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부터 급격하게 가속화된 사드 논란을 지켜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대통령은 왜 사드에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답은 간단했다. 그녀는 이상에 사로잡혀있다. 추재훈


사드가 왜 불필요한지는 명확하다사드가 왜 불필요한지는 명확하다. 전술적으로, 첫째로 사드는 미 본토 방어용 MD체계의 일환이다. 미국 태평양사령관, 미사일방어국장 등은 이미 수 차례 이 사실을 미국 의회에서 확인했다. 둘째로, 북한이 한국에 미사일을 쏠 정도의 전면전이 벌어지면 사드는 이미 필요 없다. 북한은 먼저 수천 문의 야포, 중거리 미사일, 생화학 무기 등으로 이미 남한 지역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안보주의자들이 걱정하는 미지의 땅굴로, 수십만 명의 인민군이 이미 침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셋째로, 북한이 한국을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형 미사일로만 공격할 필요도 없다. 최근 북한이 신이 나서 개발하고 있는 SLBM이 그 대표적인 증거다. 마지막, 사드는 한반도라는 야전의 최전선에 설치하기에는 그 효과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번의 어설픈 실험만 거쳤을 뿐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드의 정치적인 효과다. 사드는 중국과 북한을 단단하게 결속시킨다. 사드를 통해 미중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냉전적 갈등구조가 심화되면, 중국은 북한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사드는 국내의 북한붕괴론을 붕괴시킨다. 필자는 북한붕괴론을 믿지 않지만, 북한붕괴론을 위해서 강력한 대북제재가 필요하다는 논리 자체는 이해한다. 이를 위해 4차 핵실험 이후 간 열심히 노력했던 것도 안다. 그런데 북중동맹이 강고해지면 대북제재는 효과를 잃는다.


북한에 대한 강경일변도는 보수의 정체성과도 같다. 북한 카드는 지금까지 지금껏 여권을 단단하게 결집시켰던 핵심 카드다. 그런데, 사드는 이마저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이토록 엉망진창이다. 외교적 이익도 없는데, 집권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북한과의 적대적 공생관계마저 포기하면서, 뭘 위해서 사드를 추구하는가? 그녀의 특성을 보면 그녀가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 그녀는 독재자의 딸이다. 독재자는 국가를 사유화한다. 유년기부터 자아를 확립하는 청소년기까지 독재자 슬하에서 자라며, 그녀는 국가운영에 대한 독재자의 사고방식을 깊게 내면화했다. 유신정권 붕괴 후 오랜 기간 칩거하다가, IMF사태로 정계에 나선 이유도 그와 같다. 아버지가 어떻게 일구어놓은 나란데,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일구어놨다는 생각도 틀렸지만.


, 그녀는 보수의 상징이다. 한국의 보수는 정치·경제적 지향성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이념으로 뭉친 집단이다. 친일에서 독재로 이어지는 보수 집권의 역사 속에서, 보수는 안보위기 결집효과를 위해 북한을 이용했다. 그 과정에서 반북=대한민국이라는 강력한 프레임이 형성되었고, ‘평화통일과 같은 진보적 담론마저도 흡수해버리며 반북 이데올로기는 확대·발전했다.


, 그녀는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다. 공감능력도 없다. 유신정권이 무너진 후, 아버지에게 충성하던 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것을 그녀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총격 피살과 배신이라는 엄청난 고통과 슬픔을 혼자 견뎠고, 다른 사람의 슬픔 따위는 자신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리더는 팔로워에게 일정한 권한과 책임감을 부여해야 하는데, 남을 믿지 못하는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에게 세심한 부분까지 일일이 간섭하는 이유다. 독재자는 자기 자신밖에 믿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대통령이 7월 14일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국무위원(과 국민)들에게 사드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세월호가 눈물로 가라앉을 때, 애초에 공감능력이 없는 그녀는 공감할 줄 안다는 위선마저 내다버렸다. 사드를 배치하면서는 보수의 전통적인 논리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대북제재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안하고, 비핵화와 통일이라는 속 빈 레토릭에만 지겹도록 매달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명령과 복종의 일사분란한 체계 속에, 온 구성원이 똘똘 뭉쳐, 북한에 맞서 싸우며 번영하는, ‘나의 대한민국’이라는 허상이다. 그녀는 이렇게만 하면 만사형통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나의 대한민국’ 안에는 아무런 신념도, 철학도, 지혜도 없다. ‘민혁당’의 슬픈 역사와 ‘하얼빈’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를 말하며, 국민은 여전히 영도가 필요한 자식들이라 믿고 가르치려 드는 그녀에게, 민족이나 역사나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그녀의 대한민국은 보수의 대한민국과도 다르다. 보수가 건국절을 말하는 이유는, 친일과 독재의 과거를 뒤덮고 북한을 부정하며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프레임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녀가 건국절을 말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 아버지가 일으키고 자신이 유지하는 사유물이기 때문이다.


