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차를 타고 달린다. 기차가 터널 안으로 속력을 높이며 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귀가 막힌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난 뒤 빠르게 고도를 높일 때 전해지는 느낌과 같다. 비록 그것보단 자극이 덜하지만 그런 먹먹함은 순식간에 답답함으로 바뀐다. 열심히 턱을 위아래로 움직여 하품시늉을 한다. 그래야 내이와 외이 사이의 압력차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다.


나는 宇宙人이 될 팔자는 아닌가보다. 지상에서 기차를 타고 터널을 지나갈 때 이정도의 먹먹함을 느낀다면, 그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 대기권을 뚫고 가야하는 우주여행은 얼마나 힘이 들까. 겨우겨우 우주공간에 나왔을 때 나는 귀머거리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우주는 진공이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음소거의 우주여행을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지금은, 진주星으로 가고 있다.



*


나는 다음 행선지인 진주를 가기 위해 안동에서 열 시에 기차에 올라탔다. 두 시간을 달려 동대구역에 도착하고, 환승을 한 뒤 또 두 시간 가량을 달려 진주에 도착했다. 환승하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꼬박 다섯 시간이 걸렸다.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은 이유로, 나는 진주성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통 내일로 여행자들이 잘 택하지 않는 진주로 오게 된 것이었다. 


한참 여행경로를 짜고 있을 때, 진주가 고향인 동아리 후배 H의 생각이 났다. 남들이 쓰지 않는 소재로 잘도 소설을 써냈던 그는 2년 동안의 대학교생활과 1년 동안의 동아리 생활을 뒤로하고 의무 소방으로 입대를 했다. 한 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진주 바로 옆 D시에 배정이 된 것이 5개월 전 일이었다. 나는 H에게 SNS를 통해 연락을 했다. 군부대가 아닌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H였던 탓에 어렵지 않게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나의 진주 일정인 19일 날 H역시 외박을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H와 진주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원래 진주 기차역은 진주성 근처에 있었지만, KTX가 개통되면서 원래 역이 폐쇄되고 시내에서 버스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곳에 새로운 역이 생겼다. H와는 중간 중간 연락을 해가며 진주성 앞에서 네 시에 보기로 했다. 진주역은 조선시대 건축양식처럼 꾸며져 있었고 현판엔 또박또박 한글로 진, 주, 역, 이라고 쓰여 있었다. 역 앞에서 나는 진주성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진주나 서울이나 사람 사는 곳은 똑같았다. 장을 보고 집에 가려는 아줌마, 학원을 가는 학생 그리고 데이트를 하러 약속장소에 가는 젊은 여자까지. 그들 역시 버스를 타고 카드를 단말기에 찍었다. 


농협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그대로 길을 따라가 진주성 쪽으로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내 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H였다. 패션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그는 전혀 군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간편해 보이는 복장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오늘 그가 입고 나온 바나나가 그려진 노랑 티셔츠와 무릎께까지 오는 청바지의 조화도 멋있었다. 여름인데도 짧은 머리를 가리려는지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그와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내가 먼저 악수를 청하여 H에게 말했다.

“네, 형. 근데 소방서가 좀 짜증나요.”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말에 네, 해놓고선 바로 소방서에 대해 불평을 하는 그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매표소 앞에서 나는 이천 원을 주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진주 시민인 H는 진주성 입장료가 무료였다. 그는 돈 대신 신분증을 내밀고 입장권을 받았다. 입구 바로 앞엔 누각인 촉석루가 있었다. 잠시 땀도 식힐 겸 그곳에 올라갔다. 그곳에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H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본 게 작년 12월이었으니, 육 개월 만이었다. H는 진주에 살았지만, 진주를 잘 모른다고 했다. 형, 집에 너무 틀어만 박혀 글을 써서 그런가 봐요. 그리고 진주성도 마찬가지였다. H는 진주성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여기가 이랬었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쨌든, H와 나 모두 촉석루에서 바라본 남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했다. 눈앞이 탁 트이며 진주의 강남(江南)쪽이 모두 눈에 들어왔다.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코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건물이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파트나 고층건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울의 그것보단 훨씬 적었다. 


