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세상을 뒤흔든 전쟁, 혁명은 절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짧게는 10여년, 길게는 50여년 넘게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혁명적 사건의 시발점은 이전부터 점진적으로 내재된 원인들이 누적된 것으로 출발한다. 그리고 어느 한 시점에 조그만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폭발한다. 이처럼 역사적 사건은 즉흥적이거나 우연이 아닌 이유로 발생한다.

1936년 7월에 벌어진 ‘스페인 내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페인 내전(Guerra Civil Española)은 공화 정부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불만을 품은 호세 산후르호, 프란시스코 프랑코(이하 프랑코), 에밀리오 몰라(이하 몰라) 등 보수적 성향의 장군들이 팔랑헤 당(파시즘 정당, 후에 통합 팔랑헤당으로 개편, 프랑코 내각의 집권여당이 된다.), 왕당파와 함께 스페인령 모로코와 북부 스페인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보수 우익 반란군 진영인 국민 진영'과 '인민전선 내각이 이끄는 공화 정부'가 이념의 차이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벌였고 3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약 35만 명이 사망, 50만 명의 국외 망명자가 발생하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장한 공화 정부 여성 지지자들, 1936년, 마드리드.”
후방 지원과 시가지 전투 참여까지 실제로 여성들의 참여가 적지 않았다.

(출처: http://www.gettyimages.ca/detail/news-photo/war-and-conflict-spanish-civil-war-pic-23rd-july-1936-an-news-photo/80752137)

작용과 반작용: 지배 세력의 억압에 대한 민중의 대응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사상의 자유와 과학이 전 유럽을 아우르던 20세기 초반까지도 미신에 근거한 가톨릭 권위주의와 절대왕정에 푹 절여있던 스페인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19세기까지 스페인에는 중세 시대에나 있을 법한 종교 재판소가 아직 존재하였고 학문의 자유와 교육, 문예는 가톨릭교회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세기 제국의 위용을 갖추던 모습은 쇠퇴하였지만 대내적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왕권과 그를 뒷받침하는 군인들의 총칼로 민중을 지배하였다.

스페인 왕국 안의 이민족이었던 북쪽의 바스크 인들과 동남쪽의 카탈루냐 인들은 여전히 마드리드 중앙 정부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갈등은 카스티야 지방(마드리드) 중심의 중앙집권주의에 대항하여 내전의 기초를 다지는데 일조했다. 왕, 군인, 교회, 자본가와 대지주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을 선호했고 장군들의 빈번한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 일반적인 의미의 쿠데타와는 다른 스페인, 남미에서의 군사 항명. 국왕으로부터 '독재권'을 부여받는다.)는 스페인 사회를 도덕적 해이와 극단적인 혼란으로 몰고 가곤 했다. 그들의 시대착오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지배를 감내해야했던 도시 중산층, 노동자, 소작농 계급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무신론,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유주의, 공화주의 등 급진적인 외래 사상에 쉽게 포섭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듯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이미 50여 년 전부터 스페인 사회는 군주제, 가톨릭, 군벌, 자본가, 공화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 다양한 계급과 이데올로기로 사분오열되었고 온건한 개혁이나 타협으로는 사회적 모순을 더는 어찌해볼 수 없는 대분열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부르고스 지역에서는 사제들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중세적 모습이 나타나는 반면, 대도시 바르셀로나에서는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이 활동하였고, 말라가나 산세바스티안에서는 강력한 노동조합들이 존재하는 등 모순적인 공존이 가능한 곳이 바로 19세기 말 스페인이었다. 타협할 수 없었던 양대 세력의 거대한 충돌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내전의 대내적, 대외적 영향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진영이 승리하기까지 3년 동안 전선에서는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공화군과 국민군 양쪽 모두에 의해 정치인, 민간인, 지식인, 가톨릭 사제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보복 학살 및 불법 구금, 고문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광기를 피해 스페인인들은 미주, 중남미, 프랑스 등 국외로 도피하였고 이는 스페인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초래했다. 또한, 스페인 내전은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진영의 방관 속에 공화 정부를 지원한 소련과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지한 나찌 독일, 이탈리아가 충돌하는 국제 대리전의 성격으로 발전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자신들의 신형 무기와 전술을 스페인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을 상대로 마음껏 시험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승리를 통해 이 파시스트 독재자들은 내전 종식 후 5개월 뒤 벌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31년 대규모의 민중 혁명으로 국왕 알폰소 13세가 퇴위한 직후 수립된 스페인의 ‘유일합법 공화 정부’는 서구 진영이 사태를 방관하는 사이에 결국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 반란군에게 패망하였다. 반란군 장군 중 하나였던 프랑코는 ‘지도자'(caudillo)로 등극, 1975년 죽을 때 까지 36년 간 스페인을 철권 통치했고 77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은 민주화가 되었다. 프랑코 사후, 지도자가 된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Juan Carlos Ι)는 자유선거 실시와 정당 활동을 합법화하는 등 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하는 한편, ’사면법‘을 제정, 좌익 진영의 과거 범죄와 더불어 프랑코 진영의 반란죄 및 기타 범죄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구 반란 세력을 단죄하기보다는 포용하는 방식으로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다.

