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여섯. 무언가에 쫓기듯 재빨리 대학과정을 수료했고, 그 덕분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백수가 되었다. 주변 친구들은 이것저것 참 준비들을 많이 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몸과 마음 모두 한량이나 다름없다. 간간이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신문과 책을 읽는 걸 제외하면 딱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기껏해야 1주일에 한 번씩 축구하는 걸 보탤 수 있을 것이다). 심각한 나태다. 비록 몸은 집이라는 공간에 있지만 정신은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 쉽게 말해 나는 방황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의 방황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나?

돌이켜보면 내게는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방향이 없었기에 뒤늦은 방황은 필연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껏 큰 사건 없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살아왔다. 그렇다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냐 하면, 그것도 의문이다. 고백하건대 사실 내게는 사춘기도 없었다. 일단 충돌이 일어나면 비켜가는 스타일 때문이라는 내부의 원인도 있지만 그보다 본질적인 원인으로 사건 자체가 많지 않았다.

 

찢어진 축구화와 증발해버린 꿈

그러나 내게도 기억될만한 사건 하나는 있었다. 굳이 방황의 근원을 찾자면 유년시절을 꼽을 수 있겠다.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그때 나는 막연하게나마 축구선수를 꿈꿨다. 당시 축구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또 지금도 왜 축구를 끊지 못하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이끌리는 데에는 반드시 이성만이 작용하지 않으니까.

어쨌든 간에 중요한 건 내 꿈이 좌절됐고 그 과정에 스스로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학원에 가지 않고 몰래 운동장에 공을 차러 나갔다는 소식에 부모님은 이성을 잃었다. 이내 내가 가장 아끼던 축구화를 가위로 오려냈다. 그때 나는 저항했어야만 했다. 멍하니 찢어진 축구화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이내 학원을 갔다. 그날 이후 축구선수라는 꿈은 내 마음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한 가지에 ‘올인’한 적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는 1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법칙도 있는데 그 이론이 사실이라면 나는 성공하기 글렀는지도 모른다. 한 우물을 파는 건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았다. 축구선수라는 꿈이 좌절된 후, 내게는 경찰, 검사, 사회복지사, 기자 등의 꿈이 다시 등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진득하게 준비하지 못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꿈은 있지만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이내 포기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오는 변덕 마다하지 말자

쉽게 말해 나의 병은 변덕이다. 변덕은 무서운 병이다. 이 병은 환자가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진득하게 앉아보려 해도 도무지 좀이 쑤셔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든다. 병을 치료할 약을 찾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써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스운 말인지도 모르겠지만 변덕을 고치려면 변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말하자면 어차피 변덕 부릴 거, 좀 더 주체적(?)으로 부리자는 거다. 오는 변덕 막을 수 없다면 마다하지 않고 변덕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 변덕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다방면의 분야에 얕은 지식이라도 쌓아 멀티 플레이어로 살아나가는 것. 현재 내가 지향하고 있는 길이자 끝없는 방황에서 내린 결론이다. 변덕에 이용당하느니 주체적으로 변덕을 활용하는 게 사실상 같은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심적으로는 안정감을 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방황하는 삶에도 근사한 점은 있다. 새로운 일에 잠시나마 고무되어 무력감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한쪽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다른 쪽 일을 추진함으로써 불안감에서 해방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무력과 불안에서 벗어난다고 그것이 곧장 행복과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자극이 없으면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게 방황하는 이들의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정리하자면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도 않은 중간항의 상태. 그런 상태가 방황하는 이의 처지다. 아이러니하게도 방황을 그만두는 순간, 행복과 불행은 온다. 함께 혹은 잇따라 찾아올 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둘(중 하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진: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라커의 [무념유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하기의 어려움  (1) 2015.06.15
특별한 사람을 찾아서  (0) 2015.06.03
다락방의 추억  (0) 2015.05.01
통화 연결음  (0) 2015.04.15
시와 도의 경계에서  (1) 2015.04.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