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제국적 기획이 낳은 비용은 미군 병사들이 입은 정서적 피해와 그들 주변 사람들에 대한 승수 효과에 매겨져있다. 전쟁과의 인과관계에 따른 참전용사들의 자살이 우리에게 엄습할 때 드러나는 사람과 전쟁에 대한 대조적 관점들─르포, 블록버스터, 트라우마그룹 다큐멘터리.

 


 

조안 위피예프스키(JOANN WYPIJEWSKI)

 

나 홀로 집에

 


한 나라가 멍청하다고 말하는 게 상스럽다는 건 인정한다. 더구나 유효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사실상 삶의 모든 다른 영역에서 공통된 진실의 일부를 보여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미국인들이 이라크에 다시 파병하는 데 57(CBS), 60(Fox), 또는 62퍼센트(퀴니피악Quinnipiac 대학)만큼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온 최근 조사는 미국의 상당수가 실제로 멍청하며,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 곳 중 가장 최근에 해당하는 퀴니피악 대학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69퍼센트가 미국과, 대충 끼워 맞춰진 어떤 동맹국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워싱턴은 그렇게 자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르나,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세’라는 낡은 만트라mantra(주문 – 옮긴이)를 부활시키기 위해 점점 더 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2013년에 진지하게 ‘전쟁을 거부하는war-weary[각주:1] 국가’ 운운했고 작년엔 사막에서의 참수를 통해 고객들을 꾀어냈던 미디어 기업들은 의식이 없는 기억상실을 향한 경로를 뻔하게 따르고 있다. ‘미국인들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워싱턴 포스트는 2월에 온라인으로 공표했다. 한 달 후 자유주의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msnbc는 거의 동일한 언어를 썼다. ‘희미해지는 전쟁 거부: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isis 지상전을 지지한다.’

 

 

반면 인구의 극소수─대략 표준적인 기준에 따라 0.16퍼센트─는 전쟁의 리얼리티에 너무 지치고, 깊은 상처를 받았으며, 매우 극심해서hyper-acute 잠자리에 들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종종 살아가기조차 힘들어한다. 이들은 오랜 기간 전쟁에서 싸워왔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군인들이다. 개괄적으로 500000명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모든 군대의 비율로 본다면, 그리고 그들의 삶과 밀접한 부모, 배우자, 연인, 그리고 아이들 등으로 퍼지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훨씬 커진다. 그 또한 실제보다 적은 것이다. 그건 완전한 영향이 지체될 수 있는 PTSD의 성질을 반영하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는 이들, 혹은 남모르게 고통 받는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다. 최소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있었던 270만 병사들의 반수는 의학적 감정이나 치료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의 정신적 상흔은 낙인이다. 그들은 또한 고통스런 모순점을 보인다. 병사들은 실제로 죄책감과 분노로 고통 받고 아파하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위안을 다급히 필요로 한다. 반면에 대중으로, 만약 도움이 안 된다면, 상상력으로 정상성을 정의하는 사회는 김빠지고, 요원하고, 진지하지 않으며, 무책임하다. ‘정상’은 더 이상 전쟁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성적인 사람, 도덕적인 영혼이 정상이 되고 싶어 할까?

 

 

