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서문을 다듬은 글입니다.


 같은 시간을 나눴던 이들과의 모임에는 남다른 기억력을 뽐내는 사람이 꼭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7년 만에 만난 재수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유달리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왜 걔 있잖냐. 맨날 잠자고, 자습 빼먹고 피시방 가던 놈. 하, 누구더라...” 다들 조용히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뒤늦게 합류한 A가 치고 들어온다. “아, X 말하는 건가? 자습이 뭐냐. 수업도 빼먹고 피시방 돌아다니느라 바빴지. 걔네 무리가 있었어. Z, W, U랑... 맞다, S. 이렇게 넷이서 같이 다녔잖아. 아, 그리고 니네 그거 아냐? Y랑 X랑 잠깐 사귀었던 거.”

 

이윤기,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2011) 중에서

 

하나 더 있다. 연례행사처럼 모이는 중학교 동창(회라기엔 초라하지만 어쨌든)회. 술이 한두 잔 들어가면 누구 할 것 없이 B에게 말한다. “야, 오랜만에 출석번호 좀 외워봐라.” 싫은 듯, 귀찮은 듯, 하지만 B는 거침이 없다. “1번 C, 2번 G, 3번 F, 4번 Q....” 어느 날은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B가 역으로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야, 니네 키 번호는 기억하냐. 개학하고 첫 날에 키 번호로 앉았잖아. 1번 F, 2번 C, 3번이 나였고.. 그때만 해도 진짜 작았지, 4번 R....”

 

홍상수, <생활의 발견>(2002) 중에서

 

이런 놈들의 기억력들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긴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로 닮고 싶은 기억력은 따로 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어떤 날을 회상할 때 다른 건 다 모호하더라도 날씨만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고 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글, 말에는 유달리 날씨에 대한 언급이 잦다. 이를테면 그가 친구에게 “그렇게 살지 마”라는 전화를 받은 새벽에는 유달리 비가 많이 왔었고, 영화 동지 정은임 아나운서가 세상을 떠났던 그 해는 10년 만에 가장 더웠다.

 

날씨로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름, 번호를 기억하는 것과 다르다. 중요한 건 여기서 날씨란 기상청이나 일기예보에서 무미건조하게 예측하고, 보도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억과 맞물린 날씨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물론 날씨는 그때 ‘하필’ 그런 상태였겠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인과의 틀 속에 꾸겨놓곤 하는 우리에게 날씨가 결코 우연으로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날씨로 어떤 시간, 공간, 사람을 떠올린다는 것은 그날, 거기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분위기와 느낌을 전체적으로 떠올린다는 말과 같다. 이 얼마나 근사한가.

 

왕가위, <중경삼림>(1994) 중에서

10월의 마지막 날, 11월부터는 하루하루 날씨를 유심히 기억해 두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아니,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2015년 10월 31일 토요일. 엊그제부터 점점 추워지고 있지만, 아직까진 친구들과 나눠 마신 막걸리 한 잔에 추위도, 근심걱정도 털릴 정도. 버틸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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