파)는 시대와 지역과 집단에 따라 너무나도 다양하게 해석된다. 보수와 진보라는 담론이 한국 사회의 특정 진영을 의미할 때, 보수와 진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것이 내포하는 다른 ‘무언가’들도 그 진영에 귀속된다.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며, 누가 보수적이고, 누가 진보적인가 하는 질문의 답은 복잡하게 뒤엉켜버린다.



▲ 종단문제 해결을 위해 50일 간 단식농성을 한 동국대학교 김건중 부총학생회장 ⓒ오마이뉴스


보수의 프레임


동국대의 경우, 2014년 12월부터 조계종의 학교 행정 개입, 총장의 논문 표절, 이사장의 탱화 절도사건 등이 문제시되며 학생과 학교당국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학생들의 반발은 총학생회 부총학생회장의 50여일에 걸친 단식농성까지 이어졌으며, 그 결과 12월 3일 동국대 이사회는 모든 이사의 사퇴를 결의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은 학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저항하는 학생들의 태도다. 그들은 소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저 진보적인가? 아니다. 저항하는 동국대 학생들은 누구보다 보수적이다.


저항이란 근원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다른 무엇보다 보수적인 행동이다. ‘저항권’이라는 개념은 근대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존 로크에 의해 공식화되었다(물론 로크의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시민들에게 권한을 위임받아 구성된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시민의 자연권을 침해할 경우,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저항하고 정부의 변화나 교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민중총궐기를 두고 폭력이냐 아니냐의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지양되어야 하며, 누구나 폭력을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에 대한 비난이 사람들이 말하고자 했던 것에 대한 비난과 연결될 순 없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랐다는 이유로 배척되지 않듯, 폭력 자체와 이를 자아낸 시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단지 폭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현상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온, 복면의 마스코트가 된 ‘가이포크스’ 가면. ⓒ네이버영화


보수의 제국, 검열관의 천국


서울대학교의 최인철 교수는 그의 저서 <프레임>에서, 프레임은 “우리가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발언 이후 복면에 덧씌워진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는 시위대에게 끔찍한 폭력성을 부여하며,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시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연결한다. 복면을 폭력과 시위를 통제하는 내면의 검열관으로 만든 것이다.


민중총궐기는 경제민주화와 공약 폐기를 넘어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정부에 대해 쌓여온 불만의 응집이며, “헌법의 가치를 지켜라”고 외치는 시민들은 너무나도 보수적이다. 이를 철저히 외면한 채, IS 운운하고 저항권을 필요악으로 규정하며 “복면을 벗으라”고 외치는 자칭 보수 세력은, 폭력에 대한 비난을 무기삼아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한다. 흔히 말하는 ‘물타기’며, 헌법이 지향하는 ‘저항’을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다.


보수는 신성하다. 보수는 과거의 가장 빛나고 찬란하던 가치와 신념들이 변화하고 재구성되며 만들어낸 시대정신이며, 피땀흘리며 세워놓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집중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자가 진정한 보수주의자다. 반대로, 시대정신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모순에 집중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식과 노력의 집합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앞뒤 다퉈가며 왜곡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보수가 아니며, ‘보수’라는 복면을 쓴 친정부적·반국가적 세력이다. 시위대의 복면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전에 ‘보수’라는 가짜 복면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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