(전쟁에 대한 – 옮긴이) 외상적 거부Traumatic weariness는 어떤 관습적인 의미에서도 영웅적이지 않다. 특별히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아킬레스의 무기력보다는 그의 야만성을, 오디세우스의 눈물보다는 그의 현명함과 모험심을, US Navy SEAL 크리스 카일Chris Kyle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하기 보단 ─특히 그의 자서전 American Sniper가 증명하듯─ 필적할 수 없는 살인 기록과 인종주의를 기억한다. 데이비드 핑클David Finkle은 환호를 받았고, 2007년 파병 급증의 일환으로 이라크에 파견된 켄자스 포트 라일리Fort Riley 보병대대에서의 경험을 담아 2009년 출간한 The Good Soldiers 이후로 맥아더 영재상MacArthur genius grant을 받았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는 동일한 병사 일부와 그들의 가족들이 ‘전후’ 살아가는 모습을 좇는 2007년의 후속작 Thank You for Your Service의 판권을 샀으나, 영화 계획은 미뤄졌다. 별 다른 행동은 없었고,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 책은 읽기 힘든harder 전작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그 책을 읽는 건 곧 인내심의 발현이었다. 폭력으로 인하여 책에 삽입된 전보(戰報)에서 전율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전보는 사건의 처음과 끝을 다루고, 형용할 수 없는 적의 끔찍한 행위들을 나열하는 동안 전우band of brothers의 끔찍한 행위들은 구원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책과 로랑 베큐-레너드Laurent Bécue-Renard의 최신 다큐멘터리 Of Men and War에서의 폭력은 군인의 존재 속에 파고들어가고, 감정적인 EFP(아마 ‘폭발 성형 관통자’Explosively formed penetrator의 약자인 듯. 하여튼 참전 군인의 통제 불가능한 정서적 불안을 말하려는 것 같다 - 옮긴이)는 어디서나, 어느 방향으로든, 몇 번이고 배치되어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라는 용어는 일찍이 오랜 전쟁에서 쓰였다. ‘Support the Troops’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을 하나로 행동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전역에 걸쳐 도시들에선 노란 리본, 잔디밭의 노란 표지판, 풍선, 그리고 자동차용 스티커가 마치 경기가 있는 날의 팀 컬러처럼 나타났다. 전쟁은 마치 하나의 스포츠였고, 사람들은 관중이었으며,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빠르고 결정적인 승리를 따낸 전투부대에 대한 찬사였다.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팀의 사기는 상업의 리듬을 따랐다. ‘Support the Troops’는 ‘Buy American[각주:2]이 그랬던 것과 같은 방식─가게 창문, 게시판, 범퍼 스티커에 쓰인 슬로건─으로 나타났다. 전쟁은 기업이었고, 보안은 제품이었고, 사람들은 소비자였으며, 병사들은 숙련 노동자였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일종의 사례금이었다. (사실상 사업이라기에도 뭐했지만) 기업이 실패하자, 표지판들은 사라졌고, 때로는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그림인 ‘Pray for Our Troops’로 대체되기도 했다. 전쟁은 문제시되어왔고, 병사들은 지쳤으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고, ‘Thank you for your service’는 얼마 남지 않은 공허한 에티켓이나 고행쯤이 되었다. 바로 그때 핑클은 시민들 사이에선 다른 문제로 넘어가려는 열망이 있고, 병사들에게는 씁쓸함이 남아있다고 적었다. ‘그들이 내가 겪었던 것을 알았다면, 내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그런 지랄맞은 소리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정확히 똑같은 말을 했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 리포터인 핑클은 그 순간의 비애감pathos과 부조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 한 외교관에게 2005년 조지 부시Geroge W. Bush 대통령이 예맨으로 ‘민주주의의 수출’ 정책을 깨닫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퓰리처 상을 탔던 연작은 (외교관의) 선의와 (양측 정부의) 잘못된 방향, 그리고 돈, 위험과 중복되는 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The Good Soldiers는 패전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은 모두 파탄 직전의 제국의 역사에 대한 에피소드로 읽히지만, 그가 보여준 부조리를 넘어서 이런 제국의 기획들에 대해 작가가 믿었던 것은─그가 중동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진출이 단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무가치한 외국 파트너에 의해 좌절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서투른 문민 지도자에 의해 실행 됐다고, 혹은 지배와 확장에 대한 더 크고 오랜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털어놓지 않는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가 출간된 이후 인터뷰에서 핑클은 전쟁에 의해 모든 병사들이 끝장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다. 대부분은 적응하고 잘 살고 있다. 그는 힘들어 하는 이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단적 책임의식을 인정하고 싶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 책은 ‘어젠다로부터 자유롭다’라고 말한다. 엄밀히 그건 옳지 않은데, 그가 그런 것처럼, 전쟁을 영원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군국주의를 미국의 정책과 문화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이기 때문이다. 책과 책 속 모든 이들은 전쟁의 정치학과 그것이 전쟁 이후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해 침묵한다. (하지만 – 옮긴이) 그것 또한 정치적 결정이다. 하지만 핑클과, 그가 8개월 동안 의지했던 병사들이 겪었던 전쟁은 논리나 논쟁을 벗어나, 오직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만이 있기에, 정치 밖에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또는 그가 썼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때까지 전쟁은 점점 의미를 잃어갔고, 반면에 그 모든 것을 의미할 때까지 다른 병사들의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한 Thank You for Your Service은 의미가 소멸될 때, 즉 병사들이 해산하고 그들이 겪은 극한의 경험이 집의 친밀하고 사교적 이해관계와 충돌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원문 99-102쪽>

 

 

 

NLR32705.pdf


* <뉴 레프트 리뷰>는 1960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격월로 발간되는 잡지입니다. 이따금 한국어로 번역되어 단행본(도서출판 길)으로 출간되긴 하지만, 영어판 잡지에 기고된 글을 선별적으로만 다루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BIG HIP>에선 <뉴 레프트 리뷰>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된 글들을 최대한 번역해서 수록할 예정입니다. 저는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에, 분명 오역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걸 발견하신 분이라면, 제게 훈수를 두셔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공동 번역 작업을 제안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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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브러더스 코리아㈜

 

  1. 사전에 따르면 war-weary는 ‘전쟁에 지친(피폐한)’정도로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그것보다는 더 능동적인 의미로 쓰인 것 같아 ‘전쟁을 거부하는’으로 번역했다. 또한, 위키백과에서는 war-weariness를 ‘War-weariness is the public or political disapproval for the continuation of a prolonged conflict or war’로 정의하고 있으므로, ‘거부하는’이라는 의미를 배제할 이유가 없다. (옮긴이) [본문으로]
  2. 미국 정부의 국산품 구입 운동. 또는 그 정책. 1930년 연방법에 따라서 입법화되었으며, 1960년 이래 달러 방위를 위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제창하였다. (네이버사전 – 옮긴이)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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