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 딱 감고 바늘로 푹 찔러 내 안에 차올랐던 모든 감정들이 말끔히 빠져나가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누군가에게 부탁해 고이고이 접어 서랍 안 쪽에 넣어달라고 하는거다. 그렇게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라지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이유모를 우울감이 찾아올 때면 우린 종종 계절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나 봄타나봐.’, ‘나 가을타나봐.’ 하지만 정말 계절만이 이 이유모를 우울감의 원인인 걸까?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은 이유가 너무 많아서 마치 여러가지 색의 실타래가 뒤엉켜 어떤 색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처럼 ‘에라, 모르겠다.’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뒤엉킨 색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내야 하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돈된 실타래의 색들을 확인하고 심지어는 예쁜 팔찌 하나를 만들어 낼 수 있지는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우울증, 또는 때때로 찾아오는 이 우울감의 상태에서는 무기력해진다는 함정이 있다. 속은 공허하고, 의욕은 상실되고,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매력적인 글귀와 명언을 보아도 예전처럼 가슴이 요동치지 않는다. 페이스북을 보면 다들 멋지게 살고 있는데 나만 정지해 있는 것 같다.

 

안다. 힘들다는 것. 하지만 단순히 ‘봄 타는 것’으로 책임을 떠넘겨서는, ‘언젠간 괜찮아지겠지.’하며 방관해서는 지금 이 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안다. 앤서니 기든스는 현대의 자아정체성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할아버지가 하고, 아버지가 했던 일을 이어받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정체성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터넷, 스마트폰, 미디어의 발달로 시공간의 구분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정보의 양과 경험으로 다수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 때 우리 안에 형성된 각각의 정체성은 서로 모순되어 충돌하며 자아를 분열시킨다.

 

그러니깐 당연한 것이다. 우울하다는 것은.

 

그래서 나는 또 안다. 지금의 이 무기력함에서, 이 공허함에서, 이 우울감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것이라는 걸. 그리고 또 언젠간 찾아올 것이라는 걸. 사람마다 이에 대처하는 법은 다르겠지만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나만의 ‘발버둥침’을 조금 소개하고자 한다.

 

글로 쏟아내기 그리고 마지막은 긍정적인 문장으로.

 

엉켜진 실타래를 풀어 내는데는 반드지 글로 쏟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도대체 이 감정은 뭐지?’, ‘우울한데 이유를 알 수 없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지금 느껴지는 감정들, 생각들, 내가 처한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긴다. 한 편의 멋진 글을 써 내는게 아니라 단순히 내 안에 엉켜있는 생각과 감정의 실들을 빼내는 것이다. 그러니깐 글쓰기에 대한 부담은 없어야 한다. 부담이 생기면 꾸며 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모호했던 감정들이 언어로 구체화되면 내 상태가 스스로 진단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은 항상 긍정적으로 끝내는 것이다. 마지막 긍정적인 한 줄이 치료법이다. 부정적인 문장에서 끝나면 내 감정 또한 부정적인 것에 머물러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느 날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외로움이 사무쳤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써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감사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서서 온전히 그 감정을 느끼도록 노력했다. 가끔씩은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보다 정면으로 맞서보는 것도 방법이다. 

 

움직이기.

 

우울할 때는 운동을 하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론 운동을 통해서 몸을 일부러 움직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움직임’은 몸을 움직이는 것  뿐만이 아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만나서 입을 움직이자. 또는 평소에는 안하는 퍼즐 맞추기라던가 그림 그리기를 통해 손을 움직여 보자. 아무 생각없이 재밌는 예능프로를 보며 하하 웃으며 표정을 움직이기도 하고, 진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뇌를 움직여보기도 하자. ‘움직임’은 내가 살아있음의 증거이다.

 

사소한 성취감 느끼기

 

갑작스런 우울함이 밀려들어올 때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그 시기에 스케쥴러는 텅텅 비어있다. 연말이 되어 지난 1년간의 스케쥴러를 되돌아보면 그 여백을 통해 인생의 여백의 시기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채우려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루하루 성취할 수 있는 사소한 일들을 적는다. 예를 들면 그 동안 쌓아놨던 책상의 책들을 정리한다던가, 보고 싶었던 영화를 시간 내어 본다던가, 혼자 밤에 산책을 한다던가 등의 그런 사소한 것들.

 

 

사실 이 글은 나에게 쓰는 조언정도가 될 듯싶다. 어쩌면 이 글을 통해 나는 글로 쏟아내기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풍선이 되고 싶다. 하지만 이왕이면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 수 있는 풍성한 풍선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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