진주성 중앙 평평한 곳엔 박물관이 있었다. 상시전시로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이 있었고, 계절마다 전시물이 바뀌는 다른 한 쪽에서는 어떤 작가의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었다. 입장권 안에 박물관입장료까지 포함되어있었는지, 박물관은 따로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임진왜란에 관한 전시물들은 많진 않았지만 전쟁의 처음과 끝까지 그 시간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설명이 되어있었다. 거북선과 판옥선을 본 떠 만든 모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박물관에서 내려오는 길에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있었다. H에게 부탁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왠지 이번 여행의 베스트 컷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큰 칼을 허리춤에 찬 채 오른손으로 정면을 가리키는 동상은 그 크기가 크지 않았지만 용맹함이 느껴지기엔 충분했다. 



진주성 관람을 마치고 나는 H와 함께 그가 친구들과 술을 자주 마시러 갔다는 K대 근처로 이동했다. 방학이기도 하고, 시간도 일러서 문을 연 술집이 몇 개 없었다. 골목을 돌다가 적당한 술집을 발견하곤 그곳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니 좀 더 진솔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H와 단 둘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H는 나보다 네 살이 어렸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나의 것보다 전혀 쉽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라든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생긴 가족사이의 갈등.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H가 건강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제 3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H가 자신의 문제들을 잘 해결하리라 믿는다.

술을 먹는 중간, 동아리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몇 차례 통화를 했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들 역시 H와의 통화에 즐거워했다. 우리는 안주 하나를 더 시키고 먹은 뒤 술집을 나왔다. 


나는 원래 일곱 시 기차를 타고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술집을 나오지 여덟 시가 넘었다. 다행히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밤 버스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진주성이 있는 시내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열 시 버스표를 샀다. 아직 버스 시간까지 한 시간 이상이 남아, H와 나는 다시 한 번 진주성에 가보기로 했다. 아까 먹은 안주와 술을 소화시킨 다는 명목도 추가하면서. 


도로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거리가 뿌옇게 됐다. 아니, 내가 인식하지 못한 것인지 시외버스터미널을 나오면서 거리는 안개에 녹아들어간 것처럼 시야가 짧아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진주가 ‘진주’가 아닌 ‘무진’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무진에 가본 적은 없지만 김승옥의 소설 제목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주 시내는 불투명한 연기로 가득 찼고, 차들은 그 연기를 뚫으며 나아갔다.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난 뒤, 나는 그것이 소독차 때문에 생긴 연기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소독 연기가 무색무취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진주는 아직 이십 세기의, 그런 것을 아직 간직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랐던 것은, 여섯 시 이후의 진주성은 입장이 무료라는 사실이었다. 입장료를 받지 않은 이유는, 진주성 자체는 서울 도심에 있는 창경궁이나 경복궁과는 다르게 밤에도 시민들을 위해 개방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촉석루와 박물관을 비롯한 문화재들은 문을 꼭 걸어 잠갔다. 해가 완전히 지자, 진주성 곳곳의 가로등이 켜졌다. 아홉시가 다 되어가는 진주성 안에는 나와 H말고도 저녁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간혹 볼 수가 있었다. 진주성은 지주 시민들에게 그들의 도시에 있는 문화재뿐만 아니라 친근한 산책코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H도 그 사실을 오늘 처음 안 듯 신기해했다. 성벽 너머로 보이는 진주의 야경 역시 멋있었다. 저 멀리서는 다리가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드리운 어둠이 건물에서 켜진 빛과 어우러지면서 그대로 진주 남강에 투사되었다. 날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달도 보였을 텐데, 지금쯤 동해안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태풍이 못내 아쉬웠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 나와 H는 다시 진주성을 나왔다. 진주성 바로 앞에 12지신을 등불로 만든 상이 있었다. 나는 말 앞에서, H는 개 앞에서 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버스가 도착해있었다. 나는 H와 악수를 나누며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 있어. 다음 휴가 땐 서울 올라와. 계속 고생하고. 