스페인 내전의 특징과 민중들의 수난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느 남유럽 국가의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스페인 내전의 비극적인 역사와 우리의 해방 정국 이후 현대 정치사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절대 왕정과 일제 통치라는 강압적 지배 방식에 대한 반작용으로 민중들은 점점 폭력이 수반된 극단적인 혁명을 모색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한국의 민중들은 각각 왕정 폐지, 일제 패망에 따른 절대 권력의 공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율적인 국가 경영의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화와 타협, 의회민주주의 같은 상식적이고 온건한 입헌적 절차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보다는 백색 테러, 적색 테러 등 무고한 살인과 폭동, 사보타주 따위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 했다. 집단이성의 마비에 따른 시대적 폭주를 제어하지 못하고 폭력 등의 방식 외에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던 결과가 내전(스페인 내전, 한국 전쟁)이었다.

1. 내전 발발 초기

 

 

스페인 내전은 장기간 누적되어온 보수와 진보, 권위주의와 자유주의, 가톨릭과 무신론자,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간의 갈등을 과격한 반동적 쿠데타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장교들 뿐 아니라, 주요 거점에 배치된 일개 하사관이나 병사들도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지방에 파견된 공화 정부의 관리들 역시 자신의 정치적 노선이 분명하였다. 반란 초기에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등 분명 여러 면에서 완벽하다고 할 수 없었던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각 부대 지휘관의 결단이나 하급 장교 혹은 병사들의 조직적인 행동, 그리고 치안대와 돌격대 같은 준군사 조직, 각 주지사들이 어느 편에 설지에 대해 신속하게 입장 표명을 함으로써 내전 발발 한 달 만에 스페인 전역은 ‘두 개의 진영’으로 확연히 갈라졌다.

 

“아직은 건재한 공화 정부”
내전 발발 한 달 후인 1936년 8월. 국민군(회색)은 고작 식민지 모로코와 지중해의 여러 제도, 그리고 북부의 부르고스, 팜플로나 지방, 서남부의 안달루시아 일부 지역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에 비해 공화 정부(붉은색)는 수도 마드리드와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 북부의 빌바오, 산세바스티안 시가 북쪽의 국민군 영역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제3의 도시 발렌시아와 군사 요충지 카르타헤나 항 역시 공화 정부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출처: https://www2.bc.edu/~heineman/maps/SpCW.html)

2. 미디어를 통한 국제 여론 포섭

그리고 스페인 내전은 이전의 전쟁의 양상들, 즉 군대 대 군대의 싸움에 의존했던 일차원적 전장의 개념을 벗어나 라디오 방송, 신문과 같은 현대 미디어를 통해 상대 진영의 사기를 꺾으려했고 각 진영의 공보 담당 관리들은 외신들을 이용하여 각자 자기 정부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 하였다.

3. 우리 안에 적이 있다!

전쟁의 양상은 전면전과 더불어 후방에서의 게릴라 전, 도시 점령 후 시가전 등 꽤나 지루하고 소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소위 적의 첩자 혹은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경향을 가진 인사들이 각각 상대 진영 도시에 암약하여 스파이 역할을 하였다. 설령 일부 도시에서는 그런 세작들의 활동이 없었다 하더라도 내 안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각 진영 내부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불신과 분열을 불러일으켰다. 반란군 국민 진영의 장군 몰라는 방송을 통해 “마드리드에는 우리의 제5열이 침투해있다.”라는 식으로 공화 진영을 심리적으로 압박하였는데 결과는 예상외로 효과적이었다. 마드리드 공화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한 축인 스페인 공산당원들은 군 수사국을 이용해 초법적 권한으로 우익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처형과 고문을 자행함으로써 불안감을 해소하려했다. 스페인 공산당원들의 비이성적인 공포 정치는 결국 공화 정부 내각에 대한 민심 이반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사회 민주주의자, 좌파 공화주의자, 중도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내부 불신은 프랑코의 마드리드 입성과 공화 정부의 패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인민재판: 우리 편 아니면 전부 빨갱이(혹은 반동)이다!