사드는 대통령에게 최초에는 방어용 체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드 논란이 곪아서 터져버린 지금, 사드는 더 이상 국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의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었다. 사드마저 포기해버리면, 대통령의 ‘나의 대한민국’은 무너진다. 이것이 그녀가 사드에 집착하는 이유다. 역사는 독재자를 잊었지만, 그녀는 독재자를 잊지 않았다.





사드와 핵실험의 양면성



동북아시아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북한이 판세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정권유지’라는 목표에서 단 한발자국도 떨어져있지 않다. 세상에 북한만큼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나라도 없다. 몇 년에 한 번 정부가 바뀌는 민주국가에 비해 관료의 변화가 극히 적은 북한은, 수십 년 간 외교의 장에서 온갖 경험을 겪은 관료들로 중무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주체사상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떠받들고 있다.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드는 김일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덤이다. 북한이 예측불가한 나라라는 생각은 오판이다. 그들이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면, 그들의 과거와 주체사상만 들여다보면 될 정도로 일관성있는 나라다. 따라서 그들이 일으키는 외교적 기획이 얼마나 잘 설계된 것인지 아는 주변국은 북한의 이상징후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동북아시아의 21세기는, 북한 주변국들이 어떤 식으로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당근을 내밀며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과거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동북아 냉전적 갈등구조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햇볕정책의 시기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햇볕정책에 대한 직접적 옹호가 아니라, 사실이다. 여기에 북한은 계속 싸워댔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 북한이다. 핵개발, 미사일실험, 경제협력 등, 북한이 지금껏 취했던 대외적 기획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판세를 좌우하는’ 동북아 법칙을 최대한 활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핵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핵실험은 대외적 효과는 테러에 치를 떠는 미국을 위협하여 미국을 아시아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이에 반발하는 중국의 뒤에 잠시 숨는 것이다. 즉, 한미일, 북중러의 냉전적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숙명적 형제이자 적국인 한국이 자신과 협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국민을 통합하고, 정권의 위상을 드높이고, 필요에 따라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음은 옵션이다. 한국이 남북경협을 중단하면 어떠랴, 어차피 그 카드는 아직 설익은 카드다.


한 손에 핵을 쥐고 있는 것 자체가 북한에게 안정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언젠가 협상을 통해 불가역적으로 정권의 생존을 보장받는 것이 북한의 노림수다. 이러나저러나 핵은 북한에게 꽃놀이패다. 간헐적으로 동북아를 뒤흔드는 핵실험을 보면 북한이 보인다.




이제 눈을 남쪽으로 돌려 사드 배치 문제를 보자. 성주에 배치된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막는데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하다. 조금 양보해서, 사드가 북한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고 치자. 북한이 남쪽으로 별 공격 효과도 없는 고고도미사일을 발사할 정도의 상황이 발생했다면, 수천 문의 장사정포와 생화학무기가 이미 한반도 남쪽을 초토화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핵폭탄도 터진 뒤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사드배치 논란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 사드배치의 대외적 효과는 미국패권에 치를 떠는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을 한반도 문제에 더 깊숙이 끌어들이고, 미국 뒤에 쏘옥 숨는 것이다. 즉, 한미일, 북중러의 냉전적 갈등구조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숙명적 형제이자 적국인 북한이 신이 나서 SLBM을 발사하는 것이다. 대내적으로 국민은 극단으로 찢어지고, 정권의 위상은 땅으로 추락하고, 필요에 따라 불순세력을 이용할 수 있음은 옵션이다. 중국이 대북제재를 중단하면 어떠랴, 어차피 그 카드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던 카드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라가 어디일까? 한국… 정부… 대통령이다. 사드배치, 개성공단 중단, 위안부협상 등, 대통령이 지금껏 취했던 대외적 기획들은 하나같이 ‘북한이 판세를 좌우하는’ 동북아 법칙을 최대한 활용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의 3년은, 미국과 일본이 어떤 식으로든 한미일 공조체제로 한국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당근을 내밀며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한일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위안부 협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이다. 여기에 한국은 홀랑 넘어갔다.