버스는 열 시에 맞춰서 진주를 출발했다. 사람이 별로 없어 나는 내 몸통만한 가방을 옆자리에 두고 편안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의 첫 비를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맞았다. 청량한 비를 가로지르며 버스는 부산으로 향했다. 



1일 차


안동에 도착하니 낮 열두 시였다. 다른 도시에 왔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친가가 있는 이천과 외가가 있는 속초를 제외하곤 다른 도시에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도착했음을 알리는 통화를 한 뒤 시내로 들어갔다. 쇼윈도에 비친, 등산용 가방을 들고 안동시내 지도를 든 채 서성거리는 나는 영락없는 여행자이자 외지인이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했다. 간고등어 정식과 찜닭집이 있었지만 내가 간 곳은 패스트푸드점이었다. 햄버거를 먹으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월요일에 나보다 먼저 여행을 간 동생은 오늘을 기점으로 집에 돌아온다. 동생 역시 안동을 첫 방문지점으로 잡았다. 두 시 열차를 타고 올라온다고 하니, 내가 햄버거를 씹어 먹으며 전화를 걸었을 땐 점심식사를 마치고 기차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는 왜 안동까지 와서 그런 걸 먹어, 동생의 웃음 섞인 핀잔을 뒤로한 채 다음 주에 보자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식사를 마치고 구 시장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스호스텔이나 콘도에서 밖에 외박을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게스트하우스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가정집같이 생긴 그곳의 작은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짐을 풀어놓았다. 그곳의 매니저라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 이용에 관한 설명과 안동 주변지역 관광에 대한 설명을 듣고선 숙소를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었던 패스트푸드점이 있는 중앙의 젊음의 거리를 돌고나서 구 시장 거리까지 나아갔다.


<젊음의 거리에 있는 조형물>


아쉬운 점은, 이런 거리구 시장에서 특별함을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속초나 친구들과 함께 놀러갔던 포항. 그곳에서 보아왔던 시장거리와 젊음의 거리. 그 거리들의 생김새와 안동의 그것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있었다면 그것은 상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투리와 가판대에서 주로 판매되는 것이 찜닭재료인 닭이라는 것 정도였을까.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속초든 포항이든 안동이든 모두 같은 한국의 도시가 아닌가. 같은 문화생활권의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가판대에서 수산물 대신 팔고 있는 찜닭이 이곳이 안동임을 알려주는 자그마한 특징이자 차별거리였다. 외려 안동에서 이미 예전에 현대생활로 편입되어버린 구시대적 풍경이나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바랬던 내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타지에 갔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시내에 있는 유적. 고려 개국공신들을 모신 곳이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물>


시장 거리를 돌아본 다음에는 시내 오른쪽 위에 있는 벽화마을을 찾았다. 아마 마을 프로젝트로 조성했을 안동의 벽화마을은 그럭저럭 산책코스로 괜찮았다. 하지만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고 관리도 잘 되진 않는지 또 와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을 돌았는데 관광객은 나 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걸어서 젊음의 거리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안동에서 유명하다는 빵집에서 빵 두어 개를 사먹는 것으로 해결했다. 젊음의 거리 중앙에 있는 작은 분수대 근처에 앉아 잠시 사색에 빠졌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길거리엔 처음 보는 가게들이 줄을 잇는다. 이따금씩 재미있는 상호 명을 보고 웃음을 짓는다.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서 과거의 이곳을 유추해보고 미래의 이곳을 상상해본다. (2015年 7月 17日)

 


 

2일 차 

 

여섯 시에 일어났지만 게스트하우스 정숙시간이 24:00 ~ 7:00 인 탓에 일곱 시가 될 때까지 숙소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죽였다.