누가 적이고 누가 결백한 민간인인지를 판단하거나, 적에게 얼마만큼 부역했는지 에 대해 혐의를 입증하려는 능력도, 의지도 사실상 양 진영 모두에게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일부 도시에서는 공화 정부 쪽 민병대에 의해 국민 진영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지주, 성직자들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였다. 또한, 공화 정부의 치안 당국은 국민군에 의해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미리 정치범 수용소의 우익 인사들을 줄줄이 총살시켰다. 그러다가 국민군이 점령한 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동안 숨어 지내던 우익 인사들은 기세등등하게 좌익 인사들뿐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밀고하는 등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무장한 사제들과 레케테(카를로스 파 민병대: 왕당 보수파), 팔랑헤당 당원들은 ‘오염된 스페인은 정화되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노동조합원, 노조 간부, 공화군, 공화 정부 관리 및 반 국민진영 혐의에 조금이라도 연루되어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을 즉결처분하였다. 물론 변호인이 동석하거나 삼심제 형식의 상식적인 재판 절차 따위는 없었다. 국민 진영이 점령한 도시에서는 보통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국군의 보복, 밤에는 빨치산 세상을 감내해야 했던 한국전쟁 당시 우리 민초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게 없었던 것이다.

 

“스페인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지 모로코에서 거병한 국민 진영은 현지 리프족들로 이루어진 외인부대를 반란에 끌어들였다. 본토에 상륙한 후 이들은 뛰어난 매복술과 근접전으로 국민 진영의 핵심 전력이 되었고 스페인 민간인을 상대로 집단적인 학살, 강간, 약탈을 저질렀다. 수세기 동안 스페인 점령군의 희생양이었던 그들이 스페인 장군 프랑코를 위해 총을 든 것은 참 역사적인 아이러니이다.  

(출처: http://www.alternatehistory.com/discussion/showthread.php?t=287588)

5. 시가전에 따른 국민군의 보복

내전 기간 동안 국민군의 도시 탈취 작전에서 되풀이 된 시가전은 또 다른 비극을 초래했다. 국민 진영은 동맹국인 독일, 이탈리아 공군의 압도적인 폭격 지원으로 공화 진영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후 ‘도시 접수’를 위해 투입된 지상군 병력 중 상당수가 건물이나 주택에서 은폐 중인 공화군 잔당과 무장한 노동자, 민간인들의 기습 사격이나 저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건물을 하나하나씩 제압하면서 도시 전체를 장악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병력 손실이 만만치 않았다. 독이 오를 데로 오른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Regulares, 아랍인으로 구성된 스페인령 모로코 외인부대)들은 민가에 수류탄을 집어넣고 병원의 환자들을 집단 살해하거나, 생포한 민간인 부녀자들을 집단 강간하는 만행으로 대응하였다.

6. 무차별 도시 폭격 작전과 민간인 살상

프랑코 국민 진영 반란군을 지원한 이탈리아와 나찌 독일은 공화 진영 도시들에 대해 현대 전쟁사에서 최초로 다수의 폭격기를 동원한 무차별 대량 폭격작전을 수행했다. 독일의 리히트호펜 대령이 지휘한 콘도르 군단(스페인 파병 독일 군대) 소속 하인켈, 융커 폭격기의 무자비한 폭격은 비인도적인 인명 살상을 초래했고 특히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대한 폭격은 적지 않은 민간인 학살(민간인 희생자 수에 대해선 국민 진영과 바스크 자치정부가 다르게 주장함)을 초래했기 때문에 나찌 독일과 국민 진영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진영과 동맹국의 폭격전략은 국민 진영이 공화 진영의 도시들을 탈취할 때 그 심리적, 전술적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에 스페인 국민들의 안전과 생명은 더욱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7. 대리전쟁(독일, 이탈리아 vs 소련)

애초부터 나찌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정부는 막대한 차관과 군대, 무기 등을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서쪽 국경을 맞대고 있던 스페인에 자신들과 유사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 프랑스의 후방을 위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 수송기들은 모로코 주둔 국민군과 모로코 레굴라르들을 지중해 건너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에 신속하게 상륙시킬 수 있게 해주었고, 이는 공화 정부가 국민 진영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독일의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나찌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 국민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콘도르 군단’을 결성, 파병하였는데 스페인 전장을 많은 신무기와 전술을 시험하는 무대로 활용하였다. 거의 수직으로 강하하여 목표물에 정확하게 폭탄을 투하하는 슈투카 폭격기도 이 중 하나였다. 폭격시에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났기 때문에 공화군과 스페인 시민들이 느꼈던 심리적 공포는 배가되었다.

(출처: http://www.thisdayinaviation.com/tag/stuka/)

(다음편 예고) 두 개의 스페인(中): 지성의 패배


※위 칼럼은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김원중 역, 2009)에서 참조 및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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