세심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일본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에 비해 한 달에 한번 꼴로 사고를 내는 한국 정부는, 정치의 장에서 도통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관료들로 중무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대통령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떠받들고 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역사에 대한 처참한 지식수준은 덤이다. 한국의 외교정책이 예측불가하다는 생각은 오판이다. 외교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면, 한국 정부와 대통령만 들여다보면 될 정도로 일관성있는 나라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일으키는 정치적 파문이 얼마나 허술하게 설계된 것인지 아는 국민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한국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정부가 판세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대통령 안정’이라는 목표에서 단 한발자국도 떨어져있지 않다. 세상에 한국 정부만큼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정부도 없다.


핵실험이 북한 정권의 국가적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는 만큼, 사드는 한국의 대통령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고 있다.






큰 선거들을 앞두고 정당들은 대개 굵직한 캠페인 광고를 집행합니다. 대통령 선거인 경우는 TV나 신문을 통한 광고전이 치열합니다. 후보자의 (밀고 싶은) 이미지를 전국의 유권자에게 알릴 수 있는 최대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입에 감기는 슬로건, 참신한 이미지를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실 저는 대선 광고가 선거에 미치는 영향은 회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스마트 기기가 활성화되면서 유권자는 TV 외에도 후보의 정보들을 원하는 만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TV에서 후보자를 치장해도 유권자는 후보의 이면들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TV 광고는 아직 역할이 남아 있습니다. 스마트폰보다 TV가 더 친숙한 장년층 이상의 유권자를 위한 어필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TV 광고는 단방향성,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이미지 중심 매체라는 것입니다. 전국적으로 방송되는 이 매체를 통해서, 유권자들은 30초라는 시간 동안에 광고에 노출됩니다. 유튜브처럼 의견이 형성되고 상호 공유되는 것에 제한이 되기에, 유권자에게 후보자의 존재나 이미지를 알리고 가르치기에 딱 좋은 매체입니다. 한마디로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는 광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고는 대개 후보의 캐릭터와 소통 방식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2012년 대선에서 ‘여자1번 후보’와 ‘남자2번 후보’의 광고들을 단편적으로 비교해볼까 합니다. 대선 TV 광고가 좋은 사례들도 많지만, 굳이 이 해의 두 광고를 뽑은 것은 가장 최근의 대선이기도 하지만, 극명하게 다른 시선을 가진 광고였기 때문입니다. 


여자1번_개인에, 개인에 의한, 개인을 위한


준비된 여성 대통령 (2012, 새누리당)

2006년에 있었던 피습사건이 모티브인 것 같습니다. 후보의 인생이야기를 다룬 광고는 많았지만, 특정한 사건을 다루어 어필한 적은 이례적입니다. 사건과 상처를 통한 후보의 깨달음, 생각 등을 어필하고자 하는 것이 광고의 주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상처를 입었던 본인의 네거티브한 상황, 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광고에서 논리정연함보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나타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수반을 꼽는 광고에서 메시지는 배제된 채 일방적으로 감정적 호소만 한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해보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국가로 접근이 아닌, 후보자 개인으로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떤 뚜렷한 메시지나 주제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험 많은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새누리당, 2012)