 

전날 저녁, 숙소에 돌아온 후엔 여덟 시부터 야경투어가 있었다. 시간에 맞춰 나도 따라 나갔다. 허름한 봉고차에 열댓 명이 타고 출발했다. 좌석이 좁아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갔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동강변에 설치된 음악분수였다. 여덟시 정각이 되자 음악이 나오며 분수가 작동을 시작했다. 분수에 설치된 조명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비춰졌다. 음악의 강약에 따라 조명의 색깔과 분수에서 뿜어지는 물의 세기가 달라졌다. 마치 컴퓨터에서 음악파일을 열면 볼 수 있는, 이퀼라이져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십 분의 공연이 끝난 뒤엔 월영교로 향했다. 월영교 근처에는 안동댐 상류에서 가져온 초가집 몇 개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모셨던 숙소, 그리고 석빙고도 있었다. 운전기사로 같이 온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소개를 곁들이며 그것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안동은 북방과 남방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했다. 초가집은 상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북방형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석빙고는 시원했다.

깨끗했던 날씨 덕분에 월영교는 그대로 검은 강물에 반사됐다. 올해도 지어진 지 12년 된 월영교는 안동시내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야경이었다. 구도만 잡아놓고 찍으면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멋진 사진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온 건 저녁 열 시 즈음이었다. 같이 야경을 본 사람들 중중에 같은 방에 배정된 사람들이 있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들어가 거실에서 조용히 담소를 나눴다.

 

<음악분수.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외려 그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여덟 시 사십 분에 예정된 아침 관광투어를 통해 도산서원과 제비원을 둘러봐야 했지만 인원수 부족을 이유로 일정이 취소되었다. 샤워를 마치고 어디를 가야할까 고민을 했지만 안동의 거의 모든 사적지는 시내에서 버스를 최소한 사십 분을 타야 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 시에 오후투어가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적어도 열두 시까진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유적지로 가는 버스들은 열 시부터 운행을 했고, 나는 관광시간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배로 더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내가 택한 건 어제 갔던 월영교를 넘어 민속촌이 있는 곳까지 산책을 하는 것이었다. 이왕 여행을 왔으니, 내 두 다리로 어딘가를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생수 한 통을 사고 자전거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중간에 석탑 하나를 보고, 월영교도 지나갔다. 걸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간헐적으로 사이클 복장을 갖추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자전거 몇 대 만을 봤을 뿐. 월영교로 가는 아침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목적지였던 안동댐까지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안동댐은 생각보다 거대하지 않았다. 반환점부터 갑자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몸을 식히기 위해 민속박물관에 들어가 관람을 했다. 일천 원의 관람비는 꼭 일천 원정도의 값을 했다.

민속촌을 나온 뒤엔 낙동강변을 따라 건너편으로 걸었다. 호반을 따라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었고, 오른쪽엔 강물이 왼쪽엔 숲이 울창했다. 숲과 물이 양쪽에 있으니 시원했다. 세 시간 가량을 걷고 나니 몸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를 한 뒤 침대에 잠시 누웠다.


<낙동강변을 걸으며>

 

오후엔 예정되어 있던 관광을 나갔다. 상대적으로 가고 싶었던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안동역 초입에서 게스트하우스 차를 타고 사십 분 쯤을 달리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서원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덜그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봉고차는 신음소리를 냈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이 원래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했다. 서원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풍경만큼은 예뻤다. 적재적소에 건물을 배치하고 조경을 함으로써 멋을 풍겼다. ‘만대루라는 누각이 있었는데, 원래는 개방되어있었으나 사람들이 함부로 그곳을 이용하는 탓에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써져 있었다. 비록 만대루엔 올라가보지 못했지만 마당의 백일홍과 만대루는 멋진 조화를 이뤘다. 병산屛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산들의 모습이 마치 병풍 같아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에서 과거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나는 이번 여행의 테마를 임진왜란으로 잡았더라했다. 안동을 첫 방문지로 잡은 건 임진왜란의 기록이 담긴 징비록을 쓴 류성룡의 고향이 안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가 자리를 옮기고 운영(?)했던 병산서원을 와보고 싶었다. 서애 선생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처음 이곳으로 서원을 옮겨올 때만 해도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까. 그 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 줄기는 계속해서 그 흐름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병산서원>