이 광고에서도 개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경험 많은 선장’의 이야기를 통해 후보의 오랜 경험으로 위기에 강한 준비된 리더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짧지만 대체로 자기 PR의 성향이 강한 광고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수반으로써의 PR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광고든 명확한 소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잘했는지는 알겠지만, 무엇을 잘하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의지가 결여되어 있음에도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이제 와서 보니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광고를 보면 후보 개인에 초점을 맞춘 광고입니다. 단순히 개인을 어필하기에는 좋은 광고입니다. 하지만 대선 광고에는 개인보다는 국가를 우선으로 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생각하는 국가보다 대통령으로서의 어젠다를 유권자에게 피력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서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은 이미 후보 개인이 곧 국가라는 점으로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유권자가 보는 관점에서 유권자를 위한 광고가 아닌 개인을 위한 광고라는 점에서 과거의 프로파간다와 많이 닮은 모습이 보입니다.


남자2번_참신했지만 전형적인 야당 후보


사람이 먼저다(민주통합당, 2012)


남자2번 후보의 가장 첫 광고인 ‘출정식’ 광고입니다. 여기서 명확히 보이는 점은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점이다. ‘평등, 공정, 정의’라는 세 키워드를 들어, 새 시대를 열 것을 말합니다. 얼핏 보면 다소 뻔한 키워드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정의로운 결과, 공정한 과정...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교과서적인 정치의 이상향입니다. 그럼에도 왜 굳이 이 단어를 말해야 했던 것은, 그렇지 않은 우리 현실임을 방증시키기 위함이었을 겁니다. 현실에 젖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잊은 국민에게, 어떤 것이 문제인지를 짚고 대안의 방향을 말하고 싶은 것이죠. 야당이라면 당연히 견지해야 할 포지션이라고 봅니다. 원색적인 비난보다는 더 논리적인 전략이었지만, 유권자에게는 키워드가 다소 ‘뻔하다’는 느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자2번 후보는 제1야당에서 나왔습니다. 당에서는 후보에게 정권 심판이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하지만 국민에게 무작정 ‘정권 심판’이라는 슬로건을 외쳤다가는,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딱지가 박힐 것이 뻔합니다. 메시지에는 포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미지도 어느 정도 가꾸고, 유권자가 생각하는 기준과 니즈를 건드려야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의 여부까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남자2번 진영은 그 포장을 국민의 현 실정으로 선택했습니다.


문재인의 이름으로 당신도 출마해주십시오(민주통합당, 2012)


야당의 포지션은 매번 ‘친서민’이었기 때문에, 서민과 청년층을 타겟에 맞춘 광고를 냈습니다. 메시지 자체에도 정당의 기존 당론, 후보의 지론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담겨있습니다만, 다소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애국가입니다. 2012년 유난히도 종북 공격과 사상 검증까지 휩싸여야 했던 후보였기에, 이 애국가가 조금은 절박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남자2번의 모습보다 유권자의 현실을 고스란히 나열하고 있습니다. 지나치는 현실이 문제라고, 그리고 이것을 바꾸겠다는 ‘정권 심판론’이라는 담론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남자2번의 광고는 타겟과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식의 대안이 ‘정권교체’라는 방식이 다소 답정너처럼 보여집니다.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논리 전개가 있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카피는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후보와 정당이 말해야 하는 메시지의 정수가 헤드 카피인데, 그 헤드 카피의 자리를 유권자에 내주었다는 것은 마땅히 칭찬해야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대선 광고는 무엇인가



물론 광고의 힘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상품 광고는 잘 팔리게 만들어야 좋은 광고이지만, 대선 광고는 후보를 당선시켜야만 좋은 광고일까요. 글쎄요. 정치 광고에서는 상술과는 별개의 기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저는 도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거티브 광고를 하는 것도, 좋은 이미지만 보여 주는 것도 정당과 후보의 자유입니다. 흑색선전도 전략의 한 종류니까요. 그러나 허언이나 과장은 대선뿐만 아니라 모든 광고에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광고는 소비자와 브랜드간의 상호 신뢰를 전제하에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오래된 브랜드일수록 소비자들의 신뢰는 더 깊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유권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TV에서 보이는 약속과 모습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판단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광고 속 화려한 수사보다 더 필요한 것은 대중이 믿을 수 있는 신뢰가 아닐는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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