 서원을 나온 뒤엔 바로 하회마을로 향했다. 아마도 안동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풍산 류씨 집성촌인 이 곳 하회마을이 아닐까. 허씨와 이씨가 이곳을 자신들의 터로 잡으려고 했지만 최종 주인은 류씨로 결정이 났다. 하회마을은 그 유명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매표소 바로 앞에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갈 당시 찍었던 사진들이 전시된 작은 기념관이 있었다. 탤런트 류시원의 젊은 시절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민속과는 다르게 하회마을인 이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기거했다. 예전엔 개방을 많이 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문 이후 관람객이 늘어난 탓에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만 개방됐다. 마을 초입엔 하얀 연꽃들이 펼쳐졌다. 장미꽃처럼 향기롭진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느껴졌다. 마을 안쪽엔 초가집과 기와집 두 종류가 있었다.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지금도 농사를 짓는 집이라고 문화해설사가 말해주었다. 기와집들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나 그 유명한 풍산기업 소유자들의 집이라는 설명도 들었다. 과거에 양반들이 가마를 소유했다면 이십일 세기로 바뀐 지금, 그들은 가마 대신 외제차를 몰고 있었다.

집집마다 있는 명패는 모두 씨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중엔 柳時元이라고 적혀진 명패도 발견 할 수 있었다. 난 서애 선생의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는 충효당에 좀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오후투어만큼은 시간을 지켜 사람들과 같이 이동해야 되는 터라 그곳에 가보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회마을은 河回마을이다. 강물이 마을을 온전히 돌아나기기 때문이다. 풍수지리 적으로도 좋은 지역이라는 평을 듣는 이 마을의 유일한 허점은 나루터 가까이에 있는 ’(하회마을을 원의 형태라고 보았을 때)부분만 강 건너에 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서애 선생의 형이었던 류운룡은 풍수지리에 아주 능숙했고, 산이 없는 그 부분에 소나무 만 그루를 심어 그곳으로 좋은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 시절, 재력가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송림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하회마을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직도 이 나무 앞에서 굿을 하고 탈춤을 춘다고 한다>


<부용대에서 내려다 본 하회마을의 모습. 해설사는 강 위에 뜬 연꽃 같다고 비유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에 가기 위해 나루터에서 배를 탔다. 오십 미터도 안되는 강을 건너는데 삼천 원을 내야했다. 요금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곳 하회마을은 풍산기업에서 운영하고 이 마을 사람들이 운영하는 터라 국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편에 내린 뒤 이런 불평을 하며 올라갔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옥연정사라는 곳에 도착했다. 류성룡은 이곳에서 왜란이 끝난 후 <징비록>을 집필했다. 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서애 선생은 자신의 나라가 더 이상은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의 풍경은 조용했다. 그 옛날, 하회마을을 찾아온 보부상들이나 여행객들도 부용대에서 잠시 쉬어가며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가장 안동적인 것들을 본 뒤에 숙소로 돌아왔다. 도산서원을 가보지 못했던 일, 하회마을의 이면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이 또한 여행을 하면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오늘 보지 못한 것은 다음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잠이 든다. (2015年 7月 18日)

 


 

MEMO

*18일 부로 경북지역의 메르스 경보가 없어졌다. 마지막 자택격리자의 격리 일자가 끝났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강이 아닌 다른 강을 볼 수 있었다. 안동 기차역 바로 뒤로 흐르는 낙동강은 그 폭이 한강의 이분의 일 정도였다. 첫 날 저녁 하류를 보고, 병산서원에서 막 산에서 내려온 중류를 보았다. 그 중류는 하회마을을 돌고 낙동강 댐을 지나 시내로 흘러내려간다.

*병산서원은 서재와 동재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이를 구분해서 방을 쓰라고 했단다. 아무래도, 과거科擧에 초시였던 사람과 재시, 삼시를 본 나이 지긋한